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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의 여정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질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2019년 1월 23일, 치악산 명성수양관에서 나는 「나의 독서의 여정」이라는 글을 썼다.
그때 나는 산을 오르다가 중간에 쉬면서 지도를 펼쳐 보는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어떤 책들을 읽었고 그 책들이 나의 신앙과 목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돌아보았다.
그 글을 쓴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동안 나는 또 많은 책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처음부터 어떤 신학적 커리큘럼을 정해 놓고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학자를 따라가겠다고 마음먹고 그 사람의 책을 순서대로 읽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그때 내 안에서 생겨난 질문이 하나의 문을 열었고, 그 문을 통해 들어가면 또 다른 질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질문이 다시 다음 책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래서 나의 독서 여정을 돌아보면 책의 목록보다 질문의 계보가 더 선명하다.
나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질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1. 처음 열린 문 — 프랭크 비올라
나의 독서 여정을 언제부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할까?
2019년에 쓴 글에서는 2014년 폴 엘리스의 책을 출발점이라고 썼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보다 조금 앞선 2012년, 프랭크 비올라(Frank Viola)를 만난 것이 중요한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나는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면서 성경과 교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프랭크 비올라의 책을 읽으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경을 낱낱의 교리와 명령의 모음으로 보기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원에서 지상으로』(From Eternity to Here)에서 그는 성경 전체를 사랑, 성전, 백성이라는 큰 주제로 바라본다.
그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의 각각의 구절을 잘 해석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큰 뜻을 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이후 나의 독서 여정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비올라의 『Pagan Christianity』, 『Reimagining Church』, 『Jesus Manifesto』, 『God’s Favorite Place on Earth』 등을 읽으면서 나는 교회라는 제도와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지금처럼 이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질문이 생겼다.
“교회란 무엇인가?”
2. 율법주의에서 은혜로 — 폴 엘리스
그리고 2014년, 내 신앙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은 책을 만났다.
폴 엘리스(Paul Ellis)의 『The Gospel in Ten Words』였다.
이 책은 당시 목회에 대한 깊은 실패감과 자책에 빠져 있던 나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사랑받음, 용서받음, 구원받음, 하나됨, 양자됨, 거룩함, 의롭게 됨, 죽음, 새로워짐, 왕 같음.
나는 이 책을 몇 달 동안 번역하면서 공부했다.
단순히 읽은 것이 아니라 거의 씹어 먹듯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29년 동안 필리핀의 정글에서 전쟁을 계속했던 일본군인 히루 오노다의 이야기가 나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혹시 나도 이미 끝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그 후 스티브 맥베이(Steve McVey)와 앤드류 팔리(Andrew Farley)의 책을 읽었다. 몇 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질문은 분명했다.
“복음이 정말 무엇인가?”
나는 오랫동안 신앙을 열심히 살아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혜의 복음을 통해 오히려 반대의 질문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3. 은혜 다음에 찾아온 질문 —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은혜를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자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인생을 어디에 투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면서 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김세윤, 김회권, 정현구가 함께 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읽었고, 박철수 목사의 『하나님 나라』도 읽었다.
그리고 톰 라이트(Tom Wright)를 만났다.
나에게 톰 라이트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성경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 교회 그리고 새 창조.
성경은 각각의 교리들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거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를 읽으면서 천국과 부활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라는 표현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인가?”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나의 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4. 성경에서 세상으로 — 신앙의 지평이 넓어지다
그 후 나는 성경과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한스 큉(Hans Küng),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파커 파머(Parker J. Palmer),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등의 책을 읽었다.
종교를 비교해서 바라보고,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 공동체와 평화와 화해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진리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박시백의 역사만화 『35년』과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대한 책을 읽었다.
리영희 선생의 책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환경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이것 역시 하나의 방향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교회 안의 지식만으로 끝날 수 있는가?”
신앙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5. 예수님을 다시 묻다 —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다 보니 결국 예수님을 다시 묻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이 질문과 함께 마커스 보그(Marcus Borg)를 만났다.
보그를 통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구원과 영성, 하나님 나라, 종교 간 대화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교리적인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리고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1세기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상황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더 깊어졌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순히 개인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국과 폭력, 종교와 사회의 구조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에서
“1세기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6. 성경의 세계를 다시 배우다 — 존 월튼
그 다음에 존 월튼(John H. Walton)을 만났다.
월튼을 통해 나는 창세기를 읽을 때도 21세기의 과학적 질문을 성경 본문에 그대로 던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성경의 저자들이 살았던 고대 근동의 세계는 오늘 우리의 세계와 달랐다.
그렇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었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창세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울의 편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살았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르다면, 그들이 사용한 언어와 이야기와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월튼은 나에게 성경을 읽는 새로운 안경을 하나 건네준 셈이다.
7. 복음서는 왜 그렇게 쓰였는가? — 데니스 맥도널드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데니스 맥도널드(Dennis MacDonald)를 만났다.
이제 질문은 다시 한 단계 깊어졌다.
“복음서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가?”
에서
“복음서는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로 바뀌었다.
고대 문학의 모방과 차용, 수사학적 표현, 당시의 문학적 관습 등을 살펴보면서 복음서를 읽는 방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복음서가 단순히 오늘날의 신문 기사와 같은 방식으로 쓰인 기록이 아니라, 1세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기록한 문학적·신학적 작품이라는 사실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왜 저자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썼을까?”
8. 고대인은 초월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 M. 데이비드 리트와
그리고 지금 나는 M. 데이비드 리트와(M. David Litwa)를 읽고 있다.
여기까지 오니 질문이 또 달라진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 증언했다면,
“그들은 초월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고대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예수님의 신성을 우리가 21세기의 개념으로 그대로 읽어 버리는 것은 적절한가?
아니면 먼저 그들이 살았던 고대의 종교적·문화적·문학적 세계를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 바로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9.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를 버리는 길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혹시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국 성경을 믿지 않게 된 것 아닌가?”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나는 성경을 버리기 위해 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다.
성경을 더 진지하게 읽기 위해 성경이 기록된 세계를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진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이 진리를 말한다는 것과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21세기의 과학적 보고서처럼 읽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인가?
비유를 비유답게 읽고, 시를 시답게 읽고, 묵시문학을 묵시문학답게 읽고, 고대의 신화적 언어와 상징을 그 시대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을 더 존중하는 길은 아닐까?
이 질문은 내가 창세기를 읽을 때 존 월튼을 통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을 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 확장해 보고 있는 것이다.
10. 나의 독서는 커리큘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돌아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순서로 공부해야겠다고 계획한 적이 없다.
프랭크 비올라를 읽고 다음에는 폴 엘리스를 읽고, 그다음에는 톰 라이트, 보그, 크로산, 월튼, 맥도널드, 리트와를 읽겠다고 계획표를 만든 적이 없다.
어떤 책은 끝까지 읽었다.
어떤 책은 중간에 멈췄다.
에이미 필러(Amy Peeler)의 히브리서 주석도 읽기 시작했지만 중단했다.
그렇다고 그 독서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책은 지금의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문을 열어 주었다.
어떤 책은 아직 내가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중에 다시 그 책을 펼치면 전혀 다른 책처럼 읽힐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독서는 ‘완독의 독서’라기보다 ‘문을 여는 독서’에 가깝다.
책 한 권을 읽으면 새로운 질문 하나가 생긴다.
그 질문이 다음 책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 책에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그렇게 나는 여기까지 왔다.
11. 책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독서 여정은 몇 개의 커다란 질문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랭크 비올라를 통해서는
“성경과 교회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만났다.
폴 엘리스와 스티브 맥베이, 앤드류 팔리를 통해서는
“복음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만났다.
톰 라이트를 통해서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라는 질문을 만났다.
마커스 보그를 통해서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를 다시 물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을 통해서는
“예수님을 1세기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를 물었다.
존 월튼을 통해서는
“성경의 저자들은 어떤 세계에서 살았는가?”
를 물었다.
데니스 맥도널드를 통해서는
“복음서는 왜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는가?”
를 물었다.
그리고 M. 데이비드 리트와를 통해서는 지금
“고대인들은 예수님의 초월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는가?”
를 묻고 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의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아마 이것이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12. 구도의 길
이렇게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을 ‘독서의 여정’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나의 구도의 길이었다.
구도라는 것은 내가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생각을 계속해서 진리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전에 옳다고 확신했던 것을 다시 살펴보고, 새로운 질문 앞에서 생각을 고쳐 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가진 편견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신앙은 어느 순간부터 ‘정답을 지키는 신앙’에서 ‘진리를 따라가는 신앙’으로 조금씩 바뀌었다.
나는 이것을 ‘항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완성된 지도가 없다.
지금까지 지나온 항로를 기록하고,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별과 나침반을 보면서 다음 항로를 정한다.
때로는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섬에 도착하기도 한다.
어떤 책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바다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붙잡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생각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항해의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그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 나라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13. 원어를 배우는 이유
그래서 요즘 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 초기 기독교의 문헌들을 원문으로 읽어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그 이전의 문헌들과 이후의 중세 문헌들까지 읽어 보고 싶다.
물론 내가 그것들을 모두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평생을 공부해도 다 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무지개 같은 목표가 되어 준다.
저 멀리 있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는 내가 생각했던 책을 읽지 않고 전혀 다른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스어를 공부하다가 어떤 고대 문헌에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고, 라틴어를 공부하다가 중세의 어떤 사상가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나의 독서 방식이다.
정해진 코스를 완주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따라가는 것이다.
14. 이제 나는 무엇을 하려는가
나는 앞으로도 성경을 읽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 읽지는 않을 것이다.
신학 책도 읽겠지만 신학 책만 읽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도 읽고, 문학도 읽고, 철학도 읽고, 사회와 경제와 환경에 관한 책도 읽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상가들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의 저자들이 살았던 세계를 더 깊이 알고 싶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지 살펴보고 싶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고 싶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어떤 의미였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증언했는지도 살펴보고 싶다.
그 과정에서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 가운데 무엇이 더 선명해지고, 무엇이 수정되어야 할지도 보고 싶다.
나는 새로운 학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을 나의 최종적인 스승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자는 밑그림을 그려 준다.
어떤 학자는 색을 더해 준다.
어떤 학자는 내가 보지 못했던 한 부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붓질 하나가 그림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각각의 붓질을 그림 전체와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새로운 생각이 그림 전체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한 부분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전체 그림을 왜곡하는가?
이것이 지금 내가 독서를 대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15.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내가 되어 갔다
2019년에 나는 “저자들은 자신의 책을 통해서 다른 훌륭한 저자들을 소개한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친구들을 알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만남이 우리들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고 썼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 말이 참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책은 또 다른 책을 소개했다.
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했다.
하나의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폴 엘리스는 나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던 신앙에서 벗어나 은혜를 바라보게 했다.
톰 라이트는 나에게 개인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보게 했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님과 신앙을 다시 묻게 했다.
크로산은 예수님을 역사 속에서 바라보게 했다.
월튼은 성경의 세계를 바라보게 했다.
맥도널드는 복음서의 문학적 세계를 바라보게 했다.
리트와는 고대인들이 초월을 이해했던 방식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 대신 결론을 내려 주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책들을 읽고 다시 나 자신에게 질문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특정한 한 사람의 신학이 아니라, 질문을 따라 걸어온 시간 전체라고 생각한다.
16. 아직 나는 길 위에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깨닫는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신앙의 길에서 ‘도착했다’고 말하는 순간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도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미 얻었다거나 이미 완전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쫓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구도의 길이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안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사람이다.
내가 과거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이해하고, 그 생각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존중하면서도, 더 큰 진실 앞에서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성경을 읽고, 신학을 읽고, 역사와 문학과 철학을 읽는다.
그리고 사람을 읽는다.
세상을 읽는다.
내가 살아온 삶도 다시 읽는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
2019년에 나는 산을 오르다 잠시 멈추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썼다.
지금도 나는 그 산을 오르고 있다.
다만 이제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산과 조금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 것 같다.
길도 달라졌고, 내가 가진 지도도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길을 걷는 나 자신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싶었다.
예수님을 알고 싶었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싶었다.
성경의 세계를 알고 싶었다.
고대인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일 것이다.
독서는 나에게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었다.
독서는 나를 계속해서 길 위에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또 질문할 것이다.
또 길을 나설 것이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독서의 여정이고,
나의 구도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