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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李相龍(1858 ~ 1932)】
"1922년부터 통의부·정의부 등 남만주 독립군단 지도자로 활동”
1858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부내면(府內面) 신세동(新世洞, 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臨淸閣)에서 아버지 이승목(李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초명은 상희(象羲), 이명은 계원(啓元)이다. 1872년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사는 의성김씨 진린(鎭麟)의 장녀 우락(宇洛)과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준형(濬衡)과 딸 하나를 두었다.
고성 이씨가 안동에 자리잡게 된 것은 19대조 이증(李增) 때부터였다. 이증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있던 중,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그 후 18대조 이명(李洺)이 의흥현감 직을 버리고 안동에 지은 99칸 대저택이 바로 임청각이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14세 되던 해 결혼하였다. 결혼 1년 만인 187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였다. 1876년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퇴계(退溪)학맥의 거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정통 유생으로 성장하였다.
1884년 정부에서는 조선의 전통 의복을 서양식으로 개조해 입으라는 이른바 「갑신변복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동료 유생들을 모아 상의한 끝에 자신이 초안을 잡은 반대상소문을 정부에 올렸다. 28세 되던 1886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때 탐관오리들의 부패 현장을 목격하고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1년간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1894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를 생각으로 선산(先山)이 있는 도곡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군사학을 연구하고 무기를 고안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병법서인 『무감(武鑑)』을 저술하고, 화살을 잇달아 발사할 수 있는 연노(連弩)를 새롭게 고안해 더욱 빠른 속도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 반포를 계기로 전국 유생(儒生)들이 분노하였고, 그 분노는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안동에서도 외숙부 권세연(權世淵)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상중(喪中)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도곡마을을 떠나 본가 임청각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외숙부와 연락을 통해 안동 의병부대의 재기를 도우며 고성이씨 문중을 대표해 의병부대의 활동 자금으로 500냥을 기부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조직된 의병조직 충의사에 가담하였다. 또한 보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 가야산에 의병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가야산 진지 구축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1907년에는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의 활동을 독려하고 지원하는 일에 매달리는 한편, 1만 냥의 자금을 마련하여 1908년 초 동지 이규홍(李圭弘)에게 보냈다. 이 돈은 가야산에 기지를 구축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장정을 모아 훈련시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군의 습격으로 많은 의병이 죽고 진지는 파괴되고 말았다.
두 번의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서양 근대 사상가인 베이컨(Francis Bacon), 데카르트(Rene Descartes), 칸트(Immanuel Kant)와 다윈(Charles. R. Darwin), 벤자민 키드(Benjamin Kidds),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블룬츨리(Johannes Kaspar Bluntschli) 등의 저작을 읽으며 국권 회복의 방도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즈음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김후병(金厚秉) 등이 안동에 신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였다. 의병운동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라 적극 가담할 수 없었지만 학교 설립과 운영을 적극 지지하며 자금을 지원하였다.
1908년 말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대한협회는 서울에 본회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설치한 계몽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안동 유림들은 대한협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안동 유림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지회 설립 목적과 방향을 설명하며 설득하였다.
이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안동경찰서에 붙잡혔다. 가야산에 의병 진지를 구축한 일과 연합의진 구성을 주도적으로 실행한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고문에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안동사람들이 경찰서 앞에서 구금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결국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일제 경찰은 한 달 만에 석방하였다. 풀려난 후 지회 설립에 매진하여 1909년 (음)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한협회 서울 본부가 점차 통감부 정책에 동조하는 실력양성 주장과 함께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와 연합을 시도하였다. 이에 안동지회만이라도 독자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하였으나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해체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국사(國史)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를 무대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 기지 건설계획을 세웠다. 1910년 11월 신민회(新民會)회원 주진수와 황만영으로부터 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 신민회 인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망명을 결심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처분해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1년 초 남아 있을 가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집안에서 거느리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다음 날 일가의 전송을 받으며 만주로 출발하였다. 다른 가족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간을 두고 두 차례로 나누어 출발하도록 하였다.
1911년 4월 초순 가족들이 모두 도착하자 애초 목적지인 서간도에 위치한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신민회 회원 이동녕(李東寧)·이회영등과 독립군 기지 개척에 앞장섰다.
1911년 봄 삼원보 다구산(大孤山)에서 약 300명의 이주 한인을 모아 노천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경학사 초기 조직당시 사장으로 선임되었고,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張裕淳), 재무부장 이동녕, 교통부장 유인식(柳寅植) 등도 선임되었다. 경학사 지도부와 함께 한인 2세들의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이 선임되었고 교과목은 국문, 역사, 지리, 수학, 수신(修身), 외국어, 창가(唱歌), 박물학(博物學), 물리학, 화학, 도화(圖畫), 체조였다. 교과목 가운데 역사는 자신이 국내에서 저술한 『대동역사(大東歷史)』를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출범 첫 해부터 대흉년으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많은 한인들이 풍토병에 걸려 죽어가자, 지도부와 함께 논의하여 척박한 추가가를 떠나 강이 있고 논농사를 짓기에 수월한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옮겼다. 합니하에서 지도부와 함께 더 많은 한인을 모으고 1912년 경학사에 이어 두 번째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건립하고 단장에 선임되었다.
부민단은 경학사와 달리 합니하에 중앙기관을 두고 서간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총괄적으로 관할 보호하기 위해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부민단의 조직이 체계화되자 한인을 대표하는 국민회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해 「중화민국국회제의서」라는 글을 중국 당국에 보냈다. 이 제의서 내용은 한인에게 자치권과 재산권을 주고 학교 설립과 군사훈련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제의서 제출 후 아들 준형을 시켜 고향 안동의 전답을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삼통하(三統河)라는 강이 흐르는 습지를 중국당국에 비교적 싼값에 빌려 집단 수전농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이끌어 갈 광업사(廣業社)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서간도가 한국보다 훨씬 춥다는 것을 생각해 위도가 비슷한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와 아오모리(靑森)의 볍씨를 구해 파종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농기구를 제작할 수 있는 철공장을 만들고 신성호(新成號)라는 금융기관을 만들어 수확된 곡식을 저축하였다가 궁핍할 때 찾아가 소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립군 기지의 기반이 될 한인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준비되자 1912년 5월 말경 새로 옮겨온 퉁화현에 제2의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한인마을이 형성된 각 지역에는 소학교와 노동강습소, 노동학교 등을 만들어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이들 초보적인 기관에서 양성된 학생들은 백서농장(白西農庄), 마록구농장(馬鹿溝農庄), 길남장(吉南庄) 등 상급단위 기관에서 독립군이 되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농장으로 이름한 것은 군사훈련 기관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설립을 주도한 마록구농장과 길남장은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경제·군사적 자산을 축적하기 위해 만든 군사병영이었다. 1914년 설치된 백서농장은 사방 200리의 고원평야인 퉁화현 소백차(小白岔)에 위치하였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영이 갖추어진 이곳에서 한인 청년들은 낮에는 인근 야산을 개발해 농사를 짓고 저녁 무렵부터는 군사훈련에 참여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1919년 2월 김좌진(金佐鎭)·김동삼(金東三)·여준(呂準)·이동녕·김약연(金躍淵)·박용만(朴容萬)·이동휘(李東輝) 등 만주·중국 관내·러시아 연해주·미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독립전쟁 선포서였다.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된 뒤 얼마 후,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서간도의 한인사회도 3월 12일 류허현 삼원보에 모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4월 한인 사회 지도자들과 합의하여 서간도 독립군 기지를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조직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회장으로 서간도 한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끌어 갈 한족회 중앙조직을 설치하고 각 지역 한인 마을에 지방조직을 만들었다.
한족회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의하여 1919년 11월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역할한다는 방침 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명되었다. 서로군정서는 북간도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 양대 군사기관이 되었다. 서로군정서로 개편 후 총책임자인 독판(督辦)으로 선임되었고, 부독판은 여준, 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1919년 5월에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해 본격적인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본교를 류허현 고산자(孤山子)에 두었고, 퉁화현 합니하와 쾌대모자(快大帽子) 두 지역에 분교를 만들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에는 이세영(李世永), 연성대장은 지청천, 교관은 오광선(吳光鮮)·신팔균(申八均)·김경천(金擎天) 등이 맡았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요원은 약 1,500명 정도였다. 또한 서로군정서 사령관 지청천을 통해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군 병사를 충당함과 함께 무기 확보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출병하였던 체코군들이 자국으로 돌아갈 때 파는 무기를 구입하도록 하여 서로 군정서대원 1인당 2~3정씩 짊어지고 첩첩산중의 험한 산길을 걸어 군영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다.
서로군정서가 독립군단 체계를 갖추자 1920년 5월부터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개시하였다. 10여 명으로 구성된 서로군정서 유격대는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여 평북 강계·자성·후창·벽동·위원 등지의 일제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의 국내 진공작전이 전개되자,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2만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서북간도의 독립군 기지와 한인 마을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다른 독립군단과 연락을 취하며 서로군정서 주력부대를 안투현(安圖縣) 삼인반(三人班)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때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단을 일본군이 쫓아오자 이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가 바로 청산리전투다.
청산리전투 후 사령관 지청천에게 본대를 이끌고 북만주 미산(密山)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때 서로군정서 일부는 서간도로 돌아왔다.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군은 한인 거주 마을을 찾아다니며 방화와 살해를 저질렀다.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은 3,693명의 한인이 살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간도참변 후 신광재(辛光在)에게 청산리전투 후 지청천을 따르지 않고 서간도에 머물러 있는 병사들을 모으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모인 병사들로 다시 진영을 갖추었다.
1921년 4월 베이징(北京)을 다녀온 서로군정서 헌병대장 성준용(成駿用)으로부터 박용만과 신숙(申肅)이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도움을 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에 이진산(李震山)·송호(宋虎)·성준용을 대동하고 베이징으로 가 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다. 군사통일회의에서는 「군사통일에 관한 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대조선공화국’ 정부수립안이 나왔다.
정부수립안에는 대통령에 이상룡·신숙·김대지(金大地)·박용만 등으로 내각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여 거부하였다.
1921년 6월 초 서간도로 돌아온 후 여준·이탁(李鐸)·김동삼·곽문(郭文) 등과 회의를 개최하고 서로군정서는 임시정부를 이탈해 무장투쟁에 전념하는 독자적 노선을 견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나 백서농장의 경우처럼 둔전병제를 실시할 계획으로 이탁·김동삼을 닝안현(寧安縣)으로, 송호를 안투현으로 보내 적당한 땅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서로군정서 진용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제국 군인 출신 황학수(黃學秀)를 영입해 참모장 겸 군무위원장에 임명하였다.
서로군정서가 내부 진용을 갖추고 있을 즈음 여준은 애무현(額穆縣)에서 민족 학교인 검성중학원(儉城中學院)을 설립하였다. 1922년 가을 여준의 연락을 받고 이탁·황학수 등과 함께 그곳에 머물며 학생들에게 민족사를 가르치는 한편, 농법을 전수하기도 하는 등 검성중학원을 운영하였다.
1923년 남만주 독립군단 통합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대립 분열되자 그 해 11월 김동삼의 요청으로 남만주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화뎬현(樺甸縣)으로 불러모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새로운 군정서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새로운 군정서를 조직하여 만주 한인을 통치하기로 하였다. 또한 자신이 군정서 독판을 맡고, 부독판은 여준, 정무청장은 이탁으로 선임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 의결 역시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1924년 11월 남만주의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다. 정의부 성립 후 1925년 초 67세를 맞이하자 뒤에서 한인사회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하며 특정한 직책을 맡는 것을 사양하고 조직의 방향을 제시하는 큰 어른으로 대접받았다.
1925년 5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유필(李裕弼)과 법무총장 오영선(吳永善)이 만주로 왔다. 이들은 북만주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와 정의부의 대표들을 만나 임시정부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정의부에서 천거하는 인물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선임하자는 안을 제시하였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의 천거로 1925년 8월 하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를 마치고 9월 24일 삼일당(三一黨)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임기 3년의 국무령제는 대통령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임시정부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최고의 자리였다.
취임식이 끝난 후 10월 10일과 12일 양일간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과 협의해 이탁·김동삼·오동진·윤세용(尹世茸)·현천묵(玄川黙)·윤병용(尹秉用)·김좌진·조성환(曺成煥)·이유필 등 9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이들 중 이탁·김동삼·오동진·윤병용은 정의부, 김좌진·현천묵·조성환은 신민부, 윤세용은 참의부(參議府) 소속이었고, 이유필은 임시정부에서 계속 활동한 인물이었다.
만주에서 무장투쟁 경험을 갖춘 인물들이 임시정부의 주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만주의 인물들이 취임을 거부하였다. 이유는 정의부 내부에서는 행정기관인 중앙행정위원회와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간에 국무령 취임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갈등이 일어났다.
중앙의회가 정의부 인물을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행정위원회 독단으로 임정의 국무령으로 천거하고 취임하도록 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또 참의부는 정의부나 신민부와 달리 윤세용 한 명만 국무위원에 임명된 것이 불만이었다. 참의부의 불만은 참의부 교육위원 박희곤(朴熙坤)이 임시의정원 의원 여운형(呂運亨)을 구타하는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박희곤은 여운형이 국무위원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구타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자신이 치밀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만주에서도 일제의 마수가 점차 강화되고 확대되자 젊은 동지들의 힘을 의지해 각지를 전전하던 중 1932년 5월 12일 만 74세의 나이로 지린성(吉林省) 쉬란현(舒蘭縣) 이도향(二道鄕)소과전자(燒鍋甸子)에서 사망하였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기다려라”라는 유언에 따라 소고전자에 가묘를 썼다. 1938년 조카 광민이 동취원창(東聚源昶)으로 이장하였다.
유해는 1990년 10월 11일 중국에서 대전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가, 1996년 5월 서울 동작구의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술로는 『석주유고(石洲遺稿)』, 『석주유고후집(石洲遺稿後集)』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