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보답 없는 섬김
우리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이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당신이 몸소 이 땅에서 사람들을 섬기셨고, 오늘도 미사 성찬례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시며 여전히 우리를 섬기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영성은 아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갖다준 종업원을 하대하는 사람은 몰상식한 이다. 조선 시대에는 하인을 하대하는 게 상식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에게 봉사하는 이에게 감사하는 게 상식이다. 대가를 치르고 받는 정당한 섬김이어도 그렇다. 섬김을 받는 거보다 섬김을 하는 이들이 더 높아진다. 감사 인사 때문만은 아니고 일생을 섬김과 봉사로 산 이들에 대해 저절로 일어나는 존경심과 그들에게 느끼는 알 수 없는 거룩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섬김에 대한 감사가 거의 상식이 되었어도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바람은 여전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 된다. 나중에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가르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42-43)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을 노래 후렴구처럼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누리고 섬김을 받고 군림하고 휘두르고 싶은 본능이 고개를 들 때마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해주어야겠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던 베드로, 토마스, 야고보와 요한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을 거다. 주님을 위해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정말로 한목숨 바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을 거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치고 그랬을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하느님 나라를 위한 완전히 비폭력적인 헌신은 그들에게 헛된 죽음으로 보였을 거 같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는 항소하지 않고 불의한 죽음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이 독립되면 고국으로 옮겨달라.’ 실제로 35년 후에 기적같이 대한민국은 해방 독립됐다. 그런데 예수님이 헌신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여기서 받는 칭송이나 보답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의로운 영혼들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 잃을수록 저기서 많이 받고, 여기서 나의 희생을 아무도 몰라야 하느님께 그 보상을 고스란히, 누르고 흔들어서 받는다. 우리는 사람이나 피조물이 아니라 한 분이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 주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 거처럼 제 주위에 가장 작은 이들은 늘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섬김 봉사 헌신이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보이지 않는 보상을 더 바라고 섬기는 기쁨을 깨닫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