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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중국 대만총통 장개석과 악수하는 이승만대통령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18803
장개석 대만 총통과 악수하는 박정희 대통령
https://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SrcGBN=BK&detl_PhotoDTL=1695
중국은 2천년 이상 한반도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해 왔다 -송미령-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1254?
출쩌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21
쑹메이링(송미령) 宋美齡
출신지 :중국 상하이(上海)
생몰년월일 1897. 3. 5 ~ 2003. 10. 24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관련 단체 중국국민당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8)
1897년 3월 5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유복한 기업가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쑹쟈수(宋嘉樹)는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중국에 돌아온 이후 성경(聖經) 출판과 판매, 제분업 등의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3남 2녀의 형제들은 모두 조기에 미국에 유학하여 웨슬리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 경력은 사상이나 생활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니, 당대 서구의 최고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서구적 지식과 생활에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큰언니 쑹아이링(宋靄齡)은 뒤에 중국 최고 재벌인 쿵샹시(孔詳熙)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언니 쑹칭링(宋慶齡)은 중국 공화혁명의 아버지로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인 쑨원(孫文)의 부인이 되었다. 오빠 쑹즈원(宋子文)은 쑨원과 장제스(蔣介石)의 주요한 협력자로 국민정부의 재정부장, 외교부장, 행정원장 등의 고위 관직을 지낸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다. 흔히 그녀의 집안을 송씨왕조(宋氏王朝)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17년 이후 상하이 사교계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1922년 형부 쑨원의 소개로 장제스를 만난 이후 어머니 니쟈젼(倪佳珍)과 언니 쑹칭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7년 12월 장제스와 결혼하여 당대 최고 정치지도자의 부인이 되었다. 장제스와의 결혼은 흔히 정략결혼으로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 그녀는 장제스가 기왕의 결혼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장제스는 이때의 결혼 이전에 이미 3명의 부인을 거치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장제스의 네 번째 부인인 셈이었다. 장제스는 처가의 요구를 받아들여 본처와는 이혼하였고 다른 여자들과는 사실상의 혼인관계가 없었다는 개인 성명서를 일간지에 게재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둘째 언니 쑹칭링은 결혼에 크게 반대하였다. 그것은 장제스의 정치적 입장이 철저하게 반공적인 것으로 만년의 쑨원이나 쑹칭링의 정치적 입장과 크게 대립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27년 이후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쑹칭링과 장제스의 대립은 적지 않은 갈등을 낳았으니, 민권보장동맹(民權保障同盟)을 중심으로 한 쑹칭링의 독재 반대운동은 장제스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이 세기의 결혼과 관련하여 주목할 일은 장제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장제스는 기독교도인 그녀와 혼인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이후 일생동안 비교적 충실한 기독교도인의 삶을 이어갔다. 장제스의 기독교 입교는 장모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여러 지역 군벌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장전쟁(反蔣戰爭)인 이른바 중원대전(中原大戰)을 겪으면서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기독교도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또한 성경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여 자신이 번역 · 감수한 성경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정치적 활동에 관하여 살펴보자면,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예컨대 장제스의 정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위기 가운데 하나인 1936년 12월의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났을 때,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장제스를 억류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과의 협상을 중재하였다. 선항일(先抗日)을 내세우며 내전 중지, 정치범 석방을 주장한 장쉐량과의 협상을 통해, 결국 장제스를 2주일 만에 풀려나도록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장쉐량은 그 후 오랜기간 동안 정치적 연금을 당하게 된다.
또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덕분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통했던 까닭에 장제스의 정치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도우며 국제무대에서 활동이 빛났다. 예컨대 1942년 11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제창으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전후 세계질서의 재구축을 위한 회담인 카이로회담에 장제스의 통역 자격으로 참석하여 루즈벨트, 처칠 등 세계 최고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유능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또 장제스를 대신하여 중일전쟁 시기 미국의 군사적 · 경제적 원조를 얻어내는 외교활동에도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특히,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원조가 얼마나 미국에 유익한지를 알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국민당 정권의 대륙 철수 때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臺灣)으로 옮겨갔다. 1950년 4월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인 중화부녀반공항아연합회(中華婦女反共抗俄聯合會, 부연회(婦聯會)로 간칭)를 만들고 장제스의 타이완 통치를 적극 도왔다. 또 항일전쟁 시기부터 본격화하고 있던 외교분야 활동의 연장으로 1950년 8월과 1952년 8월 두 차례 미국을 장기 방문하면서 대륙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적극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그녀는 미국에서 ‘백만인위원회’를 조직, 미국인들의 국민당정권(중화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녀의 대미외교활동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 대륙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의 회원이 되는 것을 막아내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일생 동안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그녀는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국민당 주석직에 오르자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같은 해 9월 타이완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롱아일랜드의 저택에서 한가한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2003년 10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에 앞서 1981년 대륙에 남아 공산당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언니 쑹칭링이 사망하자 한때 대륙 방문설이 파다했지만 결국 방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쑹칭링의 장례는 끝나고 말았다. 자매는 1949년 국민당 정권이 패퇴하여 대륙을 떠난 이후 결국 만나지 못한 채 모두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1986년에는 장제스 탄신 100주년을 맞아 일시 타이완으로 돌아와 5년간 거주하기도 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독자적으로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확인되는 사실이 많지 않다. 다만 장제스의 부인으로서 장제스가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난다든가 할 때 늘 배석하여 지지를 표명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1924년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한국인 청년들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처음 확인된다. 한인 청년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와 중국혁명 참가는 코민테른이 추진하던 ‘연합전선’과 식민지 약소민족 간의 협력체제 구축 시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쑨원과 장제스로 대표되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태도나 ‘지원’ 정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삼민주의(三民主義), 특히 ‘민족주의’ 내지 ‘대아시아주의’로 대표되는 국민당의 약소민족 정책 속에는 ‘지원을 통한 영향력 확보’라고 하는 전통적 중화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사실상 독자적 기반이 없었던 임시정부는 중국 내 망명정부로 존재해 있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존립기반이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지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의 내면에는 ‘중한호조(中韓互助)’로 표현되는 긍정적 의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중점적인 활동목표는 첫째, 한국의 자주적 독립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 외교적 활동을 통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
우선 군사조직인 광복군 창설과 관련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직후인 1940년부터 중국 국민정부와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주된 논의사항은 임시정부의 독자적 운영권 확보와 중국 국민정부의 이에 대한 견제 및 통제정책이었다. 중국 국민정부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제정을 통하여 광복군을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에 예속시키고 실제적 운영도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 중국 장교들이 장악하도록 하였다. 중국 국민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라는 것에서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조치는 항일을 위한 연대라는 ‘중한호조’의 측면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측면보다는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통제와 예속이라는 측면을 더 잘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1941년 말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한중간에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문제에 있어서도 중국 국민정부에서는 적극적인 승인의지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국민정부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의 이면에는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내부 분쟁이 워낙 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충분히 대표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또 다른 열강들 특히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 국민정부의 입장이 들어 있었다.
중국 국민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통해 전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와 통제,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기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을 통하여, 미국의 외교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공동관리(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방안에 동조하는 것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였다. 따라서 카이로회담 이후 단계에 가면 중국 국민정부의 독자적인 임시정부 승인이란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국민정부는 종전을 앞두고 동맹군의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였다. 또 재정적 원조와 민간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 확대를 검토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국민정부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시기(in due course)’에 대한 방안으로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 고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의 한반도 개입 정책은 일본 패망 이후 미국군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진 이후 단계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장제스와 함께 한국독립운동 내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상당한 업적을 냈다고 말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인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환국할 때 중국 국민정부에서 환송연을 열었는데, 장제스와 함께 배석하여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한국독립운동 지원의 상징적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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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3/17/2023031700076.html
이승만 건국사(28) 카이로 선언 ‘한국독립’ 조항에 얽힌 비밀
김구의 요청을 장제스가 실행? NO!
장제스는 전후 한반도 재점령을 요구했다
루즈벨트, 이승만에게 직접 '답장' 보내
인보길 기자
카이로회담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 부인 송미령.(왼쪽부터). 영어 잘하는 미인 송미령은 국제외교에서 남편 대역을 많이 했다.(자료사진)
▲ 카이로회담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 부인 송미령.(왼쪽부터). 영어 잘하는 미인 송미령은 국제외교에서 남편 대역을 많이 했다.(자료사진)
왜? 유독 한국만 콕 찍어 '독립 보장'하였는가?
강대국 국제회담에서 세계 3거두가 ‘한국 독립’을 최초로 공개 선언 보장한 카이로회담, 한국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943년 11월22일부터 26일까지 카이로 근교 메나 하우스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중국 장제스가 비밀회의를 열고 일본 패망 후 영토처리를 논의한 합의문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을 12월2일 발표하자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환호하면서 분노하였다.
환호는 ‘한국 독립’이 보장되었다는 기쁨 때문이오, 분노는 ‘적당한 시기’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정식 의제도 아니었던 ‘한국 독립’이 명문화되고 문제의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가 삽입된 과정과 배후의 흑막을 들여다보자.
「...위의 3대국은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 영어원문은 아래와 같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먼저 ‘환호’쪽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중경의 임정 김구는 신문보도로 ‘기쁜 뉴스’를 보자 회의를 중단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즉시 등사판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호외를 쩍어 동포에게 돌리고 카이로선언 축하 집회를 열자고 서둘렀다.
김구는 자신과 임정간부들이 7월26일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을 직접 만났을 때 “임정을 승인해주고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장제스가 넉달 뒤 11월 카이로회담에 가서 반영해주었다고 판단해 의기양양해졌던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지금에도 일부 국내 학자들은 김구와 같은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이 그 증거로 제시하는 자료 중에 장제스가 카이로회담 중에 쓴 일기에 ‘한국 독립’ 네 글자 메모가 적혀있고, 국민당 비서장 왕총혜(王寵惠)가 정리한 회담 요지 10개항 중에 ‘장 총통은 한국에 독립을 부여할 필요성 강조했다’란 기록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참 단순한 사람들이다. 카이로 회담을 첨부터 추진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록은 쳐다보지도 않는가?
더구나 장제스는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15일, 김구가 “이제라도 임정을 승인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끝내 거부한 사람이다.
루즈벨트의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the most trusted advisor)로 유명한 해리 홉킨스(오른쪽).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대화하는 모습.(자료사진)
▲ 루즈벨트의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the most trusted advisor)로 유명한 해리 홉킨스(오른쪽).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대화하는 모습.(자료사진)
◆루즈벨트, 2월부터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방송
1943년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9개월 전, 미국대통령 F. 루즈벨트는 2월23일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 탄생일을 기념하여 전국중계 라디오 연설을 했다. 미일전쟁 설명 중 “일본의 가혹한 압제에 한국 국민이 당하는 노예상태”를 적시하며 처음 ‘한국’을 공개거론,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남다른 동정심을 드러내 전후처리 구상의 일단을 밝힌 것이었다..
12월 발표된 카이로선언에 명문화된 그 말 ‘한국인민의 노예상태“(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라는 구절이 그때 이미 루즈벨트의 두뇌 메모리에 저장되어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방송을 듣던 이승만은 만세를 불렀다. 그토록 ‘임정 승인-무기지원’을 갈구해도 국무부는 외면하는데 뜻밖에 대통령의 입에서 ‘가혹한 압제를 당하는 한국인“이란 말이 공개방송으로 나오다니...!
2년전 이승만이 자신의 저서 [JAPAN INSIDE OUT]를 보내고 ’한인자유부대 편성‘ 계획서도 보내고 편지도 보냈던 루즈벨트, 그가 그것들을 다 읽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이승만은 눈앞에 검은 장막이 걷히는 듯 환하게 밝아졌다. 그때 이승만이 무엇을 했는지 기록은 없다.
나흘 뒤 2월 27일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호텔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개회사를 시작한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부터 했다.
”오랜 기간 미국 관리들의 연설 가운데 미국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처음 ’한국‘이 언급된 연설이며, 우리에게는 가장 고무적인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미협회 이사장 해리스 목사, 변호사 스태거스, 언론인 윌리암스의 연명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장문의 친서를 보냈다. 한국 독립과 관련된 조치들, 임정 스인과 무기대여법에 따른 한인부대 창설문제다.
”...지금이야 말로 미국이 지난 38년동안 한국민에 대하여 저지른 잘못과 부정의를 시정할 때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중략)....진주만 사건 이후 우리는 미국무부를 향해 역사상 가장 오래 존석한 망명정부인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우리가 받은 대답은 아주 대수롭지 않은 변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소련이 종전후 한국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할 것이라는 보고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가 근거없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는 40년 전에 미국이 우려했던 러시아의 극동진출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실해야 할 것입니다.
대일전쟁에 박차를 가하고 나아가 태평양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간청하는 바,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우리의 공동의 적 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들의 몫을 감당함으로써 미국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수 있도록 원조와 격려를 베풀어 주기시를 바랍니다.“
이승만은 이 서한을 비서 임병직이 들고 백악관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오랜 측근실세 홉킨스(Harry L. Hopkins)에게 직접 전달하여 접수시켰다.
미극대통령 F.루즈벨트와 독립운동가 이승만.ⓒ뉴데일리DB
▲ 미극대통령 F.루즈벨트와 독립운동가 이승만.ⓒ뉴데일리DB
◆루즈벨트, 이승만 편지에 직접 ’답장‘ 보내다
놀랍게도 루즈벨트와 홉킨스는 5월26일 의미심장한 ’접수 통보‘를 보내왔다.
루즈벨트가 비서실장 왓슨(Edwin M. Watson) 소장의 명의로 이승만에게 보낸 메시지 내용은 이렇다.
”친애하는 이 박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나는 귀하의 서한을 잘 접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서한이 ’섬세한 주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섬세한 주의‘를 받았다는 말—-어찌 이번 서한만이랴, 그동안 루즈벨트와 홉킨스는 이승만이 보낸 책이나 여러 서한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말이 나올 것인가. 이승만이 제기하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오랜 검토 끝에 생긴 결심이 있기에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공식문서로써 이승만에게 알려주는 말이었다.
이로써 카이로 선언문의 ’한국독립‘ 문구는 이때 이미 정해진 바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연구의 선구 유역익 교수도 이승만의 고품격 편지가 루즈벨트와 홉킨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조항을 넣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평가한다.(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이승만은 두 차례 더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낸다. 8월29일 캐나다 퀘벡에서 루즈벨트가 처칠을 불러 회담할 때, 전후처리 문제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한미협회의 해리스 목사에 이어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무어(John Z. Moore) 목사로 하여금 서한을 보내도록 했다.
이처럼 유력한 목사들을 동원하는 이유는 루즈벨트와 홉킨스가 대통령과 특별보좌관이란 관계를 넘어 기독교 신앙으로 뭉쳐진 동지임을 이승만이 알기 때문이다.
3국 수뇌가 회담한 카이로 근교의 메나 하우스. ⓒ조선일보DB
▲ 3국 수뇌가 회담한 카이로 근교의 메나 하우스. ⓒ조선일보DB
◆루즈벨트 ”장제스는 한반도 재점령을 원한다“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11월22일부터 26일까지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가 회담을 시작한다.
워낙 장제스는 소련 스탈린이 반대하여 제외시켰는데 스탈린이 불참하겠다하여 다시 부른 사람이다. 스탈린은 이란 테헤란에서 중국 장제스 없이 3국만 만나기로 했다.
처음부터 한국독립문제가 카이로 회담의 정식 의제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1월 카사블랑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독일-일본 이탈리아 추축국엔 타협 없는 전면전과 무조건 항복“에 합의한 뒤, 루즈벨트는 전후 외교정책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 on Post-War Foreign Policy)를 구성, 무기대여법 등으로 강화된 미국의 국제적 주도권을 확립할 전후구상을 설계한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 ’국제신탁통치제도‘이다. 여기서 작성된 ’한국 독립문제‘ 보고서에 ’신탁통치‘가 들어갔다.
이 방침을 루즈벨트가 중국 장제스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방미하였을 때 처음 알려주었다. 이를 송미령이 장제스에게 전한 것이 6월26일이다. (일본 산케이신문사 [장개석 총통-14-일본항복] 1977. 손세일 앞의 책)
이런 상황에서 7월26일 장제스는 김구 일행과 면담한 것이었다. 그것은 윤봉길 의거후 남경에서 만난 이래 11년 만이다. 조소앙은 뉴스에서 본 ’신탁통치‘에 관해 질문하며 한국 독립주장이 관철되도록 중국이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영국과 미국에서 논의하는 문제“라고 신탁통치에 대한 대답을 피하면서 ”한국진영 내부의 단결을 되풀이 강조“하였다고 중국측 기록에 보인다.
임정 기록은 임시정부 승인, 광복군 행동준승 개정, 경제상 원조를 요구하였다고 써있다.
그러니까, 이날 만남에서 장제스는 ’한국 독립문제‘에 확언을 안했고, 임정 측은 카이로회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을 요구한 것이 없는 셈이다.
★루즈벨트, 장제스와 처음 대면...”중국의 광범한 야욕“에 충격
장세스를 처음 만나는 루즈벨트는 단독대화의 시간을 마련한다.
카이로회담 다음날 저녁 7시30분터 11시까지 장시간 진행된 만찬에서 교환된 의견들은 중국측이 나중에 정리한 내용 뿐, 미국측은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뒷날 해제된 미국무부 극비문서(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엔 놀라운 대화내용이 드러난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는데 토의 내용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말했다. 중국은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한 야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It seemed that the Generalissimo had been well satisfied with the discussion held the previous day. There was no doubt that China had wide aspirations which included the re-occupation of Manchuria and Korea.(미국무성 비밀해제극비문서: The First Cairo Conference, p334. 정일화 [카이로 선언] 선한약속, 2010).)
중국측 기록엔 없는 내용이다.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인정‘한다면서 그것은 일본을 물러가면 만주도 되찾고 청일전쟁때 잃어버린 한반도를 되찾겠다는 의도를 루즈벨트에게 드러낸 ’광범한 야욕‘인 것으로 해석된다는 말이다. 미국무부의 공식기록이다.
이 문서엔 장제스가 경제안정문제, 주중 미군 유지비, 일본점령 도서 처리, 만주 대련항의 국제화, 청도의 비행장건설, 무기대여법 등이 토의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하나의 기록은 다음날 24일 루즈벨트가 처칠과 미영회담을 열었을 때의 발언이다. 즉, 장제스의 태도와 발언이 한국의 진정한 독립을 지지하기보다는 한국을 중국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면서 루즈벨트는 ”한반도와 만주전체를 재점령(re-occupation)하려한다“고 반복 발언하고 있다.
중국의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워싱턴 독립운동 지도자 이승만.ⓒ뉴데일리DB.
▲ 중국의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워싱턴 독립운동 지도자 이승만.ⓒ뉴데일리DB.
◆세번 고친 ‘in due course’...김구의 격분과 이승만의 전략
카이로 선언문은 해리 홉킨스 단독 작품이다. 3국간 공동선언문 기초 팀도 없었다.
루즈벨트가 지시하고 홉킨스가 혼자 썼다. 그것은 루즈벨트의 회담결과 처칠과 장제스의 내심이 루즈벨트의 ‘새로운 세계평화질서 구축의 철학’과 너무나 동떨어져 교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칠은 영국 식민지 독립을 우려하여 어떠한 ‘독립 명문화’도 싫어하였고, 장제스가 ‘광범한’ 영토야욕을 드러내지 않는가. 공동성명 공동작성은 포기해버렸다.
기억력이 좋기로 정평이 난 홉킨스는 아무런 메모도 없이 코넬리우스(Albert M.Cornelous) 준위에게 선언문 초안을 금방 구술하여 금방 타이핑을 끝냈다. 그리고 곧 루즈벨트에게 제출한다. 그 초안의 ‘한국독립’ 부분을 홉킨스는 이렇게 만들었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de that that country,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초안에 필자가 밑줄 친 부분의 의미와 뉴앙스가 너무 다르다. 일본에 의한 배신적 노예상태란 표현, 그리고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해방 독립시킨다는 적극적 표현은 그때까지 루즈벨트와 홉킨스의 머리에 준비된 생각이므로 줄줄 흘러나왔던 것이다.
‘treacherous’나 ‘enslavement’ 같은 용어는 국제정치문서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 종교적 언어로서, 전체주의 만행에 대한 신앙인 홉킨스의 인식체계를 말해주는 표현이며, 이승만이 ‘미국의 배신’을 거론하며 기독교적 도덕성 회복을 미국에게 환기시키는 그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초안을 한참 들여다 본 루즈벨트는 직접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를 ‘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하였다. ‘가장 빠른 시기’가 ‘적절한 시기’로 한참 뒷걸음질 쳤다.
3개국 실무자 회의는 예상대로 갈등을 거듭했다. 미국의 홉킨스와 주소련 대사 해리먼, 중국의 왕총혜, 영국 대표 이든(Eden)과 캐도건 사이의 말씨름은 마지막 날 오후까지 꽉 막혔다. 심지어 영국 대표는 ”한국 독립관련 조항 전체를 아예 삭제하자“고 덤볐다. 영국식민지들에 미칠 영향 때문에 ‘독립’이란 단어조차 없애자는 것이다.
폐막이 다가오자 영국 처칠 수상이 자신의 수정안을 내놓았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유명한 ‘in due course’가 등장하였다.
홉킨스 초안에서 일본 국명 Japan 두 개가 삭제되고, 루즈벨트가 고친 ‘at the proper moment’ 대신에 처칠이 ‘in due course’로 고친 것, ‘적당한 절차를 거쳐’ 또는 ‘적당한 시기에’ 등으로 풀이되는 이 어구(語句)로 뒤바뀐 선언문은 11월27일 3거두가 서명하고, 그길로 이란 테헤란에 달려가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12월2일 발표되었다.
홉킨스가 원했던 ‘한국의 가장 빠른 독립’의 꿈도 사라지고, ‘코걸이 귀걸이’로 모호하고 불투명한 카이로 선언의 ‘in due course’는 즉시 ‘신탁통치의 불‘을 지른다.
◉장제스는 선언문에서 ’한반도를 빼고‘ 얻을 것을 다 얻었다. 청일전쟁때부터 일본에 빼앗겼던 대만, 만주, 팽호도 등을 반환받는다는 보장이 명문화 된 것이다. <선언 전문은 하단에>
★김구의 격분=카이로선언 축하 집회를 서두르던 김구는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란
말이 신탁통치로 보여진다는 문제제기에 접하자 금방 분노하였다. 김구는 영어를 몰랐다.
”독립을 보장한다는 선언을 듣고 나의 유쾌함은 형언할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던 김구는 한국독립당 대표와 조선혁명당 대표를 미국 대사관에 보내 어구해석을 요구했다.
시원한 대답은 없고 분통 터지는 신문보도만 나온다. 로이터통신 기자는 「조선이 노예생활 50년이므로 자유를 학습하는 시기를 거쳐야 할 것이며, 중국이 다시 조선의 종주국이 되는 것을 응낙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김구는 취재하러 온 AP통신 기자에게 울분을 토한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통치할 능력을 가졌으며 다른 족속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고 노예로 삼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일본이 붕괴되는 그때에 독립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격정을 토로하는 김구는 과연 급변하는 새로운 국제정세를 알고나 있었는가?
로이터 통신 기자가 ’중국이 또다시 조선의 종주국이 될 것‘이란 기사를 왜 썼는지 짐작이나 하겠는가? 분노만으론 아무 소용이 없다.
김구 자신이나 임시정부 자체가 이미 ’다른 족속’ 중국 장제스의 통치와 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아니한가? 장제스가 왜 우리 임시정부에 거금을 투자하고 광복군을 틀어쥐겠는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장제스가 전후 한반도에 ‘친중정권-친중국가’를 세우려는 포석임은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런 추리 아니겠는가?
★장세스의 계산=장제스는 카이로에서 ”중국군의 한반도 점령“을 꺼냈다가 루즈벨트가 소련의 대일참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신탁통치’ 참여를 제안하자 물러섰다. 그래서 소련군이 먼저 ‘일본땅 한반도’에 진군하면 중국군이 배제될까봐 신탁통치에 동의하였고, 루즈벨트가 패전후 일본영토 점령을 논의하자 ‘일본영토 한반도 점령’을 생각하며 신탁통치 일원으로 참여하기로 말한다.처칠도 장제스를 경계하였다. 일본이 물러가면 버마, 싱가포르, 말레이 같은 영국식민지를 장제스가 중국에 편입하려 한다고 경계하였다. (정일화, 앞의 책)
장제스는 그동안 김구가 ‘임정 승인’을 요청할 때 울물쭈물 했으며, 해방 날 8월15일 임시정부가 정부 승인과 중국군내 한인병사의 인수, 교민 보호와 귀국 알선, 경비 원조 등 6개항 요구에 대해서도 묵묵부답 하였다. 해방 한달 뒤 9월26일 ”임정을 승인 못하겠으면 비공식 과도정권으로라도 인정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김구의 간청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외면당했다. (선우진 ‘전환기의 내막-임시정부 귀국’, 조선일보, 1982)
오하이오주 애쉴랜드에서 임시정부 승인대회를 개최한 한미협회 지도부. 왼쪽부터 이승만, 한미협회 애쉴랜드 지회장 마이어스의 부인. 변호사 스태거스. 아메리칸 대학 총장 더글러스, 고종의 특사였던 홈버 헐버트, INS통신사주 윌리엄스.
▲ 오하이오주 애쉴랜드에서 임시정부 승인대회를 개최한 한미협회 지도부. 왼쪽부터 이승만, 한미협회 애쉴랜드 지회장 마이어스의 부인. 변호사 스태거스. 아메리칸 대학 총장 더글러스, 고종의 특사였던 홈버 헐버트, INS통신사주 윌리엄스.
◆ 이승만의 새로운 전략 ”우리 하기에 달렸다“
카이로 회담 이전에 벌써 루즈벨트의 전후처리 구상 ‘신탁통치’가 여기저기 보도되었다.
분노한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통신, 1943.11.18>에 ”모든 애국동포는 이 망언망설을 고치도록 항의편지를 보내자“고 주먹을 쥐었다.
”반만년 금수강산을 잃은 것이 우리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요, 임금과 부패한 정부가 타국의 약조를 의뢰하다가 왜적의 간교수단에 빠져서 싸움도 할 여지가 없이 만들어 놓아, 전국이 눈 뜨고 도적맞은 것이요. 이때까지 참고 온 것은 미일전쟁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지 나의 노예라도 되어서 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미일전쟁이 왔은 즉 왜적은 결단나고야 말 터이니, 우리가 많은 피를 흘려서라도 완전독립을 회복하여 남의 보호나 지도를 의뢰하야 살려는 민족이 아닌 것을 세상에 표명하자.“
★위기마다 좌절보다 ‘희망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정치가 이승만
신탁통치설이 나돌 때부터 반대 캠페인을 벌이던 이승만은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침묵모드로 돌아섰다. 그리고 금방 밝은 표정이 되어 일어나 미정보국의 단파방송을 시작하였다.
”우리 삼천만 동포에게 나 이승만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기쁜 소식은 카이로회담의 결과입니다. 대한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다 하였으니 이는 3천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선언은 다만 우리의 길을 열었으니 앞길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국제정치 외교의 달인, 영어의 고수 이승만이 카이로선언문의 ’in due course(적당한 시기)‘를 왜 모르랴. 그 ’적당한 시기‘도 이제부터 우리의 책임이 되었다며 독립운동의 ’단결‘에 초점을 맞춘다. 그 시기의 짧고 긴 것이 ’우리 하기 나름‘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제 합동하야 외국에게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상당한 시기를 따라서‘ 독립을 얻게 한다는 구절이 심히 불만족하므로 우리 정부에서도 이미 선언하였나니......우리는 우리의 닫힌 길을 열어주는 것만 다행이라 할지니, 열린 길로 나아가 싸워서 독립을 찾고 못 찾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라. 누가 돕고 아니 돕는 것을 어찌 의뢰하리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20대 청년시절 서울거리 ’만민공동회‘ 투쟁 때 외쳤던 이승만은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합을 위한 한민족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대회 이름도 ’승인대회‘(Recognition Conference)로 부르기로 정하고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서신을 띄운다.
”카이로 선언은 어떤 강국도 한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지 못하도록 연합국이 보장해 놓은 것.....과거의 폐습을 고치지 않다가 연합국이 주는 ’금 같은 기회‘을 잃고 보면 동포들이 우리를 무엇이라 하겠느뇨. 지난 문제가 있었을 지라도 다 용서하야 잊어버리고, 카이로 대회가 주는 새 기회를 이용할만한 전 한족의 새 방침을 정하기로 주장하자.
우리가 아직 잃은 강토만 못 찾았지 독립은 찾아놓은 민족이니, 우리 한인의 쾌활한 자유 기상과 열렬한 애국심을 드러냅시다!“
오하이오주 애쉴런드에서 1944년 1월21일부터 23일까지 미국인들이 주동이 되어 개최한 ’한인승인대회‘는 미국 전역 114개 라디오 방송국에서 중계하였다.
”여러분은 제가 미국은 언제나 위기에서 그 영혼을 찾는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정화(淨化)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이 축복받은 땅에서 재생을 느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세계의 도덕적 사상과 정의의 지도자이를 기대합니다. 한때, 오래 전에, 여러분은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고 우리를 여라나라들과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주었습니다. 그때와 같은 손을 지금, 우리의 손이 여러분에게 뻗쳐뎌 있을 때에, 부디 뿌리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손세일, 앞의 책)
청도교가 세운 나라 미국의 청중들을 의식한 이승만의 신앙 깊은 연설은 미국을 독립시킨 청도교정신의 사명감을 불러오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미국독립 쟁취의 자유투사 정신으로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도 정화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이다.
▶카이로 선언 全文◀
「각국 군사사절단은 몇 차례 회의 결과 일본군에 대한 장래의 군사작전에 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3대 연합국은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해상, 육상 공중 공격을 통하여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압력은 이미 증대되고 있다.
3대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징벌하기 위하여 현재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위 연합국은 자국을 위하여 이득을 요구하지 않으며, 또한 영토 확장의 의도도 없다. 위 연합국의 목적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일본이 탈취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일본으로부터 박탈하고, 아울어 만주, 대만, 팽호동와 같은 일본이 중국인들로부터 도취한 모든 영토를 중화민국에 반환하는데 있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모든 영토로부터 축축될 것이다. 위의 3대국은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위의 3대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연합국들과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는 데 필요한 엄중하고도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Final Text of the Communique’ FRUS, Conferences at Cairo and Teheran 1943. 정일화 [카이로선언] 앞의 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