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이 여름의 끝을 멈추게 한다. 만약 시가 오래전 신이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인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면 어떨까. 아니면 시가
기원도 알 수 없는 인디언 부족들이 잠자기 전에 부르던 기도 같은 거라면 어떨까.
시의 생김새를 정확히 제대로 본 적이 있었던가. 시는 왜 존재하며,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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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존재하는가. 에밀 시오랑은 인간이 태어난 그 자체가 불편하고 절망적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왜 절실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죽고 싶은 것일까.
이런 끝없는 질문은 왜 해결되지 않는 걸까. 아이러니는 이런 삶과 정신의 충돌
에서 질문으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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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며 하루하루 존재한다. 터벅터벅 절망과 희망의
계단을 번갈아 올라가면서 무한의 세계를 꿈꾼다. 이 무한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육체의 시간이 아니라 정신의 시간이다. 이 정신의 세계에서 인간은
투쟁하고 견디고, 알 수 없는 어떤 것에서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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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시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까. 슐레겔은 현실을 상대화하여 무한을
추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러니는 시를 통해
새롭게 정립된다. 시는 정해진 현실과 윤리에 대한 부정과 파괴,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가며, 무한한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완전히 성찰 되지 않는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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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시의 아이러니는 역설과, 대립, 광기, 위트, 긴장
등 다양한 성격을 더 지니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김승희의 시집은 어떤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까.
김승희의 아이러니는 오늘날 개인의 악몽과 연결된다.
김승희의 11번째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은 비극적 상황과 존재
의지 방식의 불균형한 충돌을 아이러니한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단무지와
베이컨과 진실’은 무엇이며, 그것이 ‘사람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김
승희는 시적 대상과 주체의 경계를 분리하며 시적 대상인 ‘단무지’, ‘베이컨’,
‘사람’을 타자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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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나 베이컨처럼 겉과 속이 같은 것이 가장 진실한 존재일까? 그 예쁜
노란색과 연분홍색은 무력한 절망에 맞서는 한줄기 반항인가?”(시인의 말)
김승희는 이 비극적인 상황에 순응하고 절망에 순응할 바에 차라리 단무지로
살고 싶어 한다. “겉과 속이 같은 것”은 옳은 것인가. 겉과 속은 이성과 감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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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한다. 인간의 존재를 사물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성과 감성은 획일화되고
“무력한 절망”에 빠져버렸다. “단무지는 단순 무식 지랄의 줄임말이라지”
(「단무지는 단무지 사바나는 사바나 단무지는 사바나」) 그러나 시인은 정말로
단무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단무지 같은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이 세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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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에 “반항”하는 것이며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아이러니는
유머와 역설의 힘을 얻게 된다. 시인은 어떤 진리를 향해 시를 쓰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들은 시인의 존재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므로 진실은 “사치”이고
시인이 완성 시킬 수 없는 궁극이 된다. 김승희는 이런 아이러니의 효과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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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어나 비 관념적인 단어와 소재를 통해 자신의 시어를 형성하고 있다. “한
사람의 욕망의 모든 진실을 말로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욕망과 말의 불일치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하다.”(『애도와 우울(증)의 현대시』) 즉 시인은 언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보여줄 수 없으며,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으며, 이 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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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불일치”의 시 쓰기는 세계의 어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보려는 마술 같은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런 불가능의 마술적 쓰기
행위는 그동안의 그의 굵고 긴 시력을 통해 점검해볼 수 있다. “김승희 시학을 추동
해온 수원(水源)은 절망과 죽음이 편재(遍在)해 있는 비극적 세계로부터 상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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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더스와 구원을 꿈꾸는 역동적인 주술적 상상력에 있었다. 상상력의 활달함과
스케일을 견지하게 했다. 야성에 대한 의지 역시 이러한 비극적 세계에서 탈출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열망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또한 그의 시적 형식이자 의장이었던
광기와 아이러니는 이러한 열망을 구체화하는 시적 육체였다고 할 수 있다.
”(『냄비는 둥둥』, 유성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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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등단한 그는 첫 시집 『태양 미사』에서 당대 현실에서 사회적 부조리와
여성에게 요구했던 불합리한 상황을 인식하며 우주적인 태도로 세계를 보았다.
김승희의 남성적인 문장과 야성의 에너지는 그의 상상력과 아이러니를 통해 구체화
되었고 세계와의 대립에서 결코 화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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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식을 세계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독해할 수도 있으나, 『달걀 속의 생』과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을 통해 애도와 사랑의 태도를 갖춰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희망이 외롭다』 에서부터 그의 시가 조금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욕설이나 직접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줄고, 남성적인 어조가 축소되고, 침묵과 빈공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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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이러니를 통해 웃음과 질문과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의 관념적인 언어와 진술은 삶의 말을 듣기 위해, 아이러니로 “꿈틀”거리며,
살기 위하여 더 희극적이고 더 아픈 장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김승희의
아이러니는 오늘날 개인의 악몽과 연결된다. “초 개인적 악몽의 때일수록 사랑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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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공감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소문자 인간들은 단무지와 베이컨처럼 절망과 무기
력에 절여지고 오그라들고 납작해졌다.” (시인의 말) 김승희는 시의 비극을 “으리으리한
사랑”(「사랑의 전당」)과 희극적인 장면으로 이끌며, 불가능한 절망을 뉘엿뉘엿 불가능한
희망과 의지로 바꾸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외로운 식탁을 차리고 있는 그의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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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단무지나
베이컨은 온몸이 조용한 진심이라고 한다면/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다 (중략)
무엇을 바라는가/내일이 없는 지 오래되었는데/무엇을 바라는가/진심이 바래 섬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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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전류가 냉장고 속에 가득 차 있는데/무엇을 바라는가/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무엇을, 무엇을, 무엇을 더 바라는가.
-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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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시인
어느 날, 시인은 식탁에서 참담한 현실과 비극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바엔
차라리 빨리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어 한다. 시인은 평생 “진심”을 감당하기
위해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 내내 “아픔”을 겪으며, “무엇”인가를 바라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이제 화자에게 진심이란 고결한 감정 따위가 아니라 “하얀 전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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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냉장고” 안에 단무지나 베이컨과 함께 들어 있다. 그러니까 시인이 지키고
싶었던 시의 정신은 영혼의 영역에 있지 않고 자신이 삶을 살아가며 견뎌야 하는
일차적인 식욕의 문제, 육체의 문제로 이동한 것이다. 먹고사는 일에 합류된 진심을
보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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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시인은 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오히려 그 외, 그 후 이지아 시인의 것들을 강조하고
사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먹고사는 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의식의 구조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아이러니의 역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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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를 보여주면서, 다른 무의식의 영역을 예상하게 하고 있다. 마치 단무지 베이컨
이후의 다른 것들이 있지, 하고 읊조리는 침묵의 문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이상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날개』,
이상) 같다는 문장을 보여준 것처럼, 어쩌면 인생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삼켜야 하는 고통과 비극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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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는 이 시에서 “무엇”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다. 이 “무엇”은 이 시의 핵심적인
아이러니 언어가 된다. 주체는 이루고 싶은 영역을 ‘무엇’ 즉 희망을 간접화하여 표현하고,
현재 명확히 존재하는 명사들과 구분되는 단어를 지칭하며 현재를 부정하는 시의 지점이다.
“내일이 없는지” 이미 오래된 세상이지만 김승희는 다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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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켜왔던 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이라고. 시인의 진심은 사실, 단무지 베이컨이
절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시인은 진실을 버리고, 먹이만 보관하고 걱정하는 동물처럼
남은 생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 이 세상이라는 “지옥은 진실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참 이상한 엉망진창이 세상이라도 미친척하고 조용히”(「탄생의 시」) 살아가는 ‘단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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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같은 소시민들의 장소이다. 그는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체들의 “처지와
죄의식과 환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세속적 현실에 순응하고 공모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김승희 시의 아이러니 연구」, 이유정)자 한다.
김승희의 이러한 시적 태도는 “무엇”이라는 불확정의 대상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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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존재하는 것’에 이르고, “바라는” 것과 ‘되는’ 것의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것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여 “꿈틀”
(「꿈틀거리다」) 거리는 시의 생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김승희 시는 자신의 뼈와
살을 발라 무엇을 살리고 있을까. “썩을 수 있는 육체라는 해방영역이 슬프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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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토마토 씨앗을 심고서」)지만 ‘단무지 베이컨’이 인간의 입을 통해 다른
물질이나 생명이 되고 인간에게 처절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유한 인간의 먹이로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힘을 통해, 무한의 영혼을 기르고, 불멸의 세상 이야기를 신께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미래의 시는 무엇이 될까.(글:김 승희)
2023.8.7.mon.악동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