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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해을 기리는 詩
이정암 (李廷馣) 馣=향기 암
중훈(仲薰),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충목(忠穆)
巖穴收遺逸(암혈수유일) 朝廷用老成(조정용노성)
北窺胡馬絶(북규호마절) 東望海波平(동망해파평)
唐將歸何速(당장귀하속) 京倉粟已盈(경창속이영)
田園春興足(전원춘흥족) ▦菽送餘生(철숙송여생)
바위 굴의 은사들 다 불러오고,
조정에선 원로들을 중용하리라.
북쪽 보면 오랑캐 말 다 없어지고,
동쪽 보면 바다 파도 잠잠하리라.
중국 장수 일찍이도 귀국을 하고,
창고에는 곡식 이미 가득하리라.
전원에 봄 흥취가 넉넉하거든,
콩국 먹고 여생을 보내리로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문신으로서 임금을 호종(扈從)하기도 하고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하기도 하면서 역사의 격랑을 헤쳐갔던 지은이가 어느 새해를 맞아 소망을 시에 부쳤다.
바위 굴의 은사들이란 초야에 묻혀 있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다. 청렴하고 참신한 이들을 불러다 등용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험 많고 지혜 있는 원로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북쪽 오랑캐나 동쪽 바다 건너왜구의 준동도 그치기를 바라고 있다. 동쪽 바다의 파도란 일본의 침입을 비유한다. 임진왜란에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들은 전쟁이 끝나 예상보다 일찍 돌아가기를 바라고,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하여 백성들 먹고 살 걱정이 없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야말로 초야에 묻혀 은거하면서 소박한 삶을 누릴 것이다.
우연히도 지금 우리 현실과 많이 대비가 된다. 새해에는 새 정부가 출범한다. 재야의 참신한 학자들이 많이 등용될 모양이다. 그러나 기존의 경험 많은 원로들과의 조화도 중요할 것이다. 북한 핵 문제도 평화적으로 타결이 잘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도 전례없이 악화되었다. 소파 협정 등이 잘 해결되어 태평양의 파도가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주한 미군도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궁극적으로는 철수해야 하고, 그런 환경이 언젠가는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새해에는 풍년이 들고 외환보유액도 더욱 충실해져서 다시는 IMF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새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기를.
■어구 풀이
巖穴:바위 굴.은사(隱士)의 거처. 遺逸:은사(隱士). 老成: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 窺:엿보다. 살펴보다. 胡馬:오랑캐 말. 오랑캐 군대의 비유. 唐將:당나라 장수. 당나라는 중국 명(明)나라의 비유. 京倉:서울에 있는 국가의 창고. 粟:곡식. 盈:가득차다. ▦:마시다. 菽:콩. 콩 국. 소박한 음식의 비유
2. 極寒(극한)
박지원(朴趾源)
北岳高戍削(북악고수삭)
南山松黑色(남산송흑색)
▦過林木肅(준과임목숙)
鶴鳴昊天碧(학명호천벽)
북악산은 수루(戍樓)처럼 깎아질렀고,
남산의 소나무는 검은 빛일세.
매 지나자 나무숲은 긴장감 돌고,
학 우는 저 하늘은 푸르르기만.
우리 속담에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이름으로 보면 대한 때가 더 추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한 때가 훨씬 춥고, 정작 대한때는 별로 춥지 않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래서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는 말도 있다. 올해도 절기 치레를 제대로 하느라고 소한 무렵에 혹한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 시는 제목은 '지독한 추위'인데 시 내용에는 춥다는 말이 하나도 없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곱씹어 보면 혹한 때 느끼는 심리적 상황을 대단히 뛰어나게 묘사한 작품이다.
항상 같은 높이로 서 있는 산이지만 지독한 추위 속에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높은 곳에 위치한 망루처럼 을씨년스럽게 다른 때보다 더욱 높아 보인다. 소나무도 보통때는 푸른 빛이지만 추위 속에 얼어붙으면 검푸른 색으로 변한다. 마침 새매가 하늘을 비켜 날아가니 숲속은 얼어붙듯 바짝 긴장하는 것 같다. 사실은 숲이 그런게 아니고 숲 속에 있는 새들이 잡혀먹힐까봐 긴장하는 것이겠고 그것이 보는 사람의 시각적 심상에까지 투영되어 '심감(心感) 온도'를 떨어뜨린다. 뒤이어 학이 울고 날아가는 하늘은 온통 푸르기만 하다. 추운 날이라도 흐리고 눈이라도 내리면 오히려 추위를 덜 느낀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 강추위가 닥치면 그때 느끼는 추위는 정말 매정스러울 정도다. 순 우리말인 '강추위'는 '강(强)추위'와는 다른데, 바로 이 시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바람 한점 없이 매운 추위를 말한다.
특히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각 구(句)의 끝 글자에 음운 효과까지 동원한 점이다. 마지막 글자들인 삭(削), 색(色), 숙(肅), 벽(碧)은 공통적으로 입성(入聲)인 'ㄱ' 받침으로 되어 있다. 추위 속에 만물이 활동을 멈추고 꼼짝 못하는 상황을 폐쇄음을 통하여 나타낸 것이다.
■어구 풀이
北岳:북악산.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산 이름. 高戍:높은 수루(戍樓). 수루는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높은 곳에 지은 망루(望樓). 削:깎다. 깎아지르다. ▦:새매. 작은 새나 쥐 등을 잡아먹는 맹금류(猛禽類)의 새. 肅:엄숙하고 긴장감이 돎. 昊天:하늘.
3. 雪後(설후)
유방선(柳方善)
臘雪孤村積未消(납설고촌적미소)
柴門誰肯爲相敲(시문수긍위상고)
夜來忽有淸香動(야래홀유청향동)
知放寒梅第幾梢(지방한매제기초)
외딴 마을 섣달 눈이 쌓인 채 안녹으니,
그 누가 사립문을 즐거이 두드리랴.
밤이 되어 홀연히 맑은 향이 전해 오니,
매화꽃이 가지 끝에 피었음을 알겠노라.
인적도 드문 외딴 마을에 섣달의 눈이 가득 쌓여서 아직 안 녹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누가 사립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다. 사실은 눈 내리는 밤에 흥이 일어서 친구 대규(戴逵)를 찾아갔다가 되돌아간 왕휘지(王徽之)처럼 누군가가 찾아올 수도 있으련만 눈이 워낙 많이 쌓여 있어서 그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밤이 되어 문득 맑은 향내가 풍겨오는 것을 느끼고서 추위 속의 매화가 몇 번째쯤의 나무 끝에 꽃을 피웠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한 겨울 추위 속에 매화 소식을 접하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드러낸 시이다.
일전에 내가 모시는 선생님 댁에 신년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문을 들어서자 청향(淸香)이 코끝에 전해왔다. 서재에 들어가 보니 벌써 백매(白梅)가 활짝 피어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꽃이 핀 지 한참 됐는지 이미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통의 매화는 3월이 되어야 피지만 종류에 따라 일찍 피는 것은 섣달 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핀다. 이를 납매(臘梅)라고 한다.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는 말이 있는데, 소한(小寒)부터 곡우(穀雨)까지 120일 동안 닷새마다 차례로 스물 네 번의 서로 다른 꽃 소식을 전해 주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 첫머리가 매화(梅花)로부터 시작되니 소한 지나면 이미 매화는 피기 시작한다.
이처럼 겨울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기 때문에 매화는 난초와 더불어 지조를 상징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다. 설중매(雪中梅)라는 말이 기생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것도 이런 속성 때문이다.
선비의 표상인 퇴계(退溪) 선생도 돌아가시는 날 아침까지 제자들에게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도록 당부할 정도로 매화를 아꼈으며 매화를 제재로 지은 시도 수십편에 달한다.
아직 한 겨울이지만 매화가 피었으니봄 기운의 태동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어구 풀이
臘雪:섣달의 눈. 동지부터 입춘 전까지 내리는 눈. 消:녹다. 柴門:사립문. 肯:즐거이. 相:상대를 향한 행동을 나타내며 번역되지 않음. 敲:두드리다. 放:(꽃이)피다. 寒梅:겨울 추위 속에 핀 매화. 梢:나무 끝.
4. 長信宮(장신궁)
이백(李白)
月皎昭陽殿(월교소양전) 霜淸長信宮(상청장신궁)
天行乘玉輦(천행승옥연) 飛燕與君同(비연여군동)
更有歡娛處(갱유환오처) 承恩樂未窮(승은낙미궁)
誰憐團扇妾(수련단선첩) 獨坐怨秋風(독좌원추풍)
달빛이 밝게 비친 소양전(昭陽殿)인데,
서리만 맑게 내린 장신궁(長信宮)이네.
천자께서 행차하며 옥가마 타면,
조비연(趙飛燕)도 임금과 함께 탄다네.
다시금 온갖 기쁨 누릴 데 있어,
은총 입고 즐거움이 끝이 없다네.
그 누가 동정하랴, 부채 든 여자,
홀로 앉아 가을 바람 원망하는 걸.
중국의 대표적 미인으로 흔히 양귀비를 든다. 그 양귀비와 쌍벽을 이루는 미인이 조비연이다. 양귀비는 몸매가 풍만한 미인의 대표이고 조비연은 날씬한 미인의 대표이다. 한(漢)나라 성제(成帝)한테 사랑을 받던 반첩여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성제가 나중에 조비연 자매에게 혹해서 거들떠보지 않자 태후가 거처하는 장신궁으로 밀려나 태후를 모시게 되었다.
이 시에서 달빛이 밝게 비치는 소양전은 임금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을 비유하고, 서리 내린 장신궁은 차갑고 쓸쓸한 반첩여의 상황이다.
반첩여는 사랑을 받을 때 임금이 수레를 같이 타자고 하면, 옛날 훌륭한 임금들은 항상 명신(名臣)들이 곁에 있었고 말세의 임금들이 곁에 여자를 두었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런데 조비연은 황제가 나들이하면 수레를 같이 타고 다니면서 끝없는 은총을 받았고, 우리나라 장희빈이 왕비가 된 것처럼 결국에는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말년은 장희빈처럼 비참했다)
조비연의 승승장구 뒤편에서 반첩여는 둥근 부채만 든 채 가을바람이나 원망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부채는 사랑을 잃은 반첩여의 신세를 상징한다. 여름이면 항상 가까이 찾다가 가을 바람이 불면 내버려지는 신세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그를 불쌍하게 여기겠는가. 세력 잃은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데.
이 시는 이백이 당시 자신의 처지를 반첩여에게 비유한 것이다.
■어구 풀이
長信宮:한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처하던 궁전. 昭陽殿:한나라의 궁전 이름. 원래 조비연의 동생 합덕(合德)의 거처인데 후대에는 조비연의 거처로 인식된다. 天:천자(天子). 玉輦:구슬로 장식한 가마. 飛燕:조비연. 與:더불어. 更:다시. 憐:가련히 여기다. 團扇:둥근 부채. 妾:여자의 자칭. 반첩여를 가리킴
5. 제목 없음
이규보(李奎報)
榮參竹下會(영참죽하회)
快倒瓮中春(쾌도옹중춘)
未知七賢內(미지칠현내)
誰爲鑽核人(수위찬핵인)
영광되게 죽림고회(竹林高會) 참여하여서,
유쾌하게 동이 속 술 기울였지만,
모르겠네 해좌칠현 이 분들 중에,
씨앗에 구멍 낸 이 누구인 줄을.
고려 때 '무인시대'가 열리면서 문신들은 수난과 좌절의 시대를 살았다. 그 중 이인로(李仁老),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李湛), 오세재(吳世才) 등 유명 문인들 일곱이 모여서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칭하였고, 그 모임을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험난한 세속을 피한다고 표방하면서 자기들끼리 늘 술과 시로 모임을 열었는데 때로는 방약무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비방하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이때 겨우 열 아홉 살이었지만 시에 뛰어나서 오세재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로 대하면서 그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시켰다. 한번은 오세재가 경주로 나들이 갔을 때 이규보가 칠현의 모임에갔더니 그들 중 한 명인 이담이 이규보에게 오세재의 빈 자리를 보충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규보는 "칠현이 무슨 조정의 벼슬자리라고 빈 자리를 채운단 말입니까"하고 비꼬았다. 오세재로 인하여 그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하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못마땅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운자(韻字)를 내주면서 시를 지으라고 부탁하자 즉석에서 지은 시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시의 뒷부분은 칠현에 대해 더욱 심한 풍자를 담고 있다. 원래 중국의 죽림칠현 중에 왕융(王戎)이라는 사람은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부자이면서도 성품이 인색했다. 집에 품질 좋은 자두가 있었는데 이를 내다 팔면서 남이 그 종자를 얻을까 봐 송곳으로 일일이 씨앗에 구멍을 냈다. 마지막 구절은 바로 "당신들이 칠현이라면, 원조(元祖) 칠현들 중에 인색하기로 이름난 왕융이란 사람이 있었으니 당신들 중에도 틀림없이 그런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해좌칠현들은 현실을 도피한다고 하였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신정권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니 이규보의 풍자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셈이다.
■어구 풀이
參:참여하다. 竹下會:죽림고회(竹林高會)를 달리 부른 말. 倒:기울이다. 瓮:동이. 春:주로 한시에서 술을 달리 표현하는 말. 鑽:구멍을 뚫다. 核:씨
6. 망원월
최영년(崔永年)
待月東望眼忽忽(대월동망안홀홀)
須臾天上光輝發(수유천상광휘발)
一時擧首月中看(일시거수월중간)
四海▦盈今歲月(사해풍영금세월)
달 기다려 동산 보니 눈앞이 흐리더니,
순식간에 하늘 위로 밝은 빛이 피어나네.
일시에 머리 들어 달 가운데 바라보니,
올해에는 온 세상이 풍년이 들겠구나.
오늘은 정월 대보름. 이 날은 한해의 풍년과 복을 비는 여러가지 행사를 한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러 절기의 세시풍속 중에 대보름날과 관련된 것이 가장 많다. 한해의 농사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라서 그만큼 중요시되고 관련 행사도 많았다.
필자의 세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보름이면 전날 밤부터 여럿이 어울려서 바구니를 들고 남의 집에 가서 약밥 등 음식을 얻어먹기도 하고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며 놀기도 하였으며, 이웃 마을과 불싸움이나 투석전(投石戰)도 하였다. 이것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놀이인데 지금 시골에서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서 점점 추억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풍습들이다.지금껏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대보름의 풍습으로 대표적인 것은 부럼깨물기이다. 원래 부럼깨물기는 잣, 호두, 밤, 땅콩 등 단단한 과일을 깨물어 먹는 것인데, 지금은 주로 땅콩이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다. 부럼깨물기는 한해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고 이가 단단해진다고 믿었다.
대보름날의 대표적인 행사는 역시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달맞이를 들 수 있다. 달맞이는 단순한 달 구경이 아니다. 가까운 동산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달뜨기를 기다렸다가 소원을 빌기도 하고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다. 이날 달빛이 희면 그 해는 비가 많이 오고 붉으면 가뭄이 들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풍습 역시 과학영농을 하는 현대에는 의미가 퇴색되어 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 시를 지은 최영년은 신소설 '추월색(秋月色)'의 작가로 유명한 최찬식(崔瓚植)의 아버지이다. 그는 '해동죽지(海東竹枝)'라는 저술을 통해서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들과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세시풍속 등을 간단한 서문과 함께 악부체(樂府體) 한시로 남겼다. 많은 전통이 사라져가는 지금에 와서 이 책은 민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어구 풀이
望:바라보다. 圓月:둥근 달. 보름달. 忽忽:혼미한 모양. 분명하지 않은 모양. 須臾:매우 짧은 시간. 잠깐 사이. 光輝:빛. 四海:온 세상. 온 나라. 盈:곡식이 풍성하게 익음. 今歲月:올해
7. 왕소군(王昭君)의 원한
동방규(東方叫)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오랑캐 지역에는 화초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랍니다.
자연스레 허리띠가 느슨해지니,
몸매 관리 때문이 아니랍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예전에 한 정치인이 써먹어서 유명해진 문구인데 바로 이 시에서 유래한다. 시의 주인공 왕소군은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에 꼽히는데, 비운의 여인으로 유명하다.
때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시대. 한나라는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후궁을 흉노의 추장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쁜 후궁을 주기는 아까워서 그 중 가장 못생긴 자를 선택하기로 하였다. 원제는 평상시에 가까이 할 후궁을 고르기 위해 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초상화를 그려두게 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자 모두들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쳐 예쁘게 그려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왕소군은 뇌물을 쓰지 않았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실물보다 훨씬못생기게 그렸다. 초상화를 보고 선택한 후궁이 바로 왕소군. 떠나보내는 날 실물을 본 원제는 그 미모에 가슴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화가 난 원제는 모연수를 처형하고 말았다.
흉노 추장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늘 고국 한나라를 그리며 시름에 쌓여 몸이 야위고 허리띠가 느슨해졌다. 보통의 여자들 같으면 날씬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하느라고 그렇다고 하겠지만 자신은 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시의 속뜻이다. 이 비운의 여인을 위해 후대에 이백(李白)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들이 그를 애석해하는 시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동방규의 이 작품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특히 '춘래불사춘' 못지 않게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도 옛날에 언어 유희로 많이 회자(膾炙)되던 구절이다.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도 지났으니 봄에 들어선 것은 분명한데 아직 봄을 체감하기는 이르다. 어찌 실제 계절감에 있어서만 그렇겠는가. 이런 저런 일로 좌절을 겪은 사람들, 여러 가지 사건.사고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마음 속에서도 여전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어구 풀이
昭君:왕소군(王昭君). 胡地:오랑캐 땅. 似:같다. 비슷하다. 衣帶:허리띠. 緩:느슨해지다. 非是:∼이 아니다. 爲:∼때문. 腰身:허리(여기서는 날씬한 허리를 가리킴). 요지(腰肢)와 같은 말.
8. 초봄의 감흥
이원(李원)
陽生混沌竅(양생혼돈규)
萬物自陶鎔(만물자도용)
誰知有形物(수지유형물)
生此無形中(생차무형중)
양(陽) 기운이 혼돈(混沌)에게 구멍 만드니,
만물들이 저절로 모습 갖추네.
누가 알랴 형체 갖춘 모든 사물이,
형체 없는 가운데서 생겨난 것을.
'장자(莊子)'에 나오는 우화 한 토막. 중앙의 제왕인 혼돈(混沌)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은 남해의 제왕과 북해의 제왕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혼돈에게 사람처럼 눈.귀.코.입의 일곱 구멍을 뚫어주었다. 하루에 하나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글자 뜻대로의 혼돈은 천지개벽 이전의 생명이 미분화된 상태다. 여기에 생명체의 상징인 이목구비를 갖추어 준 것은 일견 도와주는 것 같지만 모든 생명체는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설파한 우화다. 인위적인 자연 파괴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는 '장자'의 원래 주제와는 상관없이 '혼돈 상태'에다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구멍을 내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개념만을 빌려서 긍정적으로응용하였다. 겨울 동안에는 만물이 활동을 멈추고 정지 상태로 있다. 이것은 천지가 개벽되기 이전인 혼돈(混沌)의 상태에 비유될 수 있다. 봄의 양기가 여기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혼돈에게 일곱 구멍을 뚫어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 결과로 식물들이 싹을 틔워 자라나고 동물들이 새끼를 낳아 번식하며 각자의 모습을 갖추고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형체를 갖춘 사물들은 원래는 형체가 없던 가운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초봄에 만물이 따스한 기운을 받아 생명의 기지개를 켜는 자연의 섭리를 동양 사상적 존재론으로 풀이한 시다.
이제 3월이다. 달력상으로는 새해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났지만 각급 학교가 개학하는 이 즈음은 한해가 시작되는 또하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봄의 시작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새 희망을 가지고 한해를 시작하는 시기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목련의 꽃눈도 제법 부풀어 올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봄의 생명력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보자.
어구 풀이
이원(李▦):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제자. 陽:양기(陽氣). 우주의 근원이 되는 원소. 生:만들어내다. 混沌:천지 개벽 이전에 모든 사물이 확실히 구별되지 않은 상태. 중앙(中央)을 맡은 제왕. 竅:구멍. 陶鎔:모양을 만듦. 도(陶)는 진흙을 빚어서 만드는 것, 용(鎔)은 쇠를 녹여서 만드는 것.
9. 한글을 섞어 지은 시
김립(金笠)
腰下佩기역(요하패기역)
牛鼻穿이응(우비천이응)
歸家修리을(귀가수리을)
不然點디귿(불연점디귿)
허리 아래 기역을 달랑 차고서,
소 코에는 이응을 꿰뚫었구나.
집에 가서 리을을 수양하거라.
안그러면 디귿에 점 찍으리라.
사랑방에서 한시 이야기를 하는데 김삿갓을 빼 놓을 수야 없다. 김삿갓이 정처없는 나그네 길 중에 해가 저물 무렵 어느 마을에 이르렀다. 하룻밤 유숙을 하려면 아무래도 말이 좀 통하는 훈장이 살고 있는 서당이 제격이다. 마침 젊은 머슴 녀석 하나가 허리에 낫을 차고 소를 끌고 지나가기에 서당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워낙 허름한 행색을 하고 있는 김삿갓의 몰골을 보고 이 녀석은 한껏 무시하면서 '저기'하고 턱짓으로 마을 한쪽을 가리키는 체 만 체 한다. 이런 일을 한두번 당한 것이 아니라 이골이 났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심사가 뒤틀린 김삿갓, 한 수 시로 비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는 한글 자음을 절묘하게 응용한 솜씨가 그의 번득이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기역'은 생긴 모양대로 낫을 가리키고 '이응'은 둥그런 쇠코뚜레를 가리킨다. '리을'은 한자의 '몸 기(己)'자를 나타내고 '디귿'에 점을 찍으면 한자의 '죽을 망(亡)'자다. 이 뜻대로 다시 번역하면, "(그 놈) 허리에는 낫을 차고서, 소 코에는 코뚜레를 뚫었구나. 집에 돌아가 몸을 잘 수양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뒈질) 것이다". 이런 풀이가 된다. 뒤틀린 심사에 어찌 고운 말이 나오겠는가. 이 번역은 괄호 안의 단어를 적용해야 제맛이다. 서당을 찾아간 김삿갓, 훈장과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이 시를 내놓고 한바탕 웃음으로 나그네 설움을 달랬을 법하다.
논자들 중에는 김삿갓이 사회 모순을 비판하고 양반들의 위선을 풍자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고 해서 그를 '민중 시인'이라거나 또는 '평민 사상'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듯이 그의 풍자 대상은 굳이 양반 지배층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버릇없는 꼬마, 게으른 시골 아낙네, 꼽추 등 그의 붓 끝에 걸린 대상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양반임을자각하고 있었으며 방랑 중에도 한동안 벼슬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었다. 우리는 김삿갓을 뛰어난 풍자 시인이라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작위적으로 사상을 덧입힐 필요는 없다.
■어구 풀이
諺文:한글. 腰:허리. 佩:차다. 穿:뚫다. 修:닦다. 수양하다. 點:점을 찍다.
10. 매화를 노래하다
매화니(梅花尼)
終日尋春不見春(종일심춘불견춘)
芒鞋踏破嶺頭雲(망혜답파영두운)
歸來笑撚梅花嗅(귀래소연매화후)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
종일토록 봄 찾아도 봄이라곤 보지 못해,
고갯마루 구름 속을 짚신 신고 헤매다가,
돌아와서 웃으면서 매화 향기 따라가니,
가지 끝에 이미 온통 봄이 와 있더이다.
벌써 남녘의 섬진강 가에서는 매화 소식이 전해온다. 매화는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에 피는 한매(寒梅)를 높이 치지만, 한매는 우리나라에서는 분재(盆栽)로나 가꾸었을 뿐이고 자연산으로 대하는 것은 거의가 봄에 피는 춘매(春梅)이다.
이 시의 작자는 원(元)나라 때 사람인데 다른 인적 사항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니(尼)'자를 쓴 것으로 보아 여승(女僧)으로 추측된다.
봄을 기다리는 여심(女心)은 조급한 마음에 하루종일 봄의 징조를 찾아보았지만 아직은 쌀쌀한 늦추위뿐 그 기미를 찾을 수 없다. 짚신을 신은 채로 구름 낀 높은 산마루까지도 걸어가 본다. 그러나 산골짝에 잔설(殘雪)이나 보일 뿐 봄 기운을 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지친 다리를 끌고 집(혹은 절)에 돌아와 보니 문득 매화 향이 전해온다. 기쁜 마음에 웃으면서 그 향내를 따라가 보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봄은 바로 뜰 안의 매화 나무 끝에 벌써 와 있지 않은가.
유학적(儒學的) 사고가 몸에 밴 문사(文士)들 같으면 매화를 읊을 때 으레 추위를 이기는 절조(節操)라든지 깨끗하고 고고한 자태를 언급하는 법이다. 이 시에서는 순전히 봄 소식하고만 연관지은 것 같지만, 지은이가 스님이다보니 역시 단순한 봄 노래만은 아니다. 봄은 바로 '도(道)', 또는 '진리(眞理)'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불교식으로는 '깨달음'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토록 정진(精進)하면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의 가까운 곳에 있다는 '오도(悟道)'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섬진강 매화밭을 찾아가 보고 싶었는데 여태 기회를 잡지 못했다. 원래 한매(寒梅)는 성긴 가지에 몇 송이씩 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산자락을 온통 뒤덮은수만 그루의 매화가 난만하게 핀 모습도 장관이리라.
■어구 풀이
尼:여승. 尋:찾다. 芒鞋:짚신. 踏破:먼 길이나 험한 길을 걸어서 끝까지 가다. 嶺頭:산꼭대기. 고갯마루. 撚:따르다(從). 嗅:냄새. 향내. 十分:온통. 충분히
11. 규방 여인의 정
옥봉 이씨(玉峰李氏)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오신다고 기약하고 왜 늦으시나,
뜰에 매화 떨어지려 하는 때인데.
가지 위에 까치 소리 문득 듣고서,
부질없이 거울 속의 눈썹 그리네.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한 시로 이 작품만큼 절창(絶唱)도 드물 것이다.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멀리 떠난 임이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소식 하나 없이 돌아오지 않을 때 규방 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여인네의 애타는 마음이 절제된 표현 속에 잘 녹아 있다.
헤어질 때 임은 매화가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매화가 다 질 때가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마음은 날마다 애가 타기만 한다. 어느날 아침 문득 매화나무 가지에서 까치가 울어댄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에 불현듯 다시 희망을 가져본다. 혹시라도 기다리던 임이 오지 않을까. 들뜬 기대감에 거울을 들여다 보고 그 속에 비친 눈썹을 곱게 단장한다.
그러나 시 속의 주인공은 까치 소리 때문에 행여나 임이 오실까 생각해서 화장을 하면서도 사실은 오늘도 오지 않을 줄을 알고 있다. 올 것 같았으면 약속대로 매화가 필 무렵에 왔겠지, 다 시들 때까지 오지 않았는데 오늘이라고 올 리가 있겠는가. 바로 '虛'자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부질없이 기대해보는 안타까운 심정이 '虛'자 속에 녹아 들어 있다. '虛'자는 이 시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가장 중요한 핵심어이다. 이런 기능을 하는 글자를 '시안(詩眼)'이라고 한다.
다음의 시조도 이와 비슷한 정서를 담고 있다. "설월(雪月)이 만창(滿窓)한데 바람아 부지 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을 판연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적이면 행여 귄가 하노라". 바람 소리가 신발 끄는 소리 아닌 줄을 뻔히 알지만, 워낙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다보면 행여나 그이가 오는 소리가 아닌가 '부질없이'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비록 순간적인 착각일지라도 그 짧은 순간 설레는 마음이야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
작자인이씨(李氏)는 호가 옥봉(玉峯)인데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인 조원(趙瑗)의 소실(小室)로서 그를 그리는 많은 시를 남겼다.
■어구 풀이
閨:규방. 규방의 여인. 謝:시들어 떨어지다. 忽:홀연. 鵲:까치. 虛:헛되이. 부질없이. 畵:그리다. 鏡:거울. 眉:눈썹. 雪月:밝은 달빛. 滿窓:창에 가득함. 曳履聲:신발 끄는 소리
12. 전장(戰場)의 노래
이수광
昨夜沙場戰鼓聲(작야사장전고성)
風吹殺氣滿邊城(풍취살기만변성)
將軍出意新輕敵(장군출의신경적)
不損胡兵損漢兵(불손호병손한병)
지난밤에 모래펄에 북소리가 울리더니,
바람 불어 살기가 변방 성에 가득하네.
장군이 생각하길 새로 적을 경시하여,
오랑캐 군 못 죽이고 제 군사만 죽였도다.
인류사에 있어서 불가피한 삶의 일부인 전쟁도 일찍부터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왔다. 한시에서는 전쟁을 읊은 시들이 대개 상투적인 제목으로 되어 있다. 이 시처럼 '새하곡'이 대표적이고 '출새곡(出塞曲)' '입새곡(入塞曲)' '종군행(從軍行)' 등도 흔하게 나타나는 유형이다. '출새'는 변방으로 나아간다는 뜻이고, '입새'는 변방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니 결국 별다른 차이가 없는 표현이다. 이런 일련의 작품들을 아울러서 '변새시(邊塞詩)'라고도 한다.
'곡(曲)'이나 '행(行)'은 '노래'란 뜻으로 한시의 한 장르인 '악부시(樂府詩)'에서 유래한 것인데, 악부시는 풍속.인정.세태 등을 읊은 시로서 한나라 때 발생하여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런 '새하곡'류의 변새시는 한나라 당시의 정세에 영향을 받아 후대에도 으레 서북방 오랑캐인 흉노(匈奴)를 주적(主敵)으로 표현한다. 변새시에서 '사막'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그들의 근거지가 고비사막 근처였기 때문이다. 대개의 중국 문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우리나라 문인들은 중국 서북방 변경에 갈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도 기존 작품의 영향으로 일종의 '관념시'로서 많은 변새시를 남겼다. 마치 회화에서도 한동안 관념산수화가 유행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흉노를 적으로 보기 때문에 시 내용은 주로 한나라 군대 위주로 그들의 객수(客愁)나 용감성 등을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위의 시는 한나라 장수가 신중하지 못하고 적을 가벼이 여겨 섣불리 대들었다가 오랑캐 병사는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편 군사들만 축내고 만 것을 풍자했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고 했다. 적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모랫바람 속에서 고전하는 모습이 마치 처음에는 그렇게 기세당당하고 기고만장하던 미.영 연합군이 지금 이라크의 사막에서 불의의 저항에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어구 풀이
塞下:변방. 전쟁터. 戰鼓:전쟁에서 진격 신호로 울리는 북. 邊城:변방의 성. 出意:생각을 하다. 輕敵:적군을 경시하다. 損:손해보다. (죽어서)줄어들다. 胡兵:오랑캐 병사. 漢兵:한나라 병사. 중국 병사
13. 途中寒食(도중한식)
송지문
馬上逢寒食(마상봉한식)
途中屬暮春(도중속모춘)
可憐江浦望(가련강포망)
不見洛橋人(불견낙교인)
말 위에서 한식날을 맞이했으니,
나그네길 가는 중에 늦봄 되었네.
애석케도 강 포구를 바라보자니,
낙교(洛橋) 위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네.
한식에는 성묘를 하는 풍습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식 무렵이면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에 머문다. 그래서 어쩌다 한식날 타향에 떠돌게 되면 더욱 향수(鄕愁)를 진하게 느끼고 그런 감상을 시로 많이 남겼다.
송지문은 당나라 초기의 유명한 시인인데, 정치적으로는 권세에 빌붙어 출세가도를 달리다 몇 번씩 귀양살이를 하는 등 행적이 별로 안 좋은 인물이다. 이 시는 귀양살이 가는 중에 한식을 맞아 멀리 서울 낙양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작품이다.
옛날 서당에서 한시 배우는 필독서로 '당음(唐音)'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시는 그 첫머리에 실려 있다. 그런 만큼 옛 사람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익숙하였다. 다만 '당음'에는 4구짜리인 '절구(絶句)'로 실려 있으나 원래는 뒤에 4구가 더 붙어 있는 '율시(律詩)'이다. 뒷부분은 귀양가게 된 신세 한탄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는데, 무슨 연유인지 전반부만 독립되어 실렸다.
이 시와 관련해서 옛날부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17세기의 문인인데, 머리가 좋지 않아 책을 수천 수만 번씩 읽어서 외운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봄날 한식 무렵 말을 타고 가다가 좋은 시 한 구절이 떠올라 입으로 중얼거리며 다음 구절을 생각하였다. 아무리 해도 좋은 표현이 없어 끙끙거리는데 말고삐를 잡고 가던 하인이 대뜸 기막힌 구절을 읊는 것이 아닌가. 김득신은 그 하인이 너무나 대단하게 보여 "네가 나보다 나으니 내가 말고삐를 잡고 네가 말을 타야겠다"고 하였다. 김득신이 처음 읊은 구절은 '馬上逢寒食'이었고 하인이 이어서 읊은 구절은 '途中屬暮春'이었다. 김득신은 '당음'에 실린 첫 작품이라 어려서부터 수없이 외웠던 시인데 자신이 생각해낸 표현인 줄로 착각한 것이다. 하인이야 시 공부한다는사람들이 천자문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처럼 만날 읊어대는 구절이니 뜻도 모르고 따라 했을 뿐이고.
■어구 풀이
途中:길 가는 중. 나그네 길 중. 逢:만나다. 당하다. 屬:계절이 어느 때에 해당하다. 可憐:애석함. 안타까움. 江浦:강 가의 포구. 洛橋:중국 낙양(洛陽)의 낙수(洛水) 위에 놓인 다리.
14. 단오견추천여희
이 규 보
推似神娥奔月去(추사신아분월거)
返如仙女下天來(반여선녀하천래)
仰看跳上方流汗(앙간도상방류한)
頃刻飄然又却廻(경각표연우각회)
밀어올릴 땐 항아(姮娥)가 달나라로 달아나는 것 같더니,
돌아올 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하네.
솟구쳐 오르는 것 쳐다보면 막 땀이 나지만,
순식간에 펄럭이며 다시 또 돌아오네.
월드컵 열기에 묻혀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전통 명절인 단오다. 이날은 창포물에 머리감기, 씨름, 탈춤 등 여러가지 민속놀이가 행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네뛰기다.
이 시는 고려의 대문호(大文豪)인 이규보가 단옷날 그네 뛰는 모습을 재미있는 비유로 읊은 것이다. 그네를 밀어올려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항아(姮娥)가 달나라로 달아나는 것 같다'고 했다. 항아는 신화 속 인물인데, 남편이 신녀(神女)인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은 불사약(不死藥)을 훔쳐먹고 신선이 돼 달나라로 달아난 여자다. 여기서는 항아가 황급히 달아나는 그 장면을 차용한 것이다. 항아는 의리없는 여자였지만그래도 '달 속의 선녀'이니 흔히 미인의 비유로 쓰인다.
셋째구는 그네가 까마득히 높이 솟아오를 때 구경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슬아슬함을 '막 땀이 흐른다'고 해, 그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첫째구부터 4구까지 차례로 그네의 오르내리는 반복동작을 포착, 역동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저절로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하는 가곡이 생각난다. 우리는 지금 단오라 해도 '강릉 단오제' 같은 규격화된 대규모 행사 외에는 자연발생적인 민속놀이를 거의 잃고 말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의미있는 명절로 전국적으로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 특히 5월5일은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이며 유명 시인인 굴원(屈原)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은 날이기도 해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많다.
옛날의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져가는 요즈음이다. 옛 풍습을 억지로 되살릴 수는 없다지만, 그 의미만이라도 알고 옛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구 풀이
韆:그네. 神娥:신녀(神女)인 항아(姮娥). 推:밀다. 似:같다,비슷하다. 奔月去:달로 달아나다. 仰看:쳐다보다. 方:바야흐로, 막. 跳上:뛰어오르다, 솟구쳐 오르다. 流汗:땀을 흘리다. 飄然:바람에 나부끼는 모양. 却:되레, 다시
15.初夏卽事(초하즉사)
초여름 날 즉석에서 짓다/서거정(徐居正)
濃陰寂寂小樓西(농음적적소루서)
細草池塘綠已齊(세초지당녹이제)
不識角巾花雨濕(불식각건화우습)
倚欄終日聽鶯啼(의란종일청앵제)
짙은 그늘 고요한 작은 누각 서쪽에는,
고운 풀 난 연못가에 녹음 이미 고르도다.
절각건(折角巾)이 꽃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서,
난간에 기대 종일토록 꾀꼬리 우는 소리 듣노라.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던 옛사람들은 계절에 대한 정서가 민감해 사계(四季)의 정취를 자주 시로 읊었다. 사계 중 가장 대접을 못받은 것은 여름. 봄.가을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노래하기 좋은 계절이고, 겨울은 설경(雪景)도 좋은 제재가 되지만 한해가 바뀌는 것에 대한 상념과 음양 순환의 이치에 대한 사색이 자주 읊어졌다. 그러나 여름은 반갑지 않은 더위만 기승을 부릴 뿐 별로 매력이 없는 계절이다. 만물이 가장 왕성한 삶을 누리는 때이기는 하지만, 그 점이 또한 옛 사람들에게는 거론을 기피하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만물은 성하면 곧 쇠하게 된다는 생각에다 '겸(謙)'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겼던 옛 선비들은 융성(隆盛)을 구가(謳歌)하는 데 조심스러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름이라고 전혀 외면만 당한 것은 아니다. 역대 문집을 조사해보면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름에 대한 시를 많이 남긴 사람으로 단연 서거정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성종(成宗) 시대에 활약했던 그는 고관으로서 한 시대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문신(文臣)의 가장 큰 영예인 문형(文衡)을 20여년간이나 지낸 사람이다. 야사에 따르면 문학적으로 김종직과 라이벌 의식이 강해 자신의 후임을 김종직이 맡을까봐 끝까지 그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여름에 대해 남달리 많은 작품을 남긴 것도 관료문인으로서 풍족한 삶을 누린 그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는 초여름의 안온하고 자족적(自足的)인 생활을 깨끗한 수채화처럼 읊은 것이다. 작자의 여유로운 생활태도를 그대로 잘 드러내준다. 내용도 고사(故事) 하나 쓰지 않고 평이하여 따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사족(蛇足)이다.
하지(夏至)가 막 지났지만 아직은 초여름이다. 우리 주변은 세상을 들끓게 하는 여러가지 일들로 온통 시끌벅적한데, 시를 감상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어구 풀이
卽事: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제재로 하여 즉석에서 지은 시. 濃陰:짙은 그늘. 寂寂:고요함. 細草:작은 풀. 池塘:연못. 齊:가지런하다. 여기서는 녹음이 고르게 짙음. 角巾:절각건(折角巾). 문사(文士)나 은자(隱者)들이 쓰던 두건. 花雨:꽃 피는 시절에 내리는 비. 濕:젖다. 倚欄:난간에 기대다. 鶯:꾀꼬리. 啼:울다.
16. ■是非吟(시비음)
안방준
是非人所爲(시비인소위)
難分是與非(난분시여비)
爲是不爲是(위시불위시)
爲非不爲非(위비불위비)
是非正如此(시비정여차)
吾何爲是非(오하위시비)
시비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니,
옳음과 그름을 분간하기 어렵다네.
옳다 해도 옳은 것이 되지를 않고,
그르다 해도 그른 것이 되지를 않네.
시비란 바로 이와 같으니,
내 어찌 시비를 따지겠는가.
우리는 한평생 수많은 시빗거리에 얽혀 살아간다. 세상의 온갖 담론은 결국 시비를 따지는 작업이다. 그러나 지난날 허위라고 배척되었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진리로 여겨져 존중받기도 하고, 지금 철석같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훗날 헛된 미망(迷妄)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더구나 요즘처럼 각양각색의 상징조작이 판치는 세상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분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는 그런 인간사의 속성을 잘 꼬집어 굳이 시비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니 아예 시비를 하지 않겠다는 작자의 다짐을 읊었다.
그러나 시를 지은 안방준 자신은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며,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公私)의 구분을 엄격하게 할 것을 주장한, 냉철한 판단력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충절로 이름 높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숭배하여 그들의 호를 한자씩 따서 '은봉(隱峯)'으로 호를 삼았을 정도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하여 온 국민이 축제 분위기인데 자꾸 '판정 시비'가 일어 찬물을 끼얹고 있다. 축구 강국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뒤떨어진다고 생각한 나라에 져서 자존심이 상해 더욱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한다. 자존심에는 두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나는 남을 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향한 것이다. 남을 상대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저급한 차원의 것이고 자신의 내면을 상대로 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자존심이다. 유치하게 판정 시비만 물고 늘어지는 나라들은 이 시에서 말한대로 부질없는 시비를 따지려 하지 말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강자의 모습이다.
■어구풀이
人所爲:사람이 한 것(만든 것). 與:∼과(와). 爲是:옳다고 하다(여기다, 말하다). 不爲是:옳음이 되지 않는다. 正:바로.
17. 結綺宮(결기궁)
김부식(金富軾)
堯階三尺卑(요계삼척비), 千載餘其德(천재여기덕)
秦城萬里長(진성만리장), 二世失其國(이세실기국)
古今靑史中(고금청사중), 可以爲觀式(가이위관식)
隋皇何不思(수황하불사), 土木竭人力(토목갈인력)
요(堯) 임금의 궁궐 계단 삼척으로 낮았어도,
천년토록 그 덕이 남아 전하고
진(秦)나라 성 만리나 길었지만은,
이세(二世) 때에 그 나라를 잃어버렸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 속에서,
충분히 본보기가 될 수 있는데
수양제(隋煬帝)는 어찌하여 생각 못하고,
토목 일로 백성 힘을 고갈시켰나.
성군(聖君)으로 이름 높은 요 임금은 워낙 검소하여 궁실의 계단을 흙으로 쌓았는데 그것도 삼척밖에 되지 않았고, 지붕은 띠풀을 엮어서 이었는데 처마 끝을 가지런히 잘라 다듬지도 않았다. 진시황은 천년 만년 나라를 보존하려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불과 2대째인 이세 황제때 나라를 잃고 말았다. 만리장성을 쌓은 내력이 재미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진시황은 감개무량하여나라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다. 점의 결과는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이다(亡秦者胡也)’. 호의 일반적인 뜻은 오랑캐이니, 오랑캐만 잘 막으면 나라는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고 수많은 인력을 희생해가며 만리나 되는 성을 쌓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폭정을 일삼아 반란군의 봉기를 유발하였고 그 다음 이세 황제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휘둘리며 실권 없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다가 결국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그 이세 황제의 이름이 호해(胡亥)다. 점괘의 호(胡)는 호해를 가리켰던 것이다.
이 시는 교훈이 되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대비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혔다. 수양제가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지 못하고 결기궁이라는 화려한 궁궐을 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으며, 결국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단명 왕조로 끝나고 말았다는 풍자다.
수백 년 지난 역사상의 일은 커녕, 자기 생전에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거울 삼지 못하고 패가망신하는 세상이다.
■ 어구 풀이
結綺宮:궁궐 이름.남조시대 진(陳)의 후주(後主)가 세운 결기각(結綺閣)을 가리키는데, 김부식은 수양제가 지은 것으로 착오를 일으켰다.
堯階:요 임금 궁실의 계단. 卑:낮다. 千載:천 년. 餘:남다. 남아 전하다. 二世:진(秦)나라 2대 황제의 고유 호칭. 靑史:역사. 可以:∼할 수 있다. 觀式:본보기. 隋皇:수나라 황제. 土木:토목공사. 竭:다하다. 고갈시키다.
18. 偶吟(우음)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읊다/조식(曺植)
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
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
사람들이 바른 선비 사랑하기가,
호랑이 가죽 좋아함과 서로 닮았네.
생전에는 그를 두고 죽이려 하다,
죽은 후에 아름답다 칭찬해대니.
호랑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잡으려고 난리를 피운다. 함정도 파고 올가미도 설치하며 활과 총도 동원한다. 그렇게 하여 잡고 나면 가죽을 벗겨서 호피(虎皮)를 만들어 놓고, 무늬를 감상하면서 아름답다고 찬탄한다. 인간 관계에서도 가끔씩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상대방에 대해 조그마한 흠도 들추어서 확대하기를 좋아하고, 질시와 모함 등이 분분히 일어난다. 어쩌다 그 사람이 죽게 되면 그제서야 "아,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하고 생전의 장점들을 들먹이며 애석해한다. 또는 애석해하는 척한다. 망자(亡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가, 아니면 적대자가 없어진 데에 대한 안도감에서의 너그러움인가.
논어에서는 "오직 인자(仁者)라야 능히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고 하였다. 논어의 핵심 사상인 '인(仁)'이란 단순히 '어질고 인자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진리.선(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품성을 두루 갖춘 사람만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인 평가를 토대로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또 "여러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엄밀한 객관적 기준으로) 잘 살펴보고,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잘 살펴보라.(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 시는 많은 시선집에 실려 전하는데, 두번째 구는 일반적인 격식을 벗어났다. 5언시의 경우 두 자, 석 자씩 호흡이 끊어지는데 이 구는 석 자, 두 자(好虎皮/相似)로 끊어진다. 이런 식의 변격이 다른 시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파격인 것이 사실이다. 시를 지은 남명(南冥) 조식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함께 당대에 쌍벽을 이룬 학자였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처사(處士)의 삶을 일관했던 선생이 이렇게 일반적인 시 형식을 무너뜨리면서까지 굳이 세상을 풍자하고자 했던 가르침에 새삼 숙연해진다.
■ 어구 풀이
偶吟:우연히 문득 떠오른 생각을 시로 읊음. 正士:올바른 선비. 정직한 사람. 相似:서로 닮다. 서로 비슷하다. 方:비로소. 稱:칭찬하다. 美:아름답다. 훌륭하다.
19. 三伏(삼복)
삼복날에/서거정
一椀香茶小點氷(일완향다소점빙)
歠 來端可洗煩蒸(철래단가세번증)
閑憑竹枕眠初穩(한빙죽침면초온)
客至敲門百不應(객지고문백불응)
한 주발 향그런 차 조그마한 얼음 띄워,
마셔보니 참으로 무더위를 씻겠네.
한가하게 죽침(竹枕) 베고 단잠이 막 드는 차에,
손님 와서 문 두드리니 백번인들 대답 않네.
삼복더위를 맞아 시원하게 얼음 띄운 차를 마시고 한가하게 누워 더위를 쫓는 시이다. 옛날에 무슨 얼음이 있었을까 싶지만, 겨울에 한강에서 두꺼운 얼음을 떼내 빙고(氷庫)에 저장하였다가 여름철에 궁중에서도 사용하고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대나무로 엮은 베개를 베고 막 곤한 잠이 드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와 부른다. 우리 속담에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데 참 눈치없는 손님이다. 작자는 짐짓 못들은 척 여러차례 불러도 대답을 안한다는 것이다. 원래 손님을 깍듯이 대접하던 풍습에 비추어보면 욕먹을 짓이지만 이 시의 분위기에서는 어쩐지 이해해 주고 싶은 장면이다.
바야흐로삼복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그런데 한더위를 나타내는 복(伏)자가 참 절묘하게 생겼다. 복날이면 으레 개고기로 몸보신하기 좋아하는 애견가(?)들은 글자 생긴 것을 보아도 애초부터 사람이 개를 잡아 먹는 날이라고 구실 삼을 만하다.
그러나 복더위와 개는 글자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를 가져왔을 뿐이다. 여기서 '엎드리는 것'은 바로 '가을 기운'이다. 계절의 순환 원리에 의하면 한여름에 이미 가을의 기운이 싹트는데, 그 가을 기운이 여름 기운을 밀어내려다가 아직은 워낙 여름 기운이 강하여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엎드린다는 것이다. 그러다 다시 기회를 보아 여름 기운에 대항해 보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엎드리기를 세차례나 하는 것이 삼복이다. 복날은 날짜의 간지(干支)로 경일(庚日)에 드는데, 경(庚)이 바로 방위로는 서쪽이고 계절로는 가을에 해당한다. 가을에 해당하는 날이니까 여름에 대항해서 한번 힘을 써보려다 굴복하는 것이다.
사족으로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동물애호가들에게 한마디. 그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할 일이다.
*어구 풀이
椀:주발. 點氷:얼음을 떨구다. ▦來:마시다. 來는 뜻이 없는 어조사. 端:과연. 확실히. 洗:씻다. 煩蒸:찌는 듯한 더위. 무더위. 憑:기대다. 의지하다. 初:막. 穩:평안함. 안온함. 敲:두드리다. 百:많은 횟수를 나타냄.
20. 棋局(기국)
바둑을 두며/고용후(高用厚)
兩人分黑白(양인분흑백)
一着判存亡(일착판존망)
不覺松陰轉(불각송음전)
山窓已夕陽(산창이석양)
두 사람이 흑과 백을 나누어 들고,
돌 한 수에 살고 죽기 판가름나네.
모르는 새 솔 그늘은 자리 바꾸고,
산집 창엔 석양 빛이 벌써 비치네.
바둑의 속성을 쉽고 간명하게 표현한 시다. 바둑이란 두 사람이 흑백을 나누어 쥐고서 살고 죽는 것을 판가름하여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긴다. 그 살고 죽는 것은 바로 단 한수로 결정날 때가 많다. 3, 4구는 바둑에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 모르는 상황이다. 그늘에서 바둑을 둔 것으로 보아 점심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솔 그늘이 저만큼 위치를 바꿀 정도로 시간이 훌쩍 흘렀고 창문에는 벌써 석양 빛이 비친다. 요즘같은 한여름에 더위를 잊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은이 고용후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잡기(雜技)에 대해서 엄격했던 옛날 학자들도 바둑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며 좋아한 사람도 많았다.그것은 바로 '논어'에 나오는대로 공자(孔子)가 "밥만 먹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장기, 바둑이라도 두는 것이 낫다"고 한 말에 위안을 삼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 등 현대의 대표적 한학(漢學) 대가들도 모두 애기가(愛棋家)였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바둑 사이트도 여러개가 있어 시간만 난다면 언제든지 적당한 상대를 만나 바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바둑 덕분에 우리나라 아마추어들의 바둑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을 것이다. 원래 바둑 자체가 재미있는 것인데다 인터넷 게임의 중독성까지 곁들여 자칫 지나치게 몰입하기 쉬운데, 최소한 본업에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은 갖추어야 할 것이다. 또 관전자들 중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욕설을 하거나 '도배'를 일삼기도 하는데 바둑판에서 추방되어야 할 자들이다.
한동안 무료이던 바둑 사이트들이 최근에는 하나 둘 유료로 전환하고 있다. 공짜 좋아하는 본능으로는 서운한 일이지만그래도 다른 소비지출에 비하면 큰 부담은 아닌 듯하다. 대신 운영자측에서는 그만큼 서비스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어구풀이
着:(바둑 돌을)두다. 놓다. 判:판가름나다. 存亡:삶과 죽음. 不覺: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松陰:소나무 그늘. 轉:옮겨감. 山窓:산 속에 있는 집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