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여 '기청제'를 올리리까
장맛비가... / 조명래
연일 불편한 하늘 심기
심상찮게 폭우 수삼 일
장맛비에 울컥이는 땅
삽시간에 봇물로 터져
토사를 뒤집어 쓴 개천
마구 흉금을 토하는 게
차마 꺾을 수 없는 듯이
콸콸 차고 넘치는 빗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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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앞뒤 분별 못 하는 정치권 속물들의 판박이처럼 마구 흉금을 토하고 있으니 토사를 뒤집어 쓴 개천이 장대비에 허걱이는 파동을 차마 꺾을 수 없는 갈등의 멍울로 우리네 삶의 긴장을 부풀린다.
매몰차게 쏟아지는 장맛비를 보면 콸콸 차고 넘치는 줄도 모르고 밤낮도 잊은 거칠고 막가는 몰염치의 정치권 시류의 단면같지만, 장맛비 속에서도 초연한 산자락에 다소곳 핀 나리꽃 홀로 고상한 운율에 밤새 앓음조차 잊고 빗물을 머금고 있는게 우리네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다.
○ 기청제(祈請祭)라...
비를 바라는 것은 기우제(祈雨祭)이고,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것은 기청제(祈請祭)이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제와 반대로 기청제도 지냈다.
한달 이상 계속되는 장맛비와 폭우를 그치게 하고 백성들이 평안하도록 기원하며 올리는 게 '기청제'다.
장맛비와 폭우가 계속되어 흉년이 예상될 때에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4문, 곧 숭례문(崇禮門),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숙정문(肅靖門)과 지방의 성문에서 기청제(祈晴祭)를 거행 했다.
국장(國葬) 등의 특별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종묘와 사직에서 날씨가 맑기를 빌기도 하였지만 수재(水災)를 당했을 때에도 이를 기양(祈禳 재앙을 쫓고 복을 기원함)하기 위해서 기청제를 거행하였다.
기청제는 원래 재앙을 막는다고 하여 영제(?祭)라고 하였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문을 통해 출입 왕래하며 문에서 외부의 적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성문에서 재앙을 막는 기청제를 지낸 것이다.
계속 비가 내리면 국가에서 기청제를 지냈지만 이것이 농경과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가뭄을 두려워하여 주로 입추(立秋) 이후에 많이 거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기청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보이는데 조선시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한성부에서는 사대문에서 지방에서는 성문에서 기청제를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문안에서 기청제를 지냈으나 동문(同門 흥인지문)이 물에 침수된 이후로는 문루에서 거행하였다.
기청제는 비를 조절한다는 동서남북 각 방위의 산천신(山川神)에게 지냈는데 기청제는 사흘 동안 지냈으며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3차에 걸쳐 다시 행하고 최종적으로는 왕이 직접 종묘나 사직에 나가 기청제를 지내기도 했다.
제사 의식은 청행사(請行事), 헌관사배(獻官四拜), 분향(焚香:三上香), 헌작(獻爵), 독축(讀祝), 철변두(徹?豆), 헌관사배(獻官四拜), 예필(禮畢), 예감(?坎)의 순서로 진행하였다.
물과 관련된 조선시대 국가제례로서 정기적으로 상제(上帝)를 대상으로 한 기우제에 비해 기청제는 수재(水災)때에만 산천신을 대상으로 한 비정기적인 제사였다.
그래서 기청제는 작은 제사(小祀)로 간주되었고 또한 제의 절차가 단순하여 시행의 건수도 적었지만 농경을 기반으로 하였던 조선시대에서 수재에 대처하여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던 세시의례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옛말에 물을 헛되이 쓰는자 저승에 가면 자신이 버린물을 모두 먹어야 한다 했다. 그만큼 물은 소중히 절약하고 아껴쓰라는 말이다.
기름보다 비싼 물 이 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운예지망(雲霓之望)이란 말이 있다.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듯 그 희망이 간절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수삼 일간 장맛비에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대비를 잘하시어 폭우로 인한 피해가 없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