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5일 나해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복음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눈치 보지 않으면 외톨이가 되고, 눈치 보면 위선자가 된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위선이란 본래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려는 행동을 말합니다. 위선은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의식하고 살면 위선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변형시키고,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휴식’이 되기에 다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좋을까요? 그 사람은 ‘외톨이’가 됩니다. 그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이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사람을 대해보십시오. 일주일도 안 돼서 혼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저도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거슬리는 말 한 번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대부분의 우정은 그 한순간에 끝난 것을 압니다.
미국 드라마 ‘더 라스트 맨 온 어스’(2015)는 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한 후 남겨진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년 동안 홀로 버텼으나 외로움에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납니다.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던 예쁜 여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둘은 결혼합니다. 그 며칠 후 이상형의 여자를 만납니다. 주인공은 결혼했으면서도 위선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좋아할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자 주인공은 실망합니다. 그런데 또 예쁜 여자 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멋진 남성도 나타납니다. 남자는 위선을 떨지 않기 위해 이혼을 신청하고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립니다. 여자들은 이 남자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있고 결혼까지 했음을 알고는 주인공을 밀쳐냅니다. 그러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이 드라마는 그냥 외로움과 위선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의 굴레를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눈치 보지 않으면 혼자가 되고 의식하면 위선자가 되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사람을 의식하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 됩니다. 이것이 양심이든 주님의 존재이든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 대한 눈치 때문에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천국의 공동체를 닮아갑니다.
영화 ‘싱크홀’(2021)은 동원이 10년 넘게 걸려 마련한 자기 집이 500m가 넘는 싱크홀로 인해 내려앉으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동원이 이사 올 때부터 항상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만수입니다. 만수는 아들 하나 잘 키우기 위해 조금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 외톨이 아빠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삿짐 차가 와도 차도 안 빼주고 되려 늦게 나와서는 주말에 왜 이사를 하느냐며 짜증을 냅니다. 주위 시선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는 외톨이형 인간입니다.
동원은 사람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회사 동료들에게 성공한 직장인처럼 보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들이를 할 때 돈 8만 원이 아까워서 만수가 제안하는 대리운전을 거부하고 직원 김대리와 은주를 자신의 집에서 재웁니다.
은주는 신입 인턴사원으로 시키면 뭐든지 하는 김대리를 짝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김대리가 다른 사원을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사람 눈치보지 않고 필요할 때는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도와줍니다. 도와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도와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기 마음이 아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은주의 조건 없는 희생 때문인지 만수도 조금씩 이웃을 위해 희생하게 되고 동원도 남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기 집 안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가차 없이 집어던집니다. 김대리도 은주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의 희생으로 결국엔 탈출하게 되고 전에 없이 끈끈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겐가 ‘속하기를 원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기를 원합니다. 자녀는 또한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어떤 친구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공동체성’이라 합니다.
다만 관계를 맺을 때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 사랑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랑하면 이기적인 나뿐인 놈이 되고 타인을 위해 사랑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혼자 있을 때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눈치 좀 그만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항상 내 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위선의 관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눈치를 보며 살면 됩니다.
출처: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