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조각전의 불상
지난 2월 27일, 아들녀석의 입학식이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방면의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 외에 중부내륙고속도로,청원~상주간 고속도로
가 개통되어 나름대로 학교까지 가는 빠른 길을 숙지하고 있던 터라, 입학식 당일 일찍 서두르면
그 자리에 충분히 참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수강신청을 처음 접하는 새내기
들에게 그 요령을 알려준다며 선배들이 마련한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입학식 전 날 상경하게
되었다.
선배들과의 약속장소에 아들을 데려다 주고 나니,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가 고민이다.
수강 안내설명이 예정대로 끝난다면 남는 시간은 네 시간이다.
남산 공원이 언듯 떠 올랐으나 이 나이에 아내와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촌티 내는 것도 그렇고,
극장을 찾아 다니며 잘 모르는 길을 헤메는 모양새도 그렇고해서 그나마 아는 곳을 다녀 보기로
했다.
눈에 익은 아는 길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니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기획특별전으로
통일신라 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다. 며칠 후 3월 1일에 전시회가 끝난다니 운좋게 때 맞추어 잘 온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도 마찬가지지만 작년의 건국 60주년에 이어 올해도 박물관 100주년 기념으로
전국의 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데, 특별전은 관람료를 징수하고 있다.
전시는 크게 6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다. 제1부부터 4부까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통일신라 조각
의 변화 양상을 조망할 수 있게 꾸며졌으며 제5부에서는 통일신라 조각의 또 다른 전통인 십이지
상과 무덤조각을, 제6부에서는 통일신라 예술의 정수가 집대성된 석굴암의 내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보였는데, 우연히 그들 옆에 서게 되었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을 전달하는 젊은 가이드의 몇 마디 알아 들을 수 있는 통역은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알리는 데는 부족함이 있어 보였다. 제 문화에 대한 올바른 식견이 없으니
본질을 조금 빗나가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한 설명을 열심히 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모든 것을 잘 알고 잘 할 수 있으리오마는, 나 역시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문외한이라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부족함을 알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것 못지않게, 부족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맞는 기준으로 잘 못 알고 아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진열된 전시품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보자면 박물관의 다른 유물들을 살필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잰 걸음으로 돌아 다닌다.....
그 중 인상에 남는 몇 가지만 정리하였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들머리에 있어 눈에 제일 먼저 띈 조각품이다.
설명문에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이라 되어 있어 처음엔 저게 무슨 말
인가 했는데, 돌에 계유(癸酉)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부처의 얼굴이 심하게 파손되어 그 형체를 알 수 없으나,국보 제106호인
이 유물은 충남 연기군의 비암사(碑岩寺)에서 출토된 높이 43cm인 불상
이다. 청주박물관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은 이러하다.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 (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佛碑像)
불비상(佛碑像)은 비석처럼 돌을 다듬어 앞면이나 4면에 부처를 조각하고 그 연유를
새겨 놓은 불상을 말한다. 이 석상은 청주와 인접한 연기군과 조치원 지역에서 발견
된 불비상 가운데 하나로, 이들은 조각솜씨가 같고 재질도 모두 납석(蠟石)이어서
흔히 '연기파 비상'으로 불린다.
앞면에는 나뭇잎 모양의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부처와 보살 그리고 여러 천인
(天人)을 새겼으며, 그 아랫면에는 머리를 맞댄 두 마리의 사자와 연꽃잎을 표현하여
장엄을 더하였다. 좌우 옆면에는 용머리 위로 솟은 나무줄기 위에 앉아 악기를 연주
하는 천인(奏樂天)을, 뒷면에는 화불(化佛, 부처의 화신)을 네 단에 걸쳐 배치하였다.
글씨는 정면 아랫부분과 옆면의 주악천 사이 그리고 뒷면의 화불 사이에 각각 새겨져
있다. 처음의 '계유년(癸酉年)'은 이 석상을 만든 해가 673년(문무왕 13년)임을 알려
주며, 석상의 이름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는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명문 중에는 신라의 관직 서열(官等)을 가진 사람과 백제의 성씨 관직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함께 등장하고 있어 통일신라 초기에 옛 백제의 사람들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에 이 지역의 유력자들이 신라의 지배구조로 편입되어 가면서도
당시 유행했던 아미타불 신앙을 바탕으로 함께 모여, 옛 백제의 전통을 이어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금제아미타불좌상(金製阿彌陀佛坐像), 국보 제79호
통일신라 706년에 제작된 높이 12.0cm의 이 불상은 황복사(皇福寺) 터로
알려진 경주 구황동 3층석탑에서 출토된 것이다.전시관에는 함께 출토된
국보 제80호 금제불입상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는 각각 12㎝와 14.4㎝에 불과하지만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순금제
불상으로 정교하고 섬세하며, 통일신라시대 초기 불상의 기준작이 되는
명품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7세기 말까지의 조각은
삼국시대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도,중국 등 외국 조각의 양식을
수용하여 소화해내는 등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다양성을 보인다.
전시유물은 전환기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라 한다.
금동판삼존불좌상(金銅板三尊佛坐像), 보물 제1475호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7세기 후반의 높이 27cm인 불상이다.
불상 몸체의 팽팽한 탄력감과 신체의 굴곡이 율동적인 옷주름과 어우러
져서 그 전까지 보지 못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불상제작에 쓰인 형틀
금형을 제작하여 만드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보물 제927호
통일신라 8세기에 제작된 높이 18.1cm인 불상이다.
높이 54.5cm 인 국보 제129호인 금동약사불입상과 함께 삼성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리상자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의 1층 몸돌 내에 납입되었던 금동사리함의
네 면이다. 도난 당한 후 수습되었기 때문에 네 면의 결합방식이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각 면은 삼존불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네 면의 주존은 각각 보관을 쓰고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 약함
을 든 약사불,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합장을 한 부처이지만 존명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높이54.5cm,국보 제129호, 삼성미술관소장
이 불상은 대좌가 없어졌으며, 보관(寶冠)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
왼쪽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된 것도 애석한 일이다.
이 보살입상(菩薩立像)은 현재 도금(鍍金)한 흔적이 약간 남아 있을 뿐
구리 바탕을 드러내고 있다.
보관(寶冠)이 없기 때문에 보발(寶髮)만 우뚝 드러나 있으며, 넓은 얼굴의
가늘게 뜬 두 눈과 코, 작은 입에 비하여 두 귀는 길고 귓부리가 가늘다.
목에는 3줄의 각선(刻線)이 보인다.
매우 세련되고 아름다운 기법이 돋보이며, 각부(各部)에는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졌는데, 풍만하고 우람한 얼굴에다가 몸집도 당당하다.
머리부분에 둥근 구멍 하나와 등뒤 아래위에 타원형의 길쭉한 구멍
하나씩이 뚫려 있다. 또 아래위에 못이 하나씩 있어 원래
광배(光背)를 달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입상은 그 크기에 있어서 신라(新羅) 금동소상(金銅小像)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은 원래 독존(獨尊)으로 주성(鑄成)된
것이 아니고 삼존(三尊)을 이루었던 두 협시(脇侍) 중의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는 통일신라기(統一新羅期)로 추정되는데, 절터에서 나왔다고 전해
질 뿐, 그 유래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문화재청 참조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 조성기라며 전시장에 적혀있는 글귀에 눈길이 머문다.
원하여 바라건데...
이것(불상)을 본 사람이나 향하여 정례(頂禮)한 사람이나 멀리서 들은
사람이나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나 그림자 가운데를 지나간 사람이나
바람이 불어서 지나간 곳의 모든 곳에 있는 일체의 중생이나 모두가
삼악도의 업(業)이 소멸하여 스스로 비로자나불인 것을 깨닫고 세상을
뜨도록 다짐합니다.
탑신석과 기단 면석에 새겨진 신장상(神將像),팔부중(八部衆),석탑부조가
전시되어 있다.
배경으로 꾸며진 소나무사진은 소나무 사진작가로 유명한 배병우교수의
"삼릉소나무"가 틀림 없을 것이다.
이 숲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이제 됐다, 나가자" 싶을까? 계속
서 있고 싶다고 한, 그 소나무 숲이다....
경주 창림사터 석탑 앙화
경주 남산에는 60여 기가 넘는 탑이 넘어져 있거나 세워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거대한 탑이 창림사(昌林寺) 터 3층 석탑이다.
1978년에, 이리저리 넘어져 있던 탑 돌을 모아 복원하였는데, 2, 3층
몸체 돌과 기단 돌의 절반 정도를 새로 다듬어 끼워 넣어 쌓았다.
상륜부가 없는 현재의 높이만 7m가 되는 큰 탑이다.
창림사는 남산에서 확인된 130여 곳의 절 터 중, 이름이 밝혀진
몇 안되는 절 터 가운데 하나다.
이 탑이 무너져 있던 북쪽 골짜기에서 탑 꼭대기를 장식하는 상륜부의
일부인 높이 30cm의 앙화(仰花)가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8개의 꽃잎이 벌어져 있는데 4방에는 부처님모습을 새겼고,
네 귀퉁이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으려는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를
새긴 화려하면서 멋들어진 모습이다.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 (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제28호
1930년 경주 백률사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가 불교계에서 " 우리꺼
이제 돌리도!" 했던 불상이다. 높이가 179c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최대
의 금동불이다.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내부는 완전히 비어있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어 형식화의 경향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세 분의 부처...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 그림자 속의 부처, 거울에 드리운 부처.
경북 선산 도리사출토 사리함
전시된 200여 점의 유물 중 불상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한 번이라도 가 본 절의 유물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부모님 생전에 함께 다녀온 적 있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최초의 가람
도리사(桃李寺) 사리함이다. 도리사는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기
약 100년 전에 세워진 사찰이다.
국도변에 크다랗게 세워진 도리사의 일주문 현판에는 "해동최초 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海東最初 伽籃聖地 太祖山 桃李寺)" 라고 적혀있다.
성덕왕릉 석조 12진상(원숭이), 높이116.0cm
석굴암 내부를 확대하여 만든 전시장에는 석굴암 축조방식의 모형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안내설명을 할 수 있는 장치들을 설치하여,교육장소로서 활용하기에도 좋도록 꾸며 놓았다.
도리천을 다스리는 제석천왕
팔만 유순(1유순은 400리, 400리는 160km, 80,000 × 160 =12,800,000km)
의 높이( 천 이백 팔십만 km) 로 솟아 있는 상상의 산 수미산 위에 사왕천
이 있고, 그 위에 다시 솟아 있는 가장 높은 땅의 세계, 도리천을 관장하는
제석천왕이다. 참고로 지구와 달의 거리는 약 39만 km,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1억5천만 km이다.
(좌) 감산사지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址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 높이183.0cm
(우) 감산사지석조아미타불상(甘山寺址阿彌陀佛立像). 국보 제82호, 높이174.0cm
감산사(甘山寺) 터는 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괘릉(掛陵)
부근에 있는 절 터다.
불국사에서도 그리 멀지않은 이 곳에서 정과 망치로만 다듬고 조각하였다고 믿기지
않는 정교한 두 불상이 출토되었다.
조형적 우수성과 더불어 두 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으로 이 절이 창건한 계기와
시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어 국보로서의 가치를 드높인 불상이다.
명문에 따르면 임금을 받드는 상사(尙舍)와 집사성(執事省)의 시중이란 중임을 역임한
김지성이란 사람이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살면서 부모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미륵보살상과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719년에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보살을 조성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아미타여래상을 조성
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김지성이 돌아가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후에 아미타여래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1,300년이 지나도록 불상이 저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김지성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한 하늘이 내린 은혜일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경주 남산의 불적"에 있는 불상.
남산 삼릉골 중턱 마애여래좌상 옆에 석불좌상이 저 모습으로 있었는데,
일제가 전시회를 여는 데 꾸민다는 명목으로 불상을 서울로 옮겨갔다.
석조약사불좌상, 경주 남산 삼릉계, 높이109.0cm
경주 남산을 답사하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저 불상의 현재사진을
찾아보려 무던히 애를 쓰다가 가까스로 찾아내기는 하였는데,불상의
존재를 알게된 후, 오늘에야 광배를 갖춘 실물을 눈 앞에 대하니
그 감개무량함이 그지없다. 부처님! 이 곳에 와 계셨군요.....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 301호
우리가 오랜 시간을 유지하든 일시적이든, 마음에 평안이 찾아 들고 작은 것 하나라도
마음에 새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처면 어떻고 예수면 어떠한가... 돌이면 어떻고
들풀이면 또 어떠한가,,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빛에 싸여 더러는 온전한 모습으로, 더러는 손발이 떨어지고 머리만
남은 채 천년의 미소를 잃지 않는 자비로운 부처들을 보며 느낀 생각이다.
|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세상너머님 ~~ 귀한 자료들 감사히 잘 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반갑습니다~세상너머님~관세음보살~~^^*()저도 중박엔 작년말과 올초에도 관람을 하고 왔습니다~감산사 그리고 연지암을 비롯하여 경주 일원의 일부지역 또 출토된 유물과 전시중의 유물이 중박으로 올라갔지요~경박은 중박의 특별 전시로인해 올라간 자리엔 경박의 전시관 일부가 변형 되어 있습니다~하루빨리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며 아울러 자료 올려주신 세상너머님께 다시금 감사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감사 합니다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