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이다.
황량한 들판 길섶 짚 무더기를 씌운 비닐 자락이 북풍에 펄럭인다. 나는 이 풍진 세월이 싫어 창문을 닫고, 거실에서 빈둥거린다. 바람은 밖이요, 햇볕은 따스하다. 스마트폰 화면을 문지르며 백수의 무료함을 떨쳐보려 하지만, 잔 글에 눈이 아려서 그 짓도 심드렁하다. 설거지를 끝낸 아내가 옆에 와 앉는다. TV를 켜서 녹화해 둔 프로를 띄운다. 인간극장이나 휴먼드라마는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프로다. 시골구석에선 올레TV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으면 아무래도 화질이 구리다.
온갖 방송이 어지러운 요즘이다.
온종일 정치 얘기로 도배하는 방송, 신변잡기로 일관하는 프로를 나는 경멸한다. 한 소재로 엿가락 늘이듯 떠벌이니 재주도 용하다.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는 법정 스님 말씀이 백번 옳다. 그런 방송뿐이라면 우리는 희망을 얘기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간혹 착한 작가가 있고, 참한 사람을 소개함으로써 그나마 안도한다. SBS 스페셜 이선희 편이야말로 그런 사람들이 만든 참한 프로가 아닐까 한다.
나는 이선희를 좋아하지 않았다.
작고한 후라이보이가 가창력의 가수로 치켜세웠어도 깡소리 나는 고음이 싫었다. 가창력 하면 스피커폰 지를 찢는다는 최진희도 있지만, 듣기 싫다. 고함만 지른다고 인기를 얻는다면 태진아는 경합에서 왜 미끄러졌을까. 지방 곡곡 돈 벌러 다니긴 하겠지만, 보기 싫다. 이선희는 작달막하다. 이혼도 했단다. 손뼉도 마주쳐야지, 이유 없는 무덤 있을까.
한창때 나훈아 공연장 아줌마들은 오줌을 지렸다 한다.
실물을 본 사람들은 나훈아 아랫도리가 짧다한다. TV로 보면 모르지만, 가분수란 거다. 그럼에도 백바지 차림에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동작만으로도 뻑 간단다. 30주년 기념 이선희 콘서트장도 그에 못지않았다.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들어찼다. 소녀와 아줌마 팬들이 대부분,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IMF의 어려움을 이선희 테이프로 이겨낸 아줌마도 보인다. 이혼의 아픔을 위로받기 위하여 온 이도 있을 것이다. 클로즈업된 모습들은 하나같이 가락과 가사와 가창력에 몰입되어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아침마당 이금희 아나운서의 푸근한 나레이터에 마음이 풀린 나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간간이 노래 제목을 적는다.
‘J에게, 거리 구경, 아 옛날이여, 너를 만나다. 그중에 그를 만나, 떠나지 마, 인연, 오월의 햇살, 살아가다 보면….’
나는 이선희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금희와 친구여서, 이서진이 좋아해서, 최불암이 칭찬해서, 이덕화가 좋게 소개해서 그렇다. 이혼의 아픔을 딛고 야무지게 성공해서 좋다. 살아남아 노래를 듣게 해줘서 감사하단 팬이 있어서 좋다. 송창식이 말했다. 가수가 일정수준이 되면 스톱하고, 요령만 생겨 본래의 맛을 잃는데 이선희는 점점 좋아진단다. 기교의 70% 정도로 절제할 줄 아는 가수로서 연습을 그만큼 한다는 의미란다. 느림에 버금가는 절제의 미학이다. 세월호가 춥고, 대한의 갑질이 아프다. 춥고 아픈 걸 보는 민초들은 참담하다. 세월 속에 벌거벗은 우리는 위로받아야 마땅하고, 이선희를 기대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장인이 만든 음식이 맛있듯이 그러한 노래가 감동을 준다. 글인들 그렇지 않으랴.
이렇듯 하루아침에 마음을 돌려세운 방송의 위력은 대단하고, 나는 승복한다. 노래에 물리면 동요로 회귀한다고 한다. 나도 그럴 지경에 이르렀다. 소설을 들어가며 산을 오르내리니까. 아내도 소설에 빠졌다. 들을만한 노래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이선희 노래를 받아야겠다. 노래의 장르는 생경할 것이다. 클래식 입문만큼이야 할까마는 쉽지 않을 게다. 노래마다 숨겨진 감동이 있을 진데, 그걸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서가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쉰 세대임에 틀림이 없다.
첫댓글 이선희 LP를 럭스만 턴테이블에다 걸어서 틀어주던 오디오쇼가 생각나는데요, 그때 이선희 노래가 새롭게 들리더라고요. 빰빰빠바바 버젼 아름다운강산은 좀 실망스러웠지만요 ㅎㅎ 아름다운강산은 곱창전골 밴드가 가장 원전에 충실한 연주를 했죠.
그때의 분위기와 좋은 음향시설에 의한 음질이 귀를 뿅 가게 하지 않겠는지요. 가락과 가사와 그리고 듣는 이의 감성이 어울어져야 비로소 감동이 있을 겁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