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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동창 계모임에 나갔던 주부 이영주(가명·34) 씨. 나훈아, 김혜수, 야쿠자가 키워드로 등장하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설마 그럴리가? 몇 차례 되묻던 이 씨는 마치 신문 사회면을 읽어가듯 단호하게 읊어대는 친구들의 주장에 머쓱해지고 말았다. 귀가한 남편에게 이 뉴스를 전했지만 돌아온 말은 이랬다. "당신 아직도 그거 모르고 있어?"
◆ 루머…연예인을 먹이로 삼다
서울에서 연예계에 정통하다는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헛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는 ~카더라 통신으로 회자되면서 뉴스 거리로 탈바꿈했다. 소문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것도 몰랐느냐 하는 표현은 추임새가 된다. 듣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게 만드는 이 표현은 이후 소식 전달자 입장으로 바뀌었을 때 아는 자만이 누리는 쾌감의 자기 암시마저 만들어낸다. 위의 루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급기야 나훈아는 600여 명의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며 바지까지 벗으려는 할리우드 액션을 선보이면서 최고의 엔터테이너임을 각인시켰다. 억측→소문→뉴스로 진화한 나훈아 스토리는 결국 헛소문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당사자들은 상상도 못할 고통을 호소하지만 소문의 전달자들은 그저 헛헛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자신도 헛소문의 확대 재생산에 한몫했기 때문이다. 남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예계만큼 탐스러운 이야기 거리는 없다. CF 스타 김태희는 2006년 재벌 2세와의 결혼설에 시달렸고, 탤런트 변정수는 2003년 7월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허황된 루머에 곤욕을 치렀다. 가수 주현미는 에이즈 감염설에 시달렸고, 탤런트 정소녀는 아프리카 한 국가 원수의 아이를 낳았다는 루머에 20년 가까이 시달렸다. 가수 장나라는 끊임없는 낙태설에 괴로워했다. 하나같이 낭설에 불과했지만 루머는 생명력을 갖고 퍼져나갔다.
◆ 루머 이보다 치명적일 수 없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루머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 하고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루머가 숨기고 있는 치명적 독성을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루머는 멀쩡한 기업을 망하게도 사람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1923년 일본에서 발생한 간토(關東) 대지진 때에 조선인이 우물에 극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수천 명의 조선인이 무자비하게 학살됐다. 지난해 6월 말 동아백화점이 인수·합병 시장의 매물로 나왔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관련업계에 따르면으로 시작되는 이 기사에는 화성산업이 회사 내 유통부문을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동아백화점과 동아마트에 대해 인수자를 물색 중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었다. 대구 그랜드호텔도 지난해 루머에 시달렸다. 그랜드호텔을 국내 굴지의 L그룹사가 백화점 및 호텔 용도로 매입했다는 말이 나돌아 급기야 대구시까지 나서 확인했지만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방랜드는 800억 원이란 매각 금액까지 나돌았지만 정작 당사자 측은 터무니없다며 일축했다. 근거 없는 매각설에 시달리던 수성구 범어동 여성 메디파크 병원은 소문의 진원지를 찾겠다며 1천만 원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경북의 한 식당은 식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식기 세척제를 사용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곤욕을 치렀다. 최초 소문을 낸 사람을 찾겠다며 현수막과 현상금 1천만 원을 내걸었다. 이후 상황을 묻는 취재진에게 주인은 겨우 상황이 진정돼서 잊고 지내고 있는데 이런 전화를 받게 된 자체가 너무 기분 나쁘다며 악의적인 소문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누구나 루머의 재생산자이자 피해자일 수 있다
대구 성서공단에서 신소재 부품공장을 경영하는 한 인사는 몇 해 전 떠돌던 소문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평소 가깝게 거래하던 업체 대표가 전화를 걸어와 요즘 괜찮냐고 물어볼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지인들의 전화가 걸려왔고, 급기야 부도설까지 나돌았다. 거래은행 관계자는 대출상환을 독촉했다. "사업 확장 때문에 술자리에서 돈이 좀 필요하다고 했던 말이 와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행히 당시 자금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거래업체와 은행에서 그런 식으로 압박을 가해온다면 버틸 기업이 몇 안 될 겁니다." 누구나 루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회사원 윤모(32) 씨는 얼마 전 동료들과 술자리에서 대판 싸우고 말았다. 승진 인사에서 동기들보다 빨리 대리를 달게 된 것이 화근. 사내에서는 윤 씨가 평소 인사부장과 고교 동창인데다 부장의 집안 일까지 일일이 챙긴 덕분에 승진했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회사 간부를 찾아가 인사고과를 공개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을 만큼 답답하고 화가 났습니다. 소문은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주부 정모(40)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딸 이야기를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우리 반에 누구랑 누구가 싸웠는데 글쎄 1반에 있는 여자애 때문이었대. 원래 누구랑 사귀고 있었는데 다른 애가 가로챘다는 거야. 둘이서 뽀뽀하는 것도 봤대." 정 씨는 딸에게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고, 실제로 본 적이 있는지 물었지만 딸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소문이 그렇게 났어. 다 아는 건데 뭐."
◆ 루머와 정보 그 모호한 경계
루머의 생명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보로 위장한 루머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뉴스 전달매체가 늘고,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정보와 루머의 경계선은 모호해졌다. 증권가는 루머의 진원지로 악명이 높다. 최근 증시가 급락하면서 공포 심리가 확산되자 루머도 난무했다. 추락하는 홍콩증시를 위해 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이 긴급 조치를 취한다, 중국은행의 거래가 정지됐다, 씨티은행이 파산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지만 이익을 노린 특정 세력의 악성 루머로 판명됐다. 증권회사 한 지점장은 주식시장만큼 정보와 루머가 혼재된 곳도 드물다며 사소한 정보 하나에도 요동치는 주식시장의 특성상 모든 정보를 루머로 치부하거나 그 반대의 행동을 보일 수도 없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99개가 루머로 판명되더라도 1개가 정보일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마치 뉴스인 양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루머는 더욱 활개를 치고, 정확한 정보마저 루머로 치부되는 정보의 역전 현상마저 빚어진다. 정보가 폐쇄적으로 알려지고 사실 확인이 늦춰지면 자칫 루머로 치부될 가능성도 있다. 투명하지 못한 사회에서 이익세력이 상충하면 루머는 정보와 교미하며 대중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루머가 정보로 정보가 루머로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