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꽃다지 기획실-꽃다지에서 민중가요의 흐름을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정리한 글입니다.
[출전]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창간호
70년대 후반 민중가요의 성립
(1) 민중가요문화성립의 배경: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면
서, 그 이전까지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학생운동의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었으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
다. 따라서 운동권의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
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대학 4년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
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은 대중가요의 향유를 거
부하고,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
으며, 이전까지의 자신들의 노래문화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
하게 되었고, 이는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민중가요의 시작
민중가요는 처음에는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되었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향유층과 별도의 존재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이 시기부터 성립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중가요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이러한 민
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이었을 따름이었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
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포크풍 대중가요성향을 띈 취미써클
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에 있
는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그 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
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3)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래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정의가>, <탄아 탄
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등에 75년 이후 <훌라
송>, <정의가> 등이 운동권 노래로 덧붙여졌다.
한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회운
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교회운동의 발달을
통하여 기존의 복음성가나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과 관련한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당
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운동권에 유입된 노래로는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보람된 생활>, <이
세계 절반은 나>, <가라 모세>,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혼
자 소리로는>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래에서 열거한 대개의 노래들은 얽매
임과 해방, 구원의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재해석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
이 어그러지는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로의 지향
과 의지를 담고 있다.
(4)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김민기의 노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방송금지조치로
인하여 대중가요로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운동권
학생들은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고, 김민기의 노래들 중 사회성
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 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또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예를 들어, <친구>나 <아침이슬>등은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결단 등으로 재해석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당시의 김민기 노래
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들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
이 될 근거가 되었다.
김민기는 70년대 후반에 군을 제대하고 야학을 체험하면서유신말기에
들어 작품의 경향이 변화하게 된다. 우선, 작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
고,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대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농민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
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밝은 지
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났다. 이런 노래들로는
<식구생각>, <소금땀 흘리흘리>,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늙은
군인의 노래>등이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김민기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민
기의 민중지향성의 최고수준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
빛>(78년)이다. 동일방직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이 작품은 민족극운
동의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나 민중가요에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은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뮤지컬
같은 작품으로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있으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5)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하
게 된 민족극운동은, 공연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예술운동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도 연극이라는 장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
가무(樂歌舞)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특성 등으
로 인해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를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
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에서도 적잖은 작품적 성과
를 남겼다. 이종구의 <마라데스>(<소리굿 아구> 삽입음악), <빈산>(김지하
시),김구한의 <서울길> (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 <개구리 소리>(이오덕 시) 등을 그 성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
되고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 <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 등), 한
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그송들 (<행복의 나라로>,
<서울하늘>, <타박네>, <한중가>등)과, 그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
기>, 동요인<우리의 소원은 통일>, 60년대 대중가요인 <아다다>, 민요인
<아리랑>, <진주난봉가> 등까지도 이 시기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 있었
다.
민중가요의 흐름 - 최종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5)
- 80년대말 90년대 초 대학과 대중문화공간 속의 민중가요
(1) 대중문화공간
① 노래를 찾는 사람들
84년 노래모임 새벽에 의해 민중가요의 첫번째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
들'이 대중문화공간의 미조직 대중들에게 발표되었다. 허나, 처음에는 노
래팀으로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생기거나 대중문화공간에
서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의 음반취입이었을 뿐이었
다. 이때는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 레퍼터리는 <그루터기>,<바람 씽씽>,<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주로
70년대 서울대 메아리의 창작곡이 중심이 되었다.이 음반은 우연히 제작
된 것이었으나, 민중가요 음반으로는 최초의 합법 음반이라는 의의를 가지
고 있었다.
그러다가 87년 10월 첫 공연을 치루면서 노래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87년 6월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공연이 가능하리
라는 판단을 하고, 새벽을 중심으로 한 노래운동권의 선배급들이 모여 대
중문화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새
벽에서 의도적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팀을 만들어 분리시켰다.
따라서 노찾사라는 팀은 자신들 스스로가 결성한 팀이 아니라 민중가요의
대중문화공간으로 진출을 위해 조직적으로 결성된 팀이라 할 수 있다.
새벽으로부터 분리되어 결성된 노찾사는 민중가요 중 대중문화공간으로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다시 편곡,연주했다. 그들의 레퍼터리는
<솔아 푸르른 솔아>,<광야에서>,<잠들지 않는 남도>,<그날이 오면> 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과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중요한 작품경향에서는 조금 벗어나있어 널리 알려지지 않았
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는 좋은노래들이었던 메아리, 한소리 등의 창작
곡 <오월의 노래>,<부서지지 않으리>,<맹인부부가수> 등과 새벽의 <사
계>,<귀례 이야기>,<대결>,<이 산하에>,<마른잎 다시 살아나> 등 기존 발
표곡과 <저 평등의 땅에>,<뒤돌아보아도> 등의 신곡, 그리고 그외 <녹두
꽃>,<진달래>,<작업장>,<오월 이야기>,<제발 제발> 등이 있다. 이들 노래
는 노찾사로 인해 인기를 모으면서 민중가요의 풍부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같은 새로운 인기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노
찾사는 1년여 이상의 공연이 성공을 했고, 89년 2집 음반이 50만장 이상
판매되고 대중가요 인기챠트에도 7위권 안에 들었다.
이렇듯 노찾사는 그 생성과정이나 활동과정을 볼 때,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에 발표하여 공식화시키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민중가요
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노찾사에게는 10년의 민중가요가 쌓아온 성과, 거기 담겨있는 대
학생, 노동자 등의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 질감 등을 대
중문화의공간에서 미조직 중간계급 대중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만들어내
면서도 또한 노찾사 자신이 그 진보성과 인식, 정서, 질감 등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과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업이 대체로 성공적이거나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
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특성, 기교주의, 감성주의, 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
극적인 분위기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노찾사는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지긴 하였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노찾사 자신이 창작한 신
곡 중심(<그리운 이름>,<사랑노래>,<영원한 노동자> 등)으로 공연이 운영
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
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서의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공연의 질감이 숭고미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② 노래마을
노래마을은 대중가요 작곡가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84
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 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
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
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래마을은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에서 소홀히 했던 어린이들의 노
래, 80년대말 민중가요의 인기곡 등(<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한 줌
햇볕이 될 수 있다면>,<아기 염소>,<백두산>,<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
을 레퍼터리로 삼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의
응축성과 긴장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3화음의 안정감과 깨끗
한 아름다움이 나름의 호소력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수 정예식의
운영방식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
③ 개인 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놓은 공
간 주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에 진보진영이 나름의 영역을 확보
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졌던 신형원, 그 작
곡자인 한돌, 서유석, 김광석 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 색깔을 가지게 되었
고 [겨레의 노래] 같은 행사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 노래운동권 출신의 개인가수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안치환, 정세
현, 권진원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자연히 노래운동권으로부
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제 자리를 못 찾은 듯 하다.
또한 인기가수급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
한 정태춘이 있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한 예술인이(또는 한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우이다(정태춘은 89년 가을 <누
렁 송아지>의 전국순회공연을 계기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아,대한민국>,<배반의 병아리>,<우리들 세
상>,<일어나라 열사여> 등이 있다.
(2) 노래모임 새벽의 변화
87년까지 <이 산하에>,<그날이 오면>,<벗이여 해방이 온다>,<만주출정
가>,<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창작과 비해법 테이프 제작으로 민중가요 흐
름에 발맞춰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의 합창>,<내일의 노래> 등으로
노동자 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노래모임 새벽의 흐름이
88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다. <너를 위하여>,<선언 1,2>,
<오월의 노래 3>,<노동자의 노래>,<불꽃이 되어>(이상 88년),<철의 기
지>(89년),<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 등의 노래를 보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 유럽 혁명가의 질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느낌이며, 가사 역시 김
정환의 모더니스틱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노래들은 군가풍 행진곡, 단조 스탠다드, 포크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민중가요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노래들은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의의는 가지고 있으되, 현실적인
노동자 대중, 학생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
은 단지 따라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며,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의 인식과 정서, 질감이 획득되지 않고, 먼
나라 노동자의 느낌,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
관적 지향 만이 두드러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새벽은 유일한 노래운동집단으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87년 이후
노동가요의 창작, 보급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 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수요-공급의 지독한 불균형을 겪으면서 거의 완전
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후 90년경 까지 김호철 한 사람에게만 노동가
요의 창작을 맡겨야 하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90년 들어서면서 노동가요의 경향이 완전히 정착하고, 자신들의 창작곡
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대폭 받아
들인 <해방을 향한 진군>,<다시 또 다시> 등을 창작하며 방향전환의 조짐
이 보였으나, 곧 <바리케이트를 치며>,<노동자 전진이다> 등 더더욱 독일
적이고 러시아적인 작품들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 고급 음악인들의 변화와 조직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노래운동이 처음
시작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서울대 작곡과의 이건
용, 이강숙 교수였는데, 이들은 기존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있
고, 또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가, 평론가
들이었다.
한편 전통 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
은 편이었다. '해오름','다스름' 등이 결성되어 기성국악계(역시 고급음악
계)를 겨냥한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
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이전
의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의 성과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조금 우려스럽기도 하다.
(4)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노래운동 집단이 생겨나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활동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비해서는 양적 역량이 떨
어지고, 또 지역 간 편차도 많은 실정이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
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
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곡으로는 소리새벽 김봉철의 <들어나 봤나>
새힘 이건의 <달동네 부푼 꿈>, 희망새 김민하의 <아침은 빛나라> 등이 많
이 알려져 있다.
특히 광주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 연구회'의 성과는 상당히 독특한
데,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중
적으로도 호응을 얻고 있다.
(5) 대학의 민중가요
전반적으로 86년, 87년의 덜 긴장되고 편안한 노래의 흐름이 연장되고
있다. <마른잎 다시 살아나>,<잠들지 않는 남도> 등 노래모임 새벽, 안치
환의 노래가 인기를 모았으며, 노찾사의 활동을 계기로 대중화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89년 경부터는 노동가요가 대학가로 역류하는 현상이 벌어져서,
주요 노동가요가 대학 민중가요의 최고의 유행곡이 되기도 했다.
그와 함께 대학가 인기 창작자로서 윤민석과 박종화가 떠오르는데, 윤민
석은 팝발라드 세대의 화려한 선율과 안정된 화성, 격정적이면서도 80년대
초중반과 같은 음울함이 느껴지지 않는 <반미출정가 1>,<어머니>,<전대협
진군가>,<결전가>,<백두산>,<애국의 길>,<전사의 맹세 1,2> 등의 많은 노
래를 지었고, 박종화는 가사에서 풍기는 솔직하고 질박한 열정, 열정적 학
생운동의 분위기가 주는 감동으로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지리산 2>,<바쳐
야 한다>,<파랑새>,<투쟁의 한길로> 등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