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짧은 인연 긴 여운>/구연식
음식은 생명의 근원이고 건강의 요체이다. 그래서 ‘음식은 요술사가 아닌 요리사가 만든 먹을거리이다.’라고 궁중음식 전문가 유인자 명인의 식치(食治) 철학의 표현이다. 명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도제(徒弟) 정신으로 명장 아래서 터득한 명인들의 땀과 노력의 결정체이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와 오랜 경험이 숙성된 정성이 손끝에서 오물쪼물 빚어질 때 비로소 생명의 근원이고 건강의 요체인 좋은 음식이 탄생하게 된다.
교직 첫 발령지 군산여상고에 부임하였을 때 유난히 상큼하고 발랄한 처녀 여선생님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나는 결혼을 하였지만, 우리 집안의 가족으로 모셔오고 싶어졌다. 마침 기업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외사촌 동생에게 소개하여 제수씨로 삼고 싶었다. 외지에서 근무하는 동생을 군산에 내려오게 하여 군산 빅토리 관광호텔 커피숍에서 그 여선생님과 선을 보도록 주선했다.
두 사람의 결과를 기대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아쉽게 끝나고 말았다. 그 뒤 나는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가고 그 여선생님은 교직을 그만두고 결혼을 했다. 사촌 동생은 학구파(學究派)로 은행은 적성에 맞지 않아 사직하고 바로 군산대학교 회계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그 여선생님은 각종 TV 음식 프로그램에 음식 명인 초대 손님으로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어쩌면 외사촌 제수씨가 될 뻔했던 여선생님이었기에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궁중음식 명인 반열에 있다. 전주 시내에서는 궁중음식 전문점으로 매스컴에서는 헤드라인으로 소개할 정도로 굴지의 궁중한정식업으로 군림했다.
오늘의 궁중음식 명인이 되기까지는 주위의 환경과 본인의 심리적인 각오가 결정적인 계기인 것 같다. 유 선생님의 친정은 바다처럼 싱싱한 생선이 넘치는 항구도시 군산이다. 아버지는 꼬리가 질질 끄실 정도의 큰 홍어를 사 오셔서 기둥에 매달고, 어머니는 박대를 해망동 시장에서 구입 손질하여 장독 위에 말려서 언제나 생선 반찬이 떨어질 줄 몰랐다.
전주 시댁은 양 명일을 포함 1년에 제사가 10번 넘게 모셔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시어머님으로부터 한식의 본고장 전주 음식에 자연히 익숙해져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궁중음식에 전념하게 되었다. 궁중음식 인간문화재 황혜성 스승으로부터 이론과 실제를 전수(傳受) 받아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궁중 한정식 세미나와 워크숍에 몰두했다.
오늘은 옛 군산 동료 선생님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여름 보양식 삼계탕을 먹고 하구둑 가는 길에 오션뷰 카페 ‘리투스’에서 그동안에 살았던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너절부래한 이야기가 서너 시간을 파도처럼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여동생이 퇴직 공로 연수를 앞두고 형제들과 저녁 식사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식사 장소가 공교롭게 유인자 명인이 운영하는 G 음식점이다. 45여 년 만에 유인자 선생님을 만나 뵈려니 마음이 설렌다. G 음식점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들어가니 어느 궁궐의 후원(後苑)처럼 나무숲으로 둘러 싸여 널찍하고 아늑했다. 적막을 깨뜨리는 텃새들이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하는지 꼬리를 흔들며 부리를 들어 요란하게 지저귄다. 그리고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네를 타듯 날아다니며 반겨주니 내 집처럼 금방 익숙해진다.
2층 예약실로 들어가니 모두 다 모여서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음식이 들어오면서 G 음식점 유인자 사장이 인사와 간단한 음식을 직접 소개한다. 장맛은 뚝배기라고 하지만, 궁중음식을 뚝배기는 아니어서 모든 그릇은 궁중 방짜유기로 갖춰 입으로 맛보기 전에 눈에서부터 분위기를 압도한다.
공연히 45여 년 전 내가 선을 봤던 아가씨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린다. 나는 ‘사장님 안녕하세요?’ 라고 하니 ‘예,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저 모르시겠어요?’ 하니 ‘어디서 많이 뵌 분 갔습니다.’ 나는 CEO들이 통상적 답례로 응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더니 옆에서 뒤에서 기웃기웃하며 알 듯 한데 확신이 안 슨다는 눈치였다. ‘구연식입니다!’ 라고 하니 그때 서야 내 손을 덥석 잡고 놀라며 반갑다는 눈치였다. 그 뒤 조금 후에 사무실에서 옛날 흑백 앨범을 가지고 올라왔다. 그 옛날 같은 학교에서 근무할 때 졸업앨범을 펼치면서 나와 유인자 선생님을 가리키며 잠시 풋풋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한바탕 왁자지껄해졌다.
그때 내가 물었다. 그 옛날 군산 빅토리 관광호텔 커피숍에서 선봤던 총각 기억하냐고 물으니 생생하게 재현하면서 설명을 한다. 그 총각의 근황을 묻는 눈치였다. 그 총각은 은행에 적성이 맞지 않아서 대학에서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다고 하니 고개만 끄덕이며 잠깐 회상에 젖어보는 듯했다. 한번 모시고 오겠다고 하니 볼그레한 얼굴로 끄덕인다.
인간의 인연은 억지로 만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피해 갈 수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작고 하찮은 인연도 소중하게 대하고 간직할 때 먼 훗날 상큼한 석간수가 될 수 있고, 때로는 무미건조한 삶에 깨소금 같은 양념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삶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싶어진다. (2022.6.23) |
첫댓글 그 음식점 이름이 무었인가요?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저도 요즈음 유기농발효과 식품안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주대 정문 부근 한정식 궁(宮) 식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