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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Pearl Sydenstricker Buck)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출생 – 사망 : 1892.06.26. ~ 1973.03.06.
1892.6.26.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 펄 벅 태어나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10여 년 간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Absalom Sydenstricker)는 만삭의 아내 캐리를 데리고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버러로 돌아왔다. 남북전쟁 당시 남과 북 사이에 끼어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던 지역인 힐스버러는 캐리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캐리 시던스트라이커는 딸을 낳았다. 첫째 아들 에드거 이후 중국에서 낳은 세 아이를 모두 잃고서 미국으로 돌아와 낳은 아이였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펄(Pearl) 이라고 지었다. 이 딸아이는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푸른 눈의 중국인으로 산 반평생
생후 3개월 만에 아기 펄은 그녀의 부모와 함께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다.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가 다시 중국선교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펄은 중국에서 자랐다. 펄에게 생후 3개월 만에 떠나온 미국은 그저 모국일 뿐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라였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중국이 발 디딜 수 있는 굳센 땅으로 느껴졌고 중국 사람들의 삶이 더욱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국을 가까이 느낀다고 하여도 중국인들에게 그녀는 벽안(碧眼)의 서양인이었을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포교하는 엄격한 선교사로서 중국인들과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분리하였다. 서양인으로서의 자각도 완전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 동화될 수도 없는 사춘기를 보낸 펄은 18세에 어머니 캐리의 강력한 원조로 미국 랜돌프-메이컨 여대에 진학했다. 이때의 4년이 그녀가 1934년 중국을 완전히 떠나기 전 가장 긴 시간 미국에 머문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펄은 3년 뒤 미국인 농학자인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고 벅이라는 성을 얻었다. 펄 벅의 남편 로싱 벅은 여성에게 다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는 열정적이었지만 아내를 이해하고 가정에 충실한 스타일의 남편이 못됐다. 선교 일에만 열중하며 가정을 나몰라라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펄 벅은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결혼생활에 절망했다. 더구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롤은 펄 벅의 절망을 더욱 가중시켰다. 캐롤은 정신지체아였다. 펄 벅이 딸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닐 때 남편 로싱 벅은 아내와 딸에게 무심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을 잊기 위해 펄 벅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지>가 준 선물, 새로운 인생 그리고 노벨문학상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펄 벅은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이때 그녀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무리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한다 하여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고 이것은 펄 벅 문학의 평생 테마가 되었다. 1930년 그녀의 처녀작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1년이 채 안되어 3번이나 인쇄하는 인기몰이를 하였다. 펄 벅 문학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자, 그녀의 남은 반평생을 확정 지을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1년 출판된 소설 [대지]는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다,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년), [분열한 집](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대지]는 수많은 독자들의 탐독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스웨덴의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그 해의 문학상으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 [대지]를 결정하였다.
펄 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미국의 여성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대지]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40여 년을 산 펄 벅이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동시에 안긴 선물이었다. [대지]의 성공은 펄 벅에게 작가로서의 성공도 주었지만 그녀의 개인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심한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펄 벅은 작가로 얻은 명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출판해주던 출판사 J.데이의 사장 R.J.월시에게 사랑을 느끼고 로싱 벅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펄 벅은 중국에 남은 로싱 벅과 중국 땅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날 이후 펄 벅은 단 한번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투신하다
미국에 돌아온 후 펄 벅은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비록 아버지 압솔룸의 교조적 선교 활동에 염증을 느끼고 남편 로싱 벅의 계몽사상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40여 년 간 선교사의 딸로 계몽운동가의 아내로 산 사람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사회활동은 그녀의 운명이었다. 작가의 조용한 은둔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맞지 않았다. 의욕적인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사회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녀는 1930년대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기를 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1942년에는 민족 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하였고 1949년에는 세계, 특히 아시아 지역의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Welcome House.Inc)를 창설하였다. 그녀도 이 기관을 통해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하였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한 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이 재단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만든 것이었다. 펄 벅 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1개의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데 현재는 혼혈 아동뿐만 아니라 고아, 신체 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 받는 소외 아동을 돕고 있다.
펄 벅에 대한 엇갈린 평가
펄 벅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대지] 이후 나온 그녀의 소설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평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펄 벅에 대한 세간의 인상도 말년 행보 탓에 상당히 구겨졌다. 펄 벅은 두 번째 남편 R.J.월시를 사별하고 외로움을 겪었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파고 든 것은 40여 살 연하의 댄스 선생이었던 테드 해리스였다. 테드 해리스는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를 하였다.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그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이것이 펄 벅 80 평생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펄 벅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그녀는 미국의 인권과 여권운동,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 같은 민감한 주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기꺼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남성 평론가들은 펄 벅의 문학적 성공이 그녀의 주 독자층인 여성 독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며 펄 벅이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차별에 고통 받던 아동들이 그녀가 만든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펄 벅이라는 이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해주고 있다.
펄 벅 연보
출생 1892.6.26~ 사망 1973.3.6
1892년6월 26일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생.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감
1910년 대학 입학을 위해 미국으로 귀국.
1914년 랜돌프매콘여자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돌아감.
1917년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박사와 결혼.
1927년 국공내전 와중에 정부군의 난징 공격 때 가족이 몰살당할 뻔 함.
1930년 첫 장편 《동풍 서풍 East Wind:West Wind》 출간.
1931년《대지 The Good Earth》출간.
1933년《대지》의 후속인 《아들들 Sons》과 《분열된 일가 A House Divided》출간. 《대지의 집 The House of Earth》3부작을 완성.
1934년 자신의 저서들을 출판해온 출판사의 사장 R.J.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
1938년 미국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1963년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The Living Reed》출간.
1964년 사회복지법인 한국펄벅재단 설립.
1968년 한국 혼혈아를 소재로 한 《새해 The New Year》 출간.
1973년 3월 6일 미국 버몬트에서 사망.]
대지(大地, The Good Earth)
미국의 작가 펄 벅의 장편소설.
수상 : 퓰리처상(1932), 노벨문학상(1938)
《대지 The Good Earth》(1931), 《아들들 Sons》(1932), 《분열된 가정 A House Divided》(1935)의 3부작으로 되어 있다.
왕룽에서 비롯한 3대에 걸친 중국 근대사가 작자의 연민에 찬 시선 아래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제1부 《대지》는 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출간 다음해인 1932년 퓰리처상(賞)을 받았으며 1938년 3부작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펄 벅의 자서전에 의하면, 《대지》를 쓰게 된 긴박한 동기의 하나는 외동딸이 백치였기 때문에 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룽의 큰딸 백치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줄거리
1부
가난하게 살지만, 성실한 농부인 주인공 왕룽(王龍)은 성 안에서 가장 부자인 황씨 댁의 여종 오란(玉蘭)을 아내로 맞이한다. 오란은 외모는 못 생겼지만 알뜰하고 강직한, 전형적인 농부의 아내 감이었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농부인 왕룽과 오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생활에 점점 여유가 생긴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오란이 살던 황씨 댁에 돌아가서 예쁘게 옷을 지어 입힌 아이를 보여주고 오기도 하고, 거기서 황씨 댁 사정이 안좋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는 힘들게 모은 돈으로 황씨 댁 전답을 사들이기도 한다. 식구도 늘어나고 재산도 늘어나고 만사가 다 잘 풀리는 듯 했지만, 그들 사이에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 큰 가뭄이 들어 무서운 굶주림이 시작되자 죽기 직전까지 몰린 왕룽 일가는 오란의 의견에 따라 남방으로 떠난다.
남방으로 내려간 일가는 왕룽은 인력거를 끌고, 오란은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구걸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나간다. 고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나마 굶지나 않을 뿐, 객지 생활도 궁핍하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상황.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둘째 아들이 푸줏간에서 고기를 훔쳐온 것을 본 왕룽은 이대로는 아이들이 도둑놈으로 자라겠다는 걱정에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을 간 도시에도 불경기가 닥쳐 공황이 일어나고, 빈민들이 들고 일어나 부잣집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왕룽과 오란은 군중 틈에 끼어 한 부잣집에 들어갔다가 뜻밖에도 많은 돈과 보석을 손에 넣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황씨 댁의 남은 땅을 모두 사들여 큰 부자가 된다.
그러나 왕룽은 지주가 되어 재산을 불리고 소작인들을 부리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성내 다방의 롄화(蓮華)라는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등 농사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롄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로 시집오면서 몸종 겸 식모로 두쥐안(杜鵑)도 데려오는데, 이는 롄화를 첩으로 들인 것보다도 더 왕룽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롄화는 오란에게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만, 두쥐안은 오란이 황씨 집에서 종살이하던 시절 황씨 집 주인영감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란에게 횡포를 부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란은 남편이 젊고 예쁜 첩을 맞이한 사실을 알고 가슴앓이 하며 나날을 보냈고, 그동안의 고생이 겹쳐 극도로 쇠약해진 오란이 끝내 고생스러웠던 한평생을 마치자 그제야 왕룽은 오란이 이 집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이후 도적 집단의 두목급임을 슬쩍 내세워 일가를 위협하던 작은아버지와 말썽꾸러기 사촌에게 골치를 썩이던 왕룽은 첫째 아들의 제안에 따라 이제는 셋집이 된 황씨 댁 저택으로 집을 옮기고, 넓은 저택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독 속에서 지내다가 결국은 젊고 어여쁜 종 리화(梨花)를 셋째 아내로 삼고 외로움을 달랜다.
리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 롄화의 시중을 드는 종이었고 흉년에 그 아버지가 은 20냥에 왕룽에게 팔았는데, 난봉꾼인 왕룽의 사촌 아우에게 희롱당할 위기에서 구해 왕룽 곁에 잠시 두었다. 사실 리화는 왕룽에게 첩이라기보다 양딸 같은 존재이다. 리화 역시 아버지한테 하는 것처럼 왕룽에게 매달렸다.
큰 아들은 그의 뒤를 이어 대지주가 되고, 둘째 아들은 거대한 상인이 되며, 막내아들은 집을 뛰쳐나가 남방의 군벌에 입대해 군인이 된다. 어느 날, 훌륭한 관을 준비해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왕룽은 두 아들이 토지를 팔려고 의논하는 것을 듣고 크게 노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안 판다고 얼버무리고 뒤로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는다.
2부
왕룽이 결국 노환으로 사망하고, 호사스럽고 게으른 지주가 된 첫째 왕이(王一, 왕따(大)로 적은 판도 있다), 약삭빠른 장사꾼이 된 둘째 왕얼(王二), 군벌이 된 셋째 왕싼(王三, 후에 불리는 이름은 왕후王虎.). 2부는 왕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첫째는 두 아내를 두고 가족 모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과 토지는 점점 줄어들고, 둘째는 형이 소유한 전답을 대거 사들여 소작료를 챙기고 상인 기질을 발휘해 여러 곳에 사업을 벌여 부를 증식시켜 크게 성공하지만, 인정이라고는 없고 검소하여 자신의 아들들에게 원망을 산다. 왕룽의 둘째 첩이었던 리화는 왕룽이 죽자 천치 딸과 왕이의 자식이지만 거의 버려진 취급을 받는 곱사등이와 같이 산다. 무엇보다 왕싼을 중심으로 군벌이 되어가는 영지물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전투 묘사 등 여러 모로 볼거리도 있다.
왕싼은 초기에 지역의 군벌 아래서 인정받는 부대장이 되고, 혁명은 말로만 외치며 현실에 안주하는 상관을 혐오하여 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독립탈영한다. 그 부하 백 명으로, 술이 유명한 작은 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표범'이라는 소군벌을 물리치고 현장(우리나라의 군수에 해당)을 협박해 현의 사령관 신분이 된다. 사령관이라지만 사실상 현을 통치하는 건 현장이 아닌 사령관 '호랑이 장군 왕싼'이어서, 현장이 죽은 뒤에도 현으로 부임해오는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대가 청 말기의 치안 공백 상태이긴 하나, 엄연히 '도적' 신분인 타 군벌과 다르게 토벌에 나선 관군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 공문을 올려 명목상으로는 관군 신분이 될 정도로 꽤 머리를 썼다.
그렇게 작은 군벌에서 차츰차츰 무기를 늘리고 병사를 늘려가며 2만 명에 이르는 중대 규모 군벌이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왕싼은 아버지가 되고, 안정을 원하게 되면서 자신이 꿈꾸던 신중국 건설에는 결국 나서지 못한다.
3부
왕룽의 손자들, 그 중에서도 왕싼의 외아들 왕위안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왕위안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군벌 집단의 후계자로 꼽혔지만 그러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억지로 결혼할 위기까지 처하면서 결국 아버지의 다른 부인이 있는 상하이로 이주해서 거기서 신식 교육을 받게 된다. 거기서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 유학을 가는 등의 스토리가 펼쳐지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가 3부 후반의 줄거리.
이후 소설의 말기에서는 고향에서는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가의 기반이었던 농토를 모두 다 잃는다. 첫째 왕이의 집안은 아들 하나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은행의 부은행장이 되어 있어서 상하이로 이주하고, 둘째 왕얼의 집안은 2부에서 삼촌 왕싼 밑에 들어간 아들 곰보가 부유한 상업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도망간다. 문제는 셋째 왕싼인데, 왕싼은 도망간다는 게 아버지의 옛집이었고, 당연히 들키는 바람에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그 후유증으로 앓다가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왕위안을 만나고 죽는다.
애초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왕얼에게 있었다. 왕싼이 아들의 유학 자금이나 군자금 등으로 왕얼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왕얼은 동생에게 가차 없이 이자와 대부 원금을 상환 받았다.
이 비용 부담 때문에 한때 2만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던 왕싼의 군대는 건달패 백여 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조카인 왕 얼의 아들조차 자기 지배구역에서 걷는 세금을 삼촌에게 바치지 않을 정도였다. 가문의 배경인 왕싼의 군대가 없어지자 왕얼의 착취를 참고 참던 농민들이 일시에 봉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벌의 보호를 받는 유력자들이 그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주면서 상부상조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왕얼은 결국 그 탐욕스러운 본성을 못 버려서 동생에게 자금 지원은 못 해 줄 망정 철저히 잇속만 따지다가 결국 화를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왕싼의 봉기 초기부터 보면 왕얼이 돈을 안 받고 넘어간 건 왕싼이 늘어난 군대를 무장시킬 총을 구입했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사히 수령한 2천 정 정도에 대한 대금은 전부 받았고, 소실된 1천 정 가량에 대한 대금만 왕싼이 못 받은 것에 대해선 지불할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안 받고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한편 그 시기, 왕이의 두 아들은 혁명군에서 중책을 맡아 공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위안을 혁명군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의 군사학 가정교사는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 위안의 이복누이 아이란은 속도위반으로 부유하지만 여자 관련으로 소문이 좋지 않은 연애 소설가와 결혼했으며, 위안은 의붓동생 메이링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3부가 종료된다.
4부
펄 벅은 <붉은 대지>라는 4부 격의 소설을 집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이 붉은 대지는 왕룽의 손자들이 공산화된 중국에서 겪는 헬게이트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실제로도 이 소설 미완성된 부분을 봐도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모습과 문화대혁명으로 왕룽의 증손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그리는 걸로 기획되었다.
펄 벅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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