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3~24)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의미는 시간이 한 참 흐른 다음에 비로소 이해됩니다. 예전 누이 무덤에서 울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를 물었다면, 지금은 누이의 죽음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의 방향이 변했습니다. 그 까닭은, 누이가 죽을 당시에 저는 주님을 알지 못했기에 누이의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지금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라는 주님 말씀의 핵심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서, 누이의 죽임이 새로운 의미로 제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고, 부활을 향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17,1) 주님의 기도에 의하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부의 영광이 드러나는 동시에 성부께서는 성자의 영광도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똑같은 뜻이 표명되어 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3~24)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십자가상의 죽음이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大死一番(대사일번)이면 絶後蘇生(절후소생)이란 표현처럼 큰 죽음大死과 큰 삶大活의 경우와 똑같이, 죽음과 부활은 즉卽, 바로 그것으로 직결되어 있기에, 십자가 즉 부활, 부활 즉 십자가, 십자가는 바로 부활이요, 부활은 바로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싹터 나오는 모든 생명을 한번 눈여겨보면,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우리 마음을 노상 에워싸는 근심 걱정도 잊게 될 것이다. (....) 참으로 생명은 죽음에서 나오며, 부활은 하나의 전면적 파괴인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찬란한 빛을 발산한다.』(카를로 카레토의 ‘도시의 광야’에서)
부활(=부활체험)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평신도, 수도자 그리고 사제로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비움의 삶, 낮아짐의 삶, 자기 죽음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도자의 삶을 저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그 까닭이란 부활을 살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죽이는 삶(=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살기 위해)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라고 말씀하신 의도가 바로 자기 집착에서 이탈의 비움의 삶을 살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처럼 아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타자를 위해 죽지 못하는 우리의 삶과 신앙이, 삶 안에서 부활을 위한 죽음을 살지 못하는 이유라고 느낍니다. 썩어 없어진 밀알은 결코 그 모습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지만, 그 밀알은 새 생명을 알리는 표징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또한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시며,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2코9,7.8참조)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기 비움과 죽음을 살 때 새 생명의 기쁨 또한 더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12,26)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당신처럼 또 하나의 죽은 밀알의 삶을 산 사람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신 것처럼 그를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줄 것이며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의 실현을 우리는 오늘 기억하고 기념하는 라우레시오 부제를 통해서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순교자는 새 세상, 새 역사를 열어주는 표징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밀알의 죽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밀알이 지금은 누구일까요?
이처럼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자기 몸에, 자기 인생에 부활 사건이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자기 삶 안에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단지 생의 끝에 오는 사건만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며, 매번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매번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 거짓된 삶을 위해 죽음을 거부하는 욕심은 매 순간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매번 죽지 못한 사람은 참사람의 참삶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능동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의 행위가 곧 진리를 깨달은 존재의 자유의 행위이며 부활을 향한 투신이라고 오늘 성 라우렌시오 순교자를 통해서 생각해 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와 함께 기도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순교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라우렌시오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면서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고백하자, 그를 불살라 처형하였는데, 그 고통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고 말하면서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임을 성 라우렌시오는 본을 보여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