유진태의 집에 은거하고 있던 어느 날 종로경찰서의 악명 높은 일인 형사 미쓰와(三輪)가 불시에 나타났다. 그동안 만났던 인사들 중에서 귀국 소식이 흘러나가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미쓰와는 이회영을 붙잡고 일가가 재산을 정리하고 망명한 사람이 갑자기 만주에서 돌아온 이유를 캐물었다.
이회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선영의 산소에 나무를 누가 함부로 베어 낸다는 소식을 듣고 조상의 산소에 성묘, 배례도 하고 동기 자매와 친척도 만나고자 겸사겸사로 돌아왔다.” (주석 5)
미쓰와는 언제 다시 만주로 돌아갈 것인가, 만주로 떠나기 전에 미리 경찰에 연락해달라며 순순히 물러갔다. 그리고 이회영의 동정과 접촉 인사들을 치밀하게 추적하였다.
일경이 이회영을 즉각 체포하지 않은 것은 당장 무슨 혐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조선의 귀족이나 양반 사대부는 독립운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선전해왔기 때문에, 귀족 가문의 그를 구속하여 사건을 확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회영은 이 사건 뒤 더욱 신변을 조심하면서 상동 공옥소학교 교사 출신 이경혁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의가 굳어 믿을 만한 동지였다.
이회영은 매사에 신중한 편이었다. 만나는 사람이나 서한 같은 것을 각별히 조심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이회영의 아들 규창(圭昌)은 뒷날 쓴 회고록 <운명의 여진(餘盡)>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친께서는 성격이 주도면밀하시어 매사에 사려가 깊으시며 험악한 정세이므로 언제 왜놈들이 쳐들어 와도 문제가 될 만한 문서는 그 즉시 소각하고 좀 중요한 문서는 담배 재떨이 밑에 풀로 붙여두니 제 아무리 왜놈이라 하여도 담뱃재털이 밑바닥까지는 보지 않았다. 만주에서 환국하신 후 105인 사건의 여파로 체포되셨다가 증거를 전혀 포착하지 못한 왜놈들이 부득불 석방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놈들의 감시가 거거익심(去去益甚)하였던 것이다. (주석 6)
성격이 주도면밀했던 이회영은 아무리 믿을 만한 동지이거나 만주에서 야밤에 찾아오는 내방자도 같은 방에서 재우지 않았다. 언제 일경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회영 부인과 어린 아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다시 이규창의 회고이다.
그때 나의 기억으로는 한밤중에 비는 억수같이 내리는데 한 청년이 찾아와 장시간 밀담을 나눈 후 그 청년이 억수같이 내리는 비며 먼 길에 와서 핍권(乏倦)하여 타처로 갈 수 없으니 하루 밤을 유(留)하기를 부친께 청하였으나 부친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하시기를 내가 무정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국 형편이 일각도 방심할 수 없는 때라 그 놈들이 지금이라도 들이닥칠지 모르니 그 점을 양해하고 딴 곳에 가서 유하라고 간곡히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그 청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를 맞고 돌아갔는데 새벽녘도 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왜놈 형사와 순사 놈 3명이 불시에 들이닥치니 만약 그 청년이 우리 방에서 유하였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되었으랴? (주석 7)
이 사람은 임석호 또는 임경호라는 청년으로, 1915년 여름 이회영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상설에게 모종의 임무를 띄고 보냈다가 돌아온 측근이었다.
이회영은 1915년 8월 20일 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일경이 왜 갑자기 구속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른바 ‘조선보안법 위반사건’과 관련 가능성이 없지 않다.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은 이상설이 성낙형을 국내에 파견해 고종황제와 의친왕을 해외로 망명시키려다 발각된 사건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사법비밀로 처리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운 이상설은 이듬해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학원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 등 주요 독립운동가들과 회동해 신한혁명단을 조직한다.
신한혁명단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 성낙협을 국내에 파견해 고종과 의친왕을 비롯해 왕족들의 해외 망명 추진을 지시했다. 고종은 내관 염덕인을 통해 덕수궁 함령전에서 관련 서류를 제출받고, 그 배후에 이상설이 있음을 듣고 외교부장 성낙형의 비밀 알현을 허락했다.
이들은 왕자로서 항일의지가 가장 높은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과 그 사촌 김사홍, 김승현 등 다수의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선보안법 위반사건이라고 불렀다.
경기도 경찰부가 ‘보안법위반사건 검거의 전말’이란 문건을 조선총독과 정부총감, 군사령관 등에게 보고한 때가 1915년 9월 21일로서 그해 8월 20일경에 체포되었던 이회영이 3주일간의 구류를 마치고 석방된 때와 비슷한 시기이다. (주석 8)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상설과 연계하여 고종황제를 비롯, 왕족들의 망명을 추진하다 미수에 그치고 관계자들이 구속되었다. 이 일로 인해 이회영도 구속했던 것 같다.
주석 5> 이관직, 앞의 책, 164쪽. 6> 이규창, <운명의 여진>, 42쪽, 클레버, 2004. 7> 앞의 책, 42~43쪽. 8>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66쪽, 웅진닷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