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노비 제도와 그 후의 노비 근성 (1)
한국사회문제연구소장/박사
조상진
조선시대의 노비제도는 남자 종의 노(奴)와 여자 종의 비(婢)를 의미하는 신분제이다. 관청에 속하는 ‘공노비’ 와 양인(양반 등)에게 속하는 ‘사노비’ 로 나누었다. 노비는 매매 또는 상속의 대상이 되는 양인의 재산이 되었다.
조선 건국 당시 약 550만 인구 중에서 15%가 노비 신분이었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시대부터 노비가 증가하면서 1540년경에는 30~40%로 큰 폭으로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는 50% 정도의 인구가 노비 신분이었으며 그러한 원인은 세종 시대의 노비 종모(從母)법에 있었다.
당초의 노비 종부(從父)법에서는, 부친이 양인이면 모친이 노비이라도 자식은 양인이 된다. 양인이 많아지면 세금과 군역이 많아져 나라 재정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종대왕이 종모법으로 바꾼 것이다. 모친이 노예이면 부친이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어 일천즉천(一賤則賤)이 된 것이다. 그리고 노비 여성이 자식을 낳으면 모두 부친의 노비가 된다. 양인의 핏줄도 노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반들은 자신의 여종들을 마음껏 취했고 그 자식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양반들의 매매 재산이 되었다.
그러면 왜 종모법으로 바꾸었을까. 당시 사대부 양반들의 재산은 주로 노비와 토지이다. 종부법에서는 노비들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양인들의 재산도 줄어들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세종을 설득한다. “종부법은 강상의 도리에 어긋납니다. 모친의 신분에 따르는 종모법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결국 사대부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그들의 사익에 부합하여 노비 비율이 커지는 결과가 된다.
양인이 노비 여종과 낳은 자식은 양인이 되는 것보다,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겠다는 논리이다. 이 사태로 인하여 이후 노비들의 규모는 135만~200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약 600만 명의 인구에서 30% 전후에 해당하는 규모가 되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중국 명나라 노비는 5% 미만이고, 일본에서는 노비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도 농노는 있었으나 세습적 노예는 드물었다. 1776년 독립한 미국은 타민족인 흑인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삼았으나 1865년 링컨 대통령은 그 노예들을 모두 해방했다. 따라서 조선처럼 동족으로 노비 비율이 높은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었다. 그나마 일제의 간섭을 받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 노비제도는 폐지된다. 조선 왕조가 스스로 결정한 것 보다는 외세의 근대적 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조선의 노비제는 500년을 이어오면서, 아직도 우리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는 잠재적 피해의식 즉 ‘노비근성’ 으로 뿌리 박혀 있다는 주장들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비 근성은, 주체성 보다는 남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눈치만 보는 성질 등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배경과 현대사회의 심리적 측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요 특징 등을 살펴본다. 1)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기보다는 누군가 정해주거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습성이다. 2)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문제가 생기면 외부나 타인에게 핑계를 대는 책임회피 그리고 남의 탓이다. 3) 생산적인 노력과 가치의 창출보다는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타인과 계속 비교하며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는 심리의 경향이 있다. 4) 스스로 책임을 감당하기보다 통제받는 것을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끼는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있다. 5) 그리고 공짜 얻기를 좋아하는 습성이다. 이러한 근성들은 조선시대의 신분제와 억압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되어, 오랫동안 내면화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