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의 젊은 나이에 강백을 하기에는 어린 나이여서 때로는 뜻하지 않는 일화가 생기기도 한데......
스님이 강백이 되였던 1908년은 한글보다는 한문을 더 많이 스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강원의 학인들 중에는 한문에 능한 이가 매우 많았다. 20세가 되기 전에 사서 삼경을 모두 통달하고 온 사람, 한문을 곧 바로 한글로 풀어서 읽는 자도 있었다. 또한 나이가 40세를 넘은 학인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인들은 젊은 강사스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스님은 불경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화엄경>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방대한 경을 한글로 바로 옮겨 줄줄 외엇을 뿐만 아니라, 짓궂은 학인들이엉뚱한 질문을 던지면 경전이 수북하게 쌓인 서재에서 주저함 없이 한 권의 책을 뽑아 해답이 적힌 대목을 펼쳐 보임으로써, 질문한 학인들을 오히려 탄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래가 부지런한 스님인지라, 방청소에 빨래하는 일 등은 강사가되고난 뒤에도 시자를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였다.
그러다 보면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양산 통도사로 온 김에 강사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가겠다는 손님들이 강백실을 찾는다. 강사가 그렇게 젊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던 손님은 청소하고 있는 고경스님에게 강사스님의 행방을 묻기가 일쑤였다. "학인, 강사스님 계시오?" "예, 방에 계십니다. 들어오십시오."
손님이 방으로 들어오면 스님은 손을 씻고 장삼을 입고 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묻는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어~,강사스님이시네."
첫상면에서 부터 손님과 스님은 한바탕 크게 웃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1918년,나이 36세가 되었을 때 스님은 선찰대본산(선찰대본산) 범어사(범어사) 강원으로 자리를 옮겨
학인들을 가르쳤다. 많은 수도승들이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범어사로 찾아오던 시절이었다.
그후 범어사에서 머물면서 할동한 고승들의 대부분은 이때 스님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분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당시의 절집안에서 남북2대강사의 한 분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금강산 유점사의 북방 대강사 김일우(金一愚) 스님과 함께 '남방대강사(남방대강사)'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박한영(朴漢永) 스님등과 함께 전국의 7대강사로서 이름을 떨쳐었다.
범어사로 옮겨던 스님은 2년뒤 다시 통도사로 돌아왔고,41세 때인 1923년부터 통도사 금강계단의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 및 교수대화상(敎授大和尙)이되었다.
40세가 넘은 스님은 대강사로 대율사로서 인연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명리승(名利僧)이나 권승(權僧)이 되기는 지극히 싫어하였지만, 진리를 위해 법의 문을 열어보이셨다.
특히 증곡(曾谷) 큰스님 등과 함께 화엄산림범회(화엄산림법회)를 수십차례 열었으면, 일제의시대 서울의 대표적인 포교당 가운데 하나인 사간동 법륜사(法輪寺)에서 설법하여 많은 사람을 깨우쳤다.
당시 박대륜(朴大輪) 모두 17대에 이르는 대법사스님을 법륜사로 초빙하여 큰 법회를 열었는데, 스님은 제4대와 제8대의 두차례에 걸쳐 크게 설법,교화하였다.

* 비문 앞의 고경 스님의 제자들 .....일타, 화산, 일고 스님......*
사임 통도사 주지
나에게 우리 스님의 가장 두두러진 특징을 들라고 하면 권세 '권(權)'자에 대해 너무나 무심하였다는 점을 꼽고 싶다.
"나는 인천권(인천권)이 없어 앞장을 못선다." 언제나 이말을 핑계를 삼았던 것이다.
한번은 강원의 학인들이 큰 서첩을 만들어 고승들의 붓글씨를 받았다. 증곡(曾谷), 구하(九河),몽초(夢草),경봉(鏡峰) 등 통도사의 고승들이 모두 글을 남겼지만, 스님은 글쓰기를 기어이 마다하였다. 자취를 보고 누가 더 잘 썼다, 못섰다는
시비를 후세인에게 남겨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1945년 11월 26일. 통도사에서는 광복 후 제1대 주지 선거가 있었다. 그때 사중의 스님들은 의논하였다.
"주지를 총복부에서 인가하도록 되어 있는 사찰령(寺刹令)으로 말미암아, 일제 36년동안 반관권주지(半官權住持)가
선출되어 사찰을 좌지우지하고 재산을 낭비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권력쓰는 주지가 아니라 중노릇 잘 한 스님으로서 도덕주지(道德住持)를 뽑아야 한다"
이와같은 결의와 함께 고경스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금강산 유점사,가야산 해인사와 함께 전국의 3대사찰로 꼽혔던 영축산 통도사의 주지 자리는 매우 격이 높아, 역대의 주지를
선출 할 때마다 치열한 표경쟁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스님은 만장일치의 도덕주지로 선임 된것이다.
스님은 고사 하였다. "나는 인천권이 없어 주지를 못합니다. 일제시대는 일본말을 할 줄 몰라 주지를 못하였고, 이제 해방이
되었으나 미군정시대가 되었으니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내가 주지를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다른 분을 모시도록 합시다."
스님은 거듭거듭 사양하였지만 대중들은 통도사를 이끌 도덕주지로서 스님이 가장 적격이라며 통과 시켜버린 것이었다.
묵묵히 방으로 돌아온 스님은 시자에게 일렀다.
"경주를 다녀오마, 누가 찾거든 경주 갔다고 해라."
스님들이 여러 차례 찾아 왔으나 스님이 돌아오지 않자, 11월28일에 다시 회의를 열어 양대응(梁對應)스님을 주지로 선출하였다.
입적과 발원 (入寂과 發願)
경주에서 돌아오신 스님은 1945년 섣달 그믐날, 거처를 안양암(安養庵)으로 옮겼다.
"조용한 곳에서 공부를 하며 말년을 회향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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