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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석동호회 단톡방에서]
[장영봉대표님제공]
♡한 층 더 내려 가시고 한 계단 더 내려 서십시요♡
가난한 구두닦이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소원은 오로지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구두를 닦으며
거드럼을 피우는 자들에게 한 번 뽑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틈틈히 로또 복권을 샀습니다.
몇년 동안을 꾸준하게 복권에 투자를 하였지만 언제나 꽝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나던 중에 어느날 자기의 눈을 의심이 들 정도로 로또복권 1등에 당첨이 된 것입니다.
뛸듯이 기뻤습니다.
이제는 부자입니다.
구두닦이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한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야, 부자놈들아~
나에게 와서 구두닦으며
거드름 피우던 인간들아~
이제 까불지마라.
나도 이제 부자다.
나도 부자가 됐다고~오~"
하여튼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질러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리쳤습니다
"야~ 이제는 구두닦이는 안녕이다."
그렇게 크게 외치면서 구두통을 멀리 한강물속에 힘껏 던져버렸습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겠습니까?
얼마나 유쾌통쾌한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당첨금을 찿기위해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당첨된 복권을 꺼내기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복권은 없었습니다.
한참 모든 주머니를 뒤지다가 없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앗차~ 어이할꼬~??
아까 한강물에 던져버린 구두통 속에 복권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흥분한 상태에서 복권과 함께 구두통을 넘실거리는 한강 물속에 던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소용이겠습니까?
가슴을 친들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부자는 한 순간 꿈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부자가 되었다고 만세를 부르던 그 한 순간이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조금만 차분하게,
조금만 겸손하게,
조금만 낮은 자세로 살았더라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나는 몇개월전에 서울의 큰 종합병원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지하 주차장을 몇 바퀴 돌았지만
주차할 곳이 없었습니다.
주차장을 빙빙돌다가 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한 층을 더 내려갔더니 빈 자리가 많았습니다.
내려오면 자리가 있는데 위에서 고생을 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인생도 그 알량한 인간의 자존심이
내려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뭔지,
지위가 뭔지,
학벌이 뭔지,
한 층만 더 내려가면 편안한데
그게 안되니 말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생긴 실화라고 합니다.
교회 출입문을 너무 오래 사용한지라 문짝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배 시간이 다가왔기에 목사님은
급히 목수에게 연락하였고,
그 목수는 재빨리 나서서 열심히 일하여 완벽하게 고쳐놨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감사해서 가죽지갑을 선물로 주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창립 기념예배 때 만든 것입니다.
약소하지만 감사의 뜻으로 드리니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목수는 화를 버럭 냈습니다.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까짓 지갑이나 받으려고 바쁜데도 달려와서 문짝을 고친 줄 압니까? 이래 뵈도 저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알아주는 고급 인력입니다."
목사님은 당황하며...
“그럼 어떻게 해드리면 좋을까요?“
목수는
"아무리 못해도 10만원은 주셔야죠. 그래도 교회 일이라 싸게 해드린 겁니다."
목사님은 당황하며
"네.. 그러세요.
그것 참 감사한 일이네요."
목사님은 선물로 주려던 그 지갑 안에 들어 있던 30만원 중 요구한 10만원 만 꺼내 건네 주었습니다.
주는대로 받았다면 고급 지갑과
30만 원까지 받았을텐데,
내가 누군데.. 시간당 얼마인데..
교만과 욕심과 자존심을 내세우다
돈은 돈대로 체면은 체면대로 깍이고 말았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기억하기 쉽도록 압축된 성서의 교훈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한 층 더 내려가시고
한 계단 더 내려서 서십시오.
그러면 한결 편안합니다.
오늘도 당신은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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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러한 일도 있었던가 싶습니다🌿
밑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보니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상팔자로 변해버린 거짓말 같은 인생 드라마.
역사 속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말이 사람 팔자 모르는 것이다.
사람 괄시(恝視) 하지 말라는 말이 이럴 때 해당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세상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변하지 않은 세상은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은 본성이 한사코 변화를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사를 비롯해서 정치.경제.사회 모든 부문에 있어 고정불변의 법칙은 없는 것이고 또다시 뒤바꾸어 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순리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은혜와 보은(報恩)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입니다]🙏
조선 영조 때 서울 정동에 고려말 충신 이색의 14대손 이사관(李思觀,1705~1776)이 살고 있었다.
승정원 동부승지 벼슬을 하다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급한 볼일이 생겨 고향인 충청도 한산으로 가게 되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예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유난히 기온이 떨어져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눈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던 이사관이 어느 산모퉁이에 돌다보니 다 헤진 갓에 입성마저 추레한 한 선비가 쩔쩔매며 서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듯한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사관이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사관이
“뉘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오?”라고 물으니
추레한 선비가 안절부절하며
“아내가 해산일이 가까워 처가에 데리고 가려고 나섰는데 그만 여기서 몸을 풀었지 뭡니까.
이런 날씨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고 이 험한 날씨에 산모와 어린 것이 생명을 부지할지 모르겠구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한다.
이사관은“아이구! 저런! 큰일이구려!”라고 한 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양털 가죽옷을 벗어 아기와 산모에게 덮어주고 선비를 재촉하며 마을을 찾아 나섰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급한데로 방 한칸을 빌리고 집주인에게 두둑히 돈을 주고 산모의 방에 군불을 뜨겁게 지피도록하고 미역국을 끓여 산모의 허기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며 이사관의 손을 잡고
“노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내와 어린 것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남의 곤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아무쪼록 가시는데 까지 무사히 가시구료.”
이사관이 길을 떠나려 하자 한사코 이름을 묻는다.
“정동에 사는 이사관 이라고 하오.”
이후 이사관은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가난한 선비는 가슴속 깊이 이사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난한 선비는 몰락한 양반가 자손 충청도 면천의 생원 김한구(金漢耉, 1723~1769)였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한구는 여전히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에 견디다 못해 먼 친척 아저씨뻘되는 당시의 세도 재상인 김흥경에게 의지하려 길을 나섰다.
김흥경은 친척 조카뻘 되는 김한구를 딱하게 여겨 이따금 쌀가마니 정도를 도와주곤해서 겨우 연명하며 서울 생활을 견딜수 있었고 가끔 아저씨 사랑방을 찾아가 놀다 오곤 했다.
마침 김흥경의 생일날 이집의 사랑방에는 찾아온 축하객들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대부분 높은 벼슬아치거나 신분이 쟁쟁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속에 김한구도 한쪽 구석에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관상을 잘보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한 문객도 섞여 있었는데 문득 주인대감 김흥경이 심심파적으로
“여보게 음식이 들어올 때까지 여기 계신 대감들의 신수나 보아 드리게.”라고 했다.
문객이 이사람 저사람 관상을 보아주었을 때 김흥경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저기 윗목에 앉아있는 김생원은 내 조카뻘되는 사람인데 언제쯤이나 사는 형편이 나아질지 보아 주게나.”
그 말을 들은 문객은 김한구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큰절을 하고 말했다.
“생원님의 고생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좋은일이 시작되어 불과 10여일 안으로 대단한 벼슬 운이 트일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사람 팔자는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가난의 때가 쪼르르 흐르는 보잘 것 없는 궁짜 낀 선비가 열흘 안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나라에서 과거를 보는 시기도 아니며 설사 과거에 갑자기 급제한다해도 미관말직에서 벼슬이 시작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문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은 모두들 웃으시지만 며칠만 두고 보십시오.여러 대감님들도 생원님께 절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실 겁니다.”
나중에 문객이 한 이 말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가벼운 농담 정도로 생각하던 대신들이 웃음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주인대감 김흥경이 다른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마침 잔칫상이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겨우 수습되었지만
당사자인 김한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음식도 못 얻어먹고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망쳐질 뻔했기 때문이다.
“에이 참! 오늘 재수가 없으려니 그 점쟁이가 미쳤나? 왜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나?
오랜만에 주린 뱃속에 고기구경좀 시켜주려 했더니 그놈 때문에 다 그르치고 말았네!”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들어 열여섯 살인 딸이 왕비 간택의 대상으로 뽑혀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지난날 눈이 쏟아지던 길바닥에서 태어나 이사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그 아기였다.
아이가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했기에 은근히 부잣집에 시집보내 그 덕을 좀 보려는 욕심도 있던 김한구였다.
당시 영조는 이미 예순 다섯 이였으나 정정했고 늘그막에 중전인 정성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라의 법도상 국모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영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택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고 가난하지만 뼈대있는 가문이었던 김한구의 딸도 후보자 중 한명이 되었던 것이었다.
간택일이 되자 백여명의 후보 규수들이 대궐로 모였고 영조가 친히 접견하여 그 중 1명을 선택 하였다. 김한구의 딸의 미모에 혹한 영조가 그녀의 사주단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면천 태생인 김선비의 여식이라 애비는 김한구, 본관은 경주, 조상은 효종때 바른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김흥욱이란 말이지? 흠! 이만하면 문벌도 괜찮구나!”
결국 간택을 받게 되었다.
김한구는 문객의 예언대로 정일품 보국승록대부 오흥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신분이 하늘처럼 높아져 금위대장 병부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들과 아우까지 벼슬을 얻었다.
오두막살이에서 1백여 칸의 고래등 같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마저 끼니를 때우는게 어려운 생활에서 초호화판 생활로 갑자기 바뀌었다. 문객의 말이 제대로 맞은것이다.
김한구는 잊지 않고 딸에게 청을 넣어 은인인 이사관은 호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영조 48년(1772년)에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옛날 베푼 은혜가 큰복이 되어 돌아온 셈이요 김한구는 은인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게된 셈이었다.
이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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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종수(八十種樹)❤
박목월 선생의 수필,
'씨 뿌리기' 에 호주머니에 은행 열매나 호두를 넣고 다니며,
학교 빈터나 뒷산에 심는 노교수 이야기가 나온다.
이유를 묻자, 빈터에 은행나무가 우거지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언제 열매가 달리는 것을 보겠느냐고 웃자!
"누가 따면 어떤가?
다 사람들이 얻을 열매인데" 하고 대답했다.
여러 해 만에 그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 키만큼 자란 은행나무와 제법 훤칠하게 자란 호두나무를 보았다.
"예순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六十不種樹)"고 말한다.
심어봤자 그 열매나 재목은
못 보겠기에 하는 말이다.
송유(宋兪)가 70세 때,
고희연(古稀宴)을 했다.
귤(柑) 열매 선물을 받고,
그 씨를 거두어 심게 했다.
사람들이 속으로 웃었다.
그는 10년 뒤, 귤 열매를 먹고도 10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떴다.
황흠(黃欽)이 80세에 고향에 물러나 지낼 때, 종을 시켜 밤나무를 심게 했다.
이웃 사람이 웃었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황흠이 대답했다.
"심심해서 그런 걸세! 자손에게 남겨 준대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
10년 뒤에도 황흠은 건강했고,
그때 심은 밤나무에 밤송이가 달렸다.
이웃을 불러 말했다.
"자네 이 밤맛 좀 보게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날 위한 것이 되어 버렸군..."
홍언필(洪彦弼)의 아내가 평양에 세 번 갔다.
어려서 평양감사였던
아버지 송질(宋軼)을 따라갔고,
두 번째는 남편을 따라 갔으며,
세 번째는 아들 홍섬(洪暹)을 따라갔다.
아내로 처음 갔을 때
장난삼아 감영에 배를 심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그 열매를 따 먹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재목으로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세 이야기 모두 '송천필담 (松泉筆譚)'에 나온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예순만 넘으면 노인 행세를 하며, 공부도 놓고 일도 안 하며 그럭저럭 살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
100세 시대에 이런 조로(早老)는
좀 너무하지않은가?
씨를 뿌리면 나무는 자란다.
설사 내가 그 열매를 못 딴들 어떠랴!
[지금 시작하라! 나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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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