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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오늘의 역사
[2004] 미국 전설적 소방수 레드 어데어 사망
지난 1990년 퇴각하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의 유전을 파괴하며 일어난 화재를 성공적으로 진압해 명성을 얻은 세계 최고의 소방관 폴 어데어가 향년 89세로 숨졌다.
어데어는 고향 텍사스주 휴스턴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어데어는 지난 1990년 쿠웨이트의 유전지대에서 발생한 유전화재 117건을 다이너마이트로 맞불을 놓는 식으로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962년 알제리의 사하라사막지대 천연가스전에 일어난 화재진압시 활약한 어데어는 1988년 북해의 해저유전인 알파파이프라인이 폭발해 167명의 기술자들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나자 즉시 현장에 달려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솜씨를 보였다.
유전화재진압 전문회사인 ‘레드 어데어’사의 회장이기도 한 어데어는 불처럼 빨간 머리를 뒤로 묶고 화재현장으로 달려가는 전문가였다. 걸프전 당시에는 이미 나이가 76세였지만 “다이너마이트를 빨리 보내면 그만큼 저 악마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빨리 잡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어데어는 지난 1994년 은퇴해 텍사스주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서 여생을 즐겼다./노컷뉴스
[1999] 국내 첫 ‘냉동난자수정’ 아기 탄생
← 냉동된 정자가 담긴 시험관을 꺼내고 있다.
국내 최초로 난자를 젤 상태에서 급속 냉동, 보관하는 ‘유리화 난자동결법’을 이용한 아기가 처음으로 태어났다. 포천중문의대 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윤태기, 정형민 교수팀이 자체 개발한 유리화 난자동결법을 이용해 임신에 성공한 정모씨(30)가 1999년 8월 7일 오전 2.9㎏의 건강한 남자아기를 출산했다.
냉동난자를 이용한 아기 탄생은 국내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최초로 난자를 젤상태에서 초급속 동결, 세포 손상을 최소로 줄여 보존하는 기술로 기존 수정란동결법의 임신성공률을 높인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기존 시험관아기 시술에서 사용되던 수정란동결법이 윤리적-도덕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을 뿐아니라 조기폐경이나 난소암, 백혈병 등 치료과정에서 난소기능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여성의 난자를 미리 채취, 보존이 가능해져 이같은 여성에게도 임신이 가능하게 됐다./뉴스한국
[1998] 케냐-탄자니아 수도에서 미 대사관 겨냥한 폭탄테러 발생 70여명 사망, 1천여명 부상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 안팎에서 연쇄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중심가에 있는 미국대사관 부근에서 폭탄이 터졌다. 이어 5분 뒤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는 미 대사관 내 주차장에서 차량에 설치돼 있던 폭탄이 터져 대사관 건물 3분의 2가 붕괴됐다.
두 건의 폭탄테러로 2백20여 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부상했다.
1983년 10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미군 기지에서 자살폭탄테러로 미군 2백41명이 사망한 이래 미 대사관이 겪은 최악의 테러다.
아랍 과격 무장단체 ‘지하드’가 이번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1993년] 잠수함 최무선호 진수
1993년 오늘. 최무선의 19대 증손 최윤옥 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남 옥포 대우조선소에서 해군의 세 번째 잠수함 최무선함 진수식이 열렸다. 최무선함은 장보고함·이천함과 같은 독일 209형 잠수함으로 우리 기술진이 건조한 두 번째 잠수함. 1100톤급으로 533㎜ 어뢰발사관 8문(어뢰 14발)과 기뢰를 장착하고 있다. 33명의 승무원이 탑승할 수 있으며 ISUS 83 통합정보 전투시스템을 갖췄다. 북한이 보유한 위스키·로미오급 잠수함보다 성능이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방일보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개막
← 대전세계박람회, 우주아기요정을 형상화한 대전세계박람회 공식 마스코트 ‘꿈돌이’
1993년 8월 7일 대전세계박람회가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내 도룡지구에서 열렸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최초로 개최되었으며,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기구가 참가한 가운데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졌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 '자원의 효율적인 이용과 재활용'이었다. 27만 3,000평의 부지 위에 건설된 박람회장은 크게 국제전시구역과 과학공원구역으로 나뉘어 활용되었다. 국제전시구역은 주제의 마당, 세계인의 마당, 문화창조의 마당, 산업번영의 현장 등 4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졌으며, 과학공원구역은 인간과 통신의 세계, 탐험의 세계, 미래의 기술세계, 환경과 자원의 세계 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주제의 마당과 과학공원구역은 박람회가 끝난 뒤에도 보존되어 과학기술교육의 장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공식 마스코트는 우주아기요정을 형상화한 '꿈돌이'였다. 한국의 발전상을 되돌아보고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에서 열린 대전세계박람회는 특히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세계박람회는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총 93일 동안 열렸다./브리태니커
[1991년]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 개막(강원도 고성), 129개국 2만여명 참가
←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을 경축하는 휘장기가 대회장 입구에서 펄럭이고 있다.
1991년 8월 7일 세계 129개국, 1만9천62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가 설악산 일대의 수려한 경관을 무대로 한 강원도 고성군 신평벌 2백50만평의 야영지에서 성화를 밝혔다. 청소년들의 올림픽이라고 불리우는 이 대회가 1991년 8월 7일 아시아에서 3번째로 "세계는 하나"라는 주제로 8박 9일동안 펼쳐졌다. 특히 이번 행사에 소련 체르노빌원전 피해지역 청소년들을 비롯해 소련 유고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참가해 국제간 화합의 장이 되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가 이념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이라면 이번 세계잼버리대회는 모두에게 내일을 함께 살아갈 울타리를 마련해 준 연대의식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할 수 있다.
[1984년] 안병근, LA 올림픽 유도서 금메달 획득
← 안병근 / 베이징 올림픽 유도 국가대표감독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소련과 동유럽국가들이 신변상의 위협 등을 이유로 불참한 가운데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렸다. 4년전의 모스크바대회에 불참한 서방국가들에 대해 이 대회에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동유럽권 국가들이 보복을 한 것이다.
전 세계 140개국에서 7800여명 선수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21개종목에 걸쳐 284명이란 올림픽 참가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6 은메달 7개를 따냄으로써 참가국 중 종합성적 10위를 기록했다.
한국이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이후 76년 몬트리올 올림픽대회까지 8차례의 올림픽에서 거둔 한국팀의 성적은 금메달 1 은메달 6 동메달 11개 등 모두 18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LA대회에서 한국선수단이 거둔 성적은 과거 28년간 한국팀이 획득한 메달수보다도 많게 나타남으로써 세계만방에 우리 국민의 우수성과 무한한 한민족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떨쳤다.
당초 메달획득 가능종목이었던 투지종목의 유도 레슬링 복싱에서 5개, 양궁에서 1개의 금메달을 딴 것은 메달 박스로서의 앞날에 가능성을 내다보게 했다. 8명의 선수가 참가한 유도는 금2, 은2, 동1로 5명의 선수가 입상함으로써 체급종목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 특히 라이트급의 안병근과 하프헤비급의 하형주는 유도종주국인 일본세를 물리치고 우승을 했다.
과거 일본의 독무대였던 이 종목에서 일본 4체급, 한국 2체급,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각각 1체급으로 금메달이 분산됨으로써 일본에 대한 패배의식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19세의 나이에 국제대회경험도 적은 선수인 김재엽선수는 은메달을 따냄으로써 다음 서울대회에 밝은 전망을 갖게 해 주었다.
[1983년] 중국 미그21기 귀순
← 중공제 미그 21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중공공군시험비행단소속 손천근씨(46).
1983년 8월 7일, 한가롭던 일요일 오후 3시 19분, 갑자기 "앵~"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기 지역에 경계경보가 내렸다. 인천ㆍ서울 지역으로 확대된 경계경보는 곧 공습경보로 바뀌었고 17분이 지나 해제됐다.
이날의 소동은 중국 공군의 한 조종사가 중국 다롄 상공에서 미그21기를 개량한 섬(殲)7 전투기로 훈련을 하던 중 편대를 이탈해 마하 2.1의 속도로 우리 영공으로 다가온데 따른 것이었다.
공습경보는 휴전 이후 30년 만에 처음 발령된 것이었고, 미그21기 귀순 역시 처음이었다. 미그 21기가 출현하자 초계중이던 우리 공군기가 즉각 출동, 무사히 유도ㆍ착륙시켜 대공망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중국은 조종사와 기체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우리 정부는 조종사의 뜻을 존중, 24일 조종사만 대만으로 보냈다.
[1964년] 통킹 만 결의안 미국 의회 통과
← 존슨
1964년 8월 7일 통킹 만 결의안이 미국의 상·하 양원에서 통과되었다. 1964년 8월 2~4일 통킹 만에 있던 미국 제7함대 소속 구축함 매덕스호와 C. 터너조이호가 아무 이유 없이 북베트남군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8월 5일 의회에 통킹 만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에는 미국군에 대한 무장공격을 물리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막기 위해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취하는 모든 조치를 승인하고 지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사실상 대통령에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해주는 것이었다. 결의안은 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상원에서는 찬성 88명, 반대 2명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특히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정책과 작전들이 노출되자,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대통령에게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한 근거가 이 결의안에 있음이 드러나면서 상원으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었다./브리태니커
[1960년] 코트디브아르, 프랑스로부터 독립
서부 아프리카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정식명칭은 코트디부아르 공화국(Republic of Cote d’Ivoire)이라고 하며, 영어권에서는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라고 부른다. 수도는 아비장이고 공용어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말리, 동쪽은 부르키나파소·가나, 서쪽은 기니·라이베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남쪽은 기니만에 면한다. 1946년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연합을 구성하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한 식민지가 되었고, 1947년 북부의 옛 오트볼타를 분리, 1957년에는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이듬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해체되어 프랑스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아프리카인(人) 커피생산자 대표인 우푸에 브아니(Houphouet-Boigny)는 ‘아프리카민주연합(RDA) ’을 결성하여 프랑스의회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1960년 8월에 프랑스공동체에서도 이탈하면서 완전독립을 실현하였고 대통령에 취임한 우푸에 브아니는 30년 이상 집권하였다.
[1944년] 최초의 전기기계식 계산기 ‘마크I’, 하버드 대학서 처음 가동
← Portion of the Harvard-IBM Mark 1, left side.
오늘날 컴퓨터에서 프로그래밍(programming)에 해당하는 일련의 명령을 해독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산을 실행하는 기계를 19세기 초에 영국의 수학자 C.배비지가 계획하였다. 그 시작기(試作機) 중에서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과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이라는 것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배비지의 계산기는 모두 기계부품을 이용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그 착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자동적으로 계산을 실행하는 최초의 기계는 하버드대학의 H.H.에이컨이 지도하여 만든 릴레이(relay) 계산기 MARK-1으로 1944년에 완성되었다. 전자식(電子式) 계산기, 즉 진공관(眞空管)을 사용한 계산기로 최초로 성공한 것은 1945년경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J.W.모클레이와 J.P.에커트에 의하여 만들어진 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이다. ENIAC은 1만 9000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규모가 큰 기계로서, 배선반(配線盤)으로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부족하였다.
[1942년] 미군, 과달카날 섬에 상륙
제2차 세계대전 중 1942년 8월에서 1943년 2월까지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에 있는 과달카날섬에서 ‘과달카날의 싸움’으로 부르는 격전이 벌어졌고, 부근 해역에서는 ‘과달카날해전(솔로몬해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이 패배함으로써 일본이 패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과달카날 작전
태평양전쟁에서 미·일 최대의 육해전력이 투입된 작전. 전쟁 초기의 일본군 공세가 이 작전결과 수세에 몰렸다. 1942년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본토에서 5000㎞ 떨어진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의 남단 과달카날섬에 일본 해군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락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활주로를 만들었다. 미군은 라바울을 탈환하기 위해 해병 1개 사단을 기습상륙시켜 비행장을 탈취하였다. 일본군은 비행장의 탈환을 도모하였으나 주력전투기가 섬 상공에서 15분밖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공권은 계속 미군의 수중에 있어 미군의 방어전선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비행장도 탈환하지 못하고, 고립되는 불리한 전황이 되었다. 일본군은 상륙한 총병력 약 3만 6000명 가운데 아사자를 포함하여 약 2만 4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다.
[1932년]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아베베(Abebe, Bikila) 출생
← 1960년 로마올림픽 때 선두에 달리고 있는 비킬라 아베베
1932. 8. 7 ~ 1973. 10. 25
에티오피아의 모우트(Mout)에서 태어났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모시는 친위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한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뛰며 마라톤에서 2시간 15분 16.2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에티오피아에서 영웅이 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6주 전에는 충수(맹장) 제거 수술을 받아 훈련을 단축시켜야 했으나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마라톤에 참가, 다시 2시간 12분 11.2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했다. 도쿄 올림픽대회의 영예로 2계급 특진하여 중위(中尉)가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세 번째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도 출전하였는데 높은 고도와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17km 부근에서 기권하였다. 그때 나이 36살이었다. 이듬 해(1969년)에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통까지 겪었다. 비킬라 아베베는 멈추지 않고 장애의 몸으로 1969년에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까지 출전하였다. 남자 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73년 사고에 따른 합병증(뇌출혈)으로 아디스아바바에서 41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1941년] 인도의 시인 타고르 사망
← 타고르
1861. 5. 7 인도 캘커타 ~ 1941. 8. 7 캘커타.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그의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90년에는 그의 성숙된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나시 Mānasῑ〉라는 시모음집을 펴냈는데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를 비롯해서 벵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시형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또한 그가 지은 최초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영역되었지만, 영역본들은 벵골어 원작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 외에 주목할 만한 소설도 여러 편 썼는데, 〈고라 Gorā〉(1907~10, 영역 1924)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타고르는 1901년 볼푸르 근처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우고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즈음하여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림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펴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1933년] 한국 첫 여류비행사 박경원, 비행 중 추락사
←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였던 박경원씨.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이 1933년 8월 7일 자신의 애기(愛機)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을 향하다 일본의 하코네 산정에서 추락, 사망했다. 그녀의 이번 비행은 일본 나고야 신문사의 일본-만주 연락비행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녀가 조종한 비행기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불하받은 ‘살무손 2A 2기’로, 비행기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은 청연호였다. 박경원은 이날 상오 10시35분쯤 애기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동경-서울-만주-신경에 이르는 장장 2천km의 비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륙 50분 만에 일기불순으로 하코네에 추락, 32세의 짧은 일생을 마감했다.
박경원은 1901년 6월 대구에서 태어나 17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여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다치가와 항공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비행연습 11시간 만에 단독비행을 할 정도로 우수한 기량과 성적을 보였다. 박경원이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였다. 이어 1928년에는 동경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된 비행경연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해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고 이어 2등 비행사시험에 합격했다.
[1905년] 제1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개최(프랑스, 8.7~12)
1904년 소규모 국제대회를 준비하여, 1905년 8월, 프랑스 블로뉴에서 최초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33개국의 688명이 참가하였다. 그 대회에서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운동의 지도자로써 지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자멘호프 자신이 유대인이므로, 반유대주의의 편견이 언어 발전을 방해하는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에스페란토운동의 기본이 된 블로뉴 선언을 제안하였으며, 대회참여자들이 이것을 채택하였다.
1905년 프랑스 블로뉴에서 개최된 제1차 에스페란토 세계 대회에서, 에스페란토 기초의 변경을 제한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은 언어의 기초를 자멘호프가 출판한 '에스페란토 기초(Fundamento de Esperanto)'에서 변경해서는 안되며, 어떤 사람에게도 기초를 변경할 권리는 없다고 하였다. 이 선언은 언어의 사용자가 새로운 생각을 발표하여도 좋다고는 하지만, 언어 자체는 본래의 형태를 장려하고 있다.
[1903생] 케냐의 고고학자·인류학자 리키(Leakey, Louis Seymour Bazett) 출생
1903. 8. 7 케냐 카베테 ~ 1972. 10. 1 런던.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을 통해 인류는 이제까지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이전에 발견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암시한 것처럼 아시아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대한 논쟁적인 해석으로도 유명하다. 영국의 선교사를 부모로 둔 그는 케냐의 키쿠유족과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후에 그들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마치고 1924년 동아프리카에서 고고학 연구를 시작했다. 나중에 역시 고고학자인 부인 메리 더글러스 리키(결혼 전 성은 Nicol)와 자녀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과 미국의 주요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1945~61년까지 나이로비의 코린돈 기념박물관 관장을 맡았다.
1931년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발굴장소가 된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물화석과 가공하지 않은 돌 연장 등이 나왔으나 1959년 메리 리키가 진잔트로푸스(지금은 대체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형태로 간주됨)라고 이름지어진 사람 화석을 발견했다. 이것은 17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리키는 진잔트로푸스 곧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존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는 이론을 폈다. 1960~63년 올두바이 협곡에서 그의 조사반이 발견한 다른 화석에서 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새로 발견한 화석에 호모 하빌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는 동아프리카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호모 사피엔스에 직접 연결되는 좀더 진화된 인류를 대표한다. 처음에 많은 학자들은 발굴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그 화석의 해석과 분류에 관한 리키의 이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호모 하빌리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다른 종류로 분류될 만큼 차이점이 많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뒤 리키 부부와 다른 사람들의 발굴성과에 따라 호모 하빌리스가 멸종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와 현존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의 진화과정에서 연결고리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밖에도 리키 조사반이 발굴한 중요한 화석 가운데 1948년 빅토리아 호의 루싱가 섬에서 발견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약 2,500만 년 전에 살았던 인간과 원숭이 양쪽 모두의 조상인 프로콘술 아프리카누스 화석이다. 1962년에는 빅토리아 호 동쪽 포트테르난에서 리키 조사반이 약 1,400만 년 전에 살았던 원숭이와 초기 인류 사이의 또다른 연결고리인 케냐피테쿠스의 화석을 발견했다. 그의 발견은 인류의 최초 기원에 대한 후속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또 제인 굳올과 다이앤 포시가 각각 침팬지와 고릴라에 대해 자연서식지에서 행한 장기간의 선구적인 연구에도 리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서로는 〈아담의 선조 Adam's Ancestors〉(1934, 재판 1953)·〈석기시대의 아프리카 Stone-Age Africa〉(1936)·〈흰 아프리카인 White African〉(1937)·〈올두바이 협곡 Olduvai Gorge〉(1952)·〈마우마우단과 키쿠유족 Mau Mau and the Kikuyu〉(1952)·〈올두바이 협곡, 1951~61〉(1965)·〈밝혀진 인류의 기원 Unveiling Man's Origins〉(1969, 반 굿올 공저)·〈동아프리카의 동물 Animals of East Africa〉(1969)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76년]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무희 마타하리 출생
본명은 Margaretha Geertruida Macleod. 결혼 전 성은 Zelle.
1876. 8. 7 네덜란드 레바르덴 ~ 1917. 10. 15 프랑스 파리 근처 뱅센.
그녀의 이름은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녀가 벌인 첩보활동의 성격과 범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중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프랑스에서 총살당했다.
부유한 모자 상인의 딸로 태어나 레이덴교육대학을 다녔다. 1895년 스코틀랜드 출신 장교인 네덜란드 식민지군 소속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와 결혼했고 1897~1902년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살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후 이혼한 그녀는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의 직업 무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꿨다. 이 말은 '태양'(글자 그대로는 '낮의 눈동자')을 뜻하는 말레이어이다. 훤칠하고 아주 매력적이며 동인도의 춤을 어느 정도 출 줄 알았고, 대중 앞에서도 기꺼이 나체 출연을 했던 그녀는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평생 동안 많은 애인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장교였다.
첩보활동에 관한 사실들은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한 자료에서는 그녀가 헤이그에 살고 있던 1916년 봄, 한 독일 영사가 찾아와 다음 프랑스 여행에서 그녀가 어떤 정보라도 얻어오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그녀는 몇몇 낡은 정보를 독일군 정보장교에게 제공했다는 것만 인정했다. 그녀는 그전에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 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고, 아울러 프랑스 정보부에 독일과 접촉했던 사실도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나중에는 연합군을 위해 독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며 영국 컴벌랜드 공작작위의 상속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을 얻을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헤이그에서 마타 하리와 독일군 장교가 접촉한 사실을 알린 것은 영국 쪽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이중첩자일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자 프랑스에서는 1917년 2월 13일 파리에서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수감되어 1917년 7월 24~25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다./브리태니커
[1861년] 한말의 의병장 이소응(李昭應) 출생
1861. 8. 7 강원 춘천 ~ 1928. 3. 25.
본관은 전주. 일명 의신(宜愼). 호는 습재(習齋). 1895년 을미사변 및 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춘천부에서는 1896년 1월초부터 홍시영(洪時永)·이면수(李勉洙)·민영문(閔泳文)·이수춘(李守春) 등이 창의를 촉구했다. 1월 20일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의 지방유생들과 1,000여 명의 농민들이 춘천부에 집결하여,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 의진(義陣)을 일으켰다. 그는 곧 창의토벌을 촉구하는 격문을 전국에 보내고, 위정척사의 대의(大義)하에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그리고 개화정책을 수행하는 관리들도 동일한 범주로 규정했다. 정부에서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로 개화파 관료 조인승(趙寅承)을 파견하자, 단발(斷髮)을 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여 참형에 처했다. 이어 서울진격을 계획, 가평 쪽으로 진격해갔으나 가평 벌업산에서 관군과 대치하여 교전하던 중, 비가 내려 화승총을 쓰지 못한 채 패전하고 춘천으로 퇴각했다. 그후 그는 포군(砲軍)을 모집하러 지평으로 갔다가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의 협조를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제천 유인석(柳麟錫) 진영으로 갔다. 그뒤 유인석을 따라 만주로 망명했다.
한편 춘천 의진은 그의 종형제인 이진응(李晉應)·이경응(李景應)이 맡았으나, 이진응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전사하자, 이경응은 강릉으로 가서 민용호(閔龍鎬) 진영에 합류했다. 춘천의 의병운동과 유인석 의진의 활동상황을 기록한 〈습재연보〉·〈습재선생문집〉 등이 남아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34년] '자카르 직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발명가 자카르(Jacquard, Joseph Marie, 1752. 7. 7 ~ 1834) 사망
직물산업의 기술혁명에 공헌했으며 현대 자동직조기의 기초가 된 자카르 직기를 발명했다.
리옹 출생. 제본(製本)·활자주조소의 도제(徒弟)로 일하다가, 정교한 무늬를 짜내는 문직기(紋織機) 개량에 뜻을 두게 되었다. 1790년 직조기 개발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연구를 잠시 중단하고 혁명군 편에 서서 리옹의 방어전투에 참가했다. 1801년 개량형 드로룸(drawloom)을 선보여 동메달을 받았다. 그후 연구를 계속하여 1805년에는 직조기를 자카르 직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부품을 개발했다. 1806년 그의 발명은 칙령(勅令)으로 국가에서 매수하였으며, 그는 연금과 각 기계에 대한 특허권 사용료를 받았다. 비단직공들 사이에서는 이 기계의 도입으로 직업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에 대한 많은 적대감이 생겼으며, 리옹의 직공들은 생산중인 기계를 불태우고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직기는 생산증대를 가져와 1812년까지 프랑스에서 1만 1,000대가 사용되었다. 1819년 금메달과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20년대에 잉글랜드로 확산되어 결국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서는 그가 발명한 기계를 대구지방을 위시하여 여러 직물공장에서 현재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1598년] 스웨덴의 시인·학자 시에른힐름(Stiernhielm, Georg) 출생
본명은 Jöran Olofsson. Georgius Olai, Göran Lilia라고도 함.
1598. 8. 7 스웨덴 비카 ~ 1672. 4. 22 스톡홀름.
흔히 '스웨덴 시의 아버지'라고 한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웁살라에서 공부한 후 그라이프스발트·비텐베르크·헬름슈테트 등의 독일 대학에서 몇 년을 지냈다. 1626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곧 도르파트에서 법관이 되었으며, 1631년에는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1640년경부터 집은 에스토니아에 있었으나 크리스티나 여왕의 수행시인으로 종종 스톡홀름에 머물렀으며, 1656년 러시아 침공을 피해 에스토니아를 떠난 후에는 계속 스톡홀름에 체류했다. 1661년에 병무고문에 임명되었고, 1667년에 고미술협회 의장이 되었다.
스웨덴어로 된 첫 시작품들은 1640년대에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도입된 3편의 궁중가면극과 왕비를 찬양하는 운문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1647년경에 쓴 우의적이고 교훈적인 서사시 〈헤라클레스 Hercules〉(1658)로 후기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이 미덕과 명예에 대한 설교문에는 인본주의 정신이 배어 있으며, 힘차고 독창적으로 전개되는 주제, 풍부한 심상, 흠잡을 데 없는 구조로 인해 스웨덴 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Musae Suethizantes〉(1668)에 모여 있다. 시에른힐름의 학문적 업적은 백과사전적이다. 미발표작이 많으나 방대한 양의 글을 썼고 주로 언어학적·역사적·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진지한 애국자였던 그는 스웨덴어가 인간의 독창적인 언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를 폐기하고 민중 방언과 사어가 된 스웨덴어로부터 낱말을 취해 어휘량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자연철학에 관한 단편(斷片)에서는 파라켈수스, 로베르트 플루트, 코메니우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플라톤풍 신비주의 전통에 바탕을 둔 우주생성론을 자세히 설명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5 제1회 울산 태화강 수영대회
2005 제1회 서울 로봇 축제(국립서울과학관)
2003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 경기도 포천 종합사격훈련장 난입해 반미시위하다 연행
2002 콜롬비아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폭탄테러. 17명 사망
1999 유창혁 9단, 후지쓰배세계바둑대회에 우승
1999 미국 워싱턴시, 빈발하는 총기사건으로 청소년 야간통행금지 부활
1993 정치인 김도연 사망
1987 김정렬 제19대 국무총리 취임
1982 이탈리아 내각 총사퇴로 연정붕괴
1981 강정렬,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
1981 조자양 중국수상 필리핀 방문
1966 김해서 공군, 해병장교간 편싸움
1960 카스트로, 쿠바내 미국재산 몰수
1957 정부, 튀니지 공화국 승인
1953 평양방송, 남로당계 박헌영 등 12인 숙청을 발표(7인 사형)
1952 정부, 문화보호법 공포
1951 미국, 독일의 V2 로케트를 모델로 한 ‘바이킹로케트’로 고도 2만m 도달
1950 해리먼 미국대통령 특사 내한
1948 정부기구를 11부4처66국으로 결정
1936 스페인, 부재지주 토지수용, 소작인에 분배 결정
1928 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1927 박경원 여류비행사 최초로 면허증 획득
1926 이탈리아-스페인, 마드리드조약 조인
1919 김좌진 등, 정의단을 군 정부로 개편, 9월에 북로군정서로 개칭
1906 조선, 만국적십자조약에 가맹
1905 한일은행 설립
1903 호놀롤루에서 최초의 교포정치단체인 신민회 발족
1782 독일 화학자 마르그라프 사망
673 김유신 사망
첫댓글 그 유명하던 내가 다 '맡아하리'(?)가 백 몇십년전 오늘 태어났군요.... 덥은디 엄마 고생 혀셨네...ㅎㅎ
동방의 등불--아마도 타고르는 도인이었을 것임,아니면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을 우찌 알았거씀? ㅎㅎ ^^.
[1999] 국내 첫 ‘냉동난자수정’ 아기 탄생<<<<-----조으다조으다...새생명을 바라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노^*^/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기가 15살 되었겠네요. *^^*
대전 엑스포 개최가 인상적이네요!
1993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