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8주일설교 누가복음23:13-25
본문: 누가복음23:13-25
제목: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오늘은 누가복음23:13-25의 말씀을 가지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우리는 예배 때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참으로 우리 모두는 이같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입장에서보면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고를 내린 것은 맞지만
자신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온전히 자신만 잘못한 것처럼 뒤집어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다른 말이 없이 오직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고백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빌라도는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되어야 했나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피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1.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
누가복음22:71절에서 우리는 유대인 공회가
주님을 신성모독자-즉 하나님을 거스르는-자로
여겼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죄목으로 예수님을 사형을 시키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사형을 선고할 사법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로마 총독만이
사형을 내릴 권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체로 가이사랴 해안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유월절 기간에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지
감시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습니다.
유월절 기간이면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세계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까지도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시몬도
그런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 였습니다.
그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다가
로마 군인들이 강제로 십자가를 매고 가라고 해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죄목은
그들의 공회에 고발한 예수님 대한 죄목과 달랐습니다.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곧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라고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그런 고발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 형을 선고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우상들을 섬기는 자였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라는
죄목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그런 죄목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 형을 절대로 내리지 않고
무죄 석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분개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죄가 없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와있던 헤롯에게 넘겨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그도 역시 예수님께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몇 대 때려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끝났더라면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고난을 받았다고
우리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양심에 따라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2.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는 빌라도
오늘 본문 14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끌고 왔지만
너희가 보는 앞에서 심문을 했는데도
나는 너희 고발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죄상도 찾지 못하였다”(공동번역)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백성들을 선동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사회를 혼란케 하는 죄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심문한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롯에게 넘겨 죄를 찾도록 했지만
그도 역시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통치자나 갈릴리 통치자나 모두가
주님이 고소 당한 일에 대해서
혐의가 없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죄 없음은 공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것도 믿는 권력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무시하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힘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손길이
예수님의 재판 사건을 주장하사
주님의 원수였던 재판관들도
그에게서 잘못을 찾을 수 없고
책잡을 것이 없음을 증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위대한 구속자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완벽합니다.
주님께서 흠 없고 온전하여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더 나가 선을 행한다고 말을 하면서
죄를 짓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진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어겼던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행하셨기에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의가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되었기에
그런 은혜를 입게 됩니다.
3.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무리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를 찾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소리 지르기를
“예수님을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몇 대 때려서 겁을 주어
예수님을 놓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백성들을 소동케 하고
세금을 받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런 고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러한 죄가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죄에 대해서 자신도 못 찾았지만
분봉왕 헤롯도 못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예수님을 몇 대 때려서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없에 달라고 했습니다.
죄가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예수님을 없에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었기에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라바를 자신들에게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바라바는 정말 민란을 일으킨 자였습니다.
사람들을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그런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까지 죽인 그런 자가 바라바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명절이 되면 한 사람을 놓아주어서
시혜를 베푸는 듯했습니다.
이번 광복절에도 특별사면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유월절이면 로마의 통치자로 시혜를 베풀 듯이
죄인 한 명을 놓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 대상자로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고
그래야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지도자라면 억울한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이 양심이 있는 자라고 생각하고
죄가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빌라도가 보기에도
거룩하고 흠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빌라도 결국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악한 자이며 살인자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소리에 밀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은 바라바 보다도
더 악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정죄당하심은
우리가 어떤 죄인일지라도 그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그렇게 죄인 취급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인자보다 보잘것없이
취급받는 것을 허용하시며, 죄인 중의 우두머리보다
더 악하게 여기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 주었을까요?
어떻게 했기에 그는 그는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믿는 이들이 계속해서 그의 죄를 말하며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4.저희 소리가 이긴지라-23절
사람은 소리를 듣고 움직입니다.
자명종 소리에 깨어서 일어나고,
엄마나 아빠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고
자신 몸에서 일어나라는 소리에 깨어서 일어납니다.
친구들이 무엇을 하자는 소리에 움직이고,
텔레비전의 광고를 보고서 상품을 사기도 합니다.
특별히 옳고 그른 일을 하고 안하고는
내 마음에 소리를 듣느냐 안 듣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때 양심의 소리를 따릅니까?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따릅니다.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음성이며,
우리 주님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분명 이런 양심의 소리
곧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빌라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신앙인은 아니지만 비록 로마 총독이고
악한 자이지만 그래도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누구일지라도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심판할 권세가 있던 그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때려서 놓는 정도로 판결합니다.
그것은 그로서 최선의 결정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결정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결정을 내려서 행했다면
그는 만 대에 존경받는 멋진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무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양심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소리였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소리는 작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또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모자라 큰 소리로 재촉합니다.
그 양심의 소리를 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양심의 소리를 따라서 바른 판결을 합니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를 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소리가 컸고,
육신의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습니다.
수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계속되는 육신의 소리는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니 양심의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육신의 소리만 커집니다.
그러다 보니 불안합니다.
육신으로 괴롭힘을 당합니다.
육신에 커다란 손해가 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무리가 구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줍니다.
자신 뜻대로 하지 못하고 저희의 뜻대로 행동합니다.
악이 선을 이깁니다.
그것은 그가 영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사람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의 음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누구나 다 양심의 소리를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양심을 따라 살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소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음성이 크게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의 소리보다 커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길이 영의 소리 곧 성령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을 따라서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의 소리 곧 육신의 소리보다
더 크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한 길입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음성을 듣도록 기도하고
그분의 음성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음성에 목숨을 거는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빌라도에게 우리 주님이 고난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만왕의 왕이요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장본인입니다.
억울하다고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소리에 육신의 소리에
세상의 소리에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주장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음성이 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주님의 음성에 따라서
행동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이 세상 음성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