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에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루가 21,29-33)
Consider the fig tree and all the other trees. When their buds burst open, you see for yourselves and know that summer is now near; in the same way, when you see these things happening, know that the Kingdom of God is near.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하여 네 마리의 짐승을 본다. 이는 네 강대국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환시 안에서 짐승들은 강력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위기를 볼 때에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깨달으라고 이르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평화 안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 싹트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너무나 짙은 그림자도 있고, 옅은 그림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도 참으로 많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슬픔의 그림자, 분노의 그림자, 견딜 수 없는 아픔의 그림자 등입니다. 때로는 그림자가 너무나 짙어서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항상 빛을 전제로 합니다. 그림자가 짙다는 것은 그만큼 빛이 강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짙으면 짙을수록 더 강한 빛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그림자의 어둠이 짙을수록 사실은 구원의 빛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그림자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자기 안의 그림자를 없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모든 일’은 온갖 피조물의 파괴, 피조물과 피조물 간의 관계 파괴입니다. 곧 세상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림자를 보거든 그 너머의 빛을 보라고 이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어제 우리는 세상 끝 날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때에 온다는 사실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교회와 세상은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되새겼습니다.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종말의 시기를 이미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기 안에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의 참빛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즘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아니 쌀쌀한 것을 넘어서 꽤 춥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긴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졌다고 하니 쌀쌀하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춥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추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히 답을 한다면, “겨울이라서”가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날씨를 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이 계절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문득 신학교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처음 신학과 1학년에 입학하고 나서는 외출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밖의 일에 대해서 잘 모르게 되더군요. 요즘에 유행하는 옷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어지고, 또한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역시 둔감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신학교의 생활은 왜 이렇게 춥던 지요?
기숙사 자체가 워낙 춥다보니, 항상 두꺼운 오리털 파카 점퍼를 입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5월에 처음으로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1학년은 모두 학교에서 입고 다녔던 두꺼운 점퍼를 입고 나갔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5월이라는 봄 날씨에 맞춰서 얇고 화사한 옷을 입고 있었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는 저희들은 그들의 구경꺼리가 되고 말았지요.
조금만 신경을 쓰고 있었더라면 그렇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신학교 안에서만 살다보니 계절의 변화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역시 신경을 쓰지 않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자연의 이치를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일들을 보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일상 삶에서 조금만 주의 깊게 생활하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많은 것들이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꼬마의 집은 너무나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24가지의 크레용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일곱 색깔의 크레용밖에 없었지요. 어머니에게 졸랐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얘야! 색깔이라는 것은 3원색을 섞어서 만든 거야. 그러니 세 가지 크레용만 있으면 수백 가지 색을 만들 수 있단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24가지의 크레용 모두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3원색인 빨강, 파랑, 노랑만 있으면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니까요.
아무리 먼 여행도 시동 키가 아니라 한 걸음으로 시작된다(에드워드 애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불과 몇 십 년 전 바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 우리가 온 몸으로 직접 체험했던 일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무시무시한 폭력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들의 횡포아래 다들 숨죽이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자처하며 거만한 눈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하도 그 세월이 오래 가다보니 과연 이 끔찍한 시대가 막을 내리기나 할 것인가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들의 권세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십시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미 땅에 묻히고, 어떤 사람은 갖은 수모를 다 당하며 초라하고 구차스런 삶의 마지막 끈을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고 있습니다.
한때 저를 매료시키던 책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지, 마음에 드는 글귀들을 노트에 열심히 옮겨 적었습니다. 그런 노트가 수십 권입니다. 얼마 전에 노트 한권을 꺼내 읽어 그 내용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그것들 역시 별것 아니더군요. 참으로 시시해보였습니다. 때로 유치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인간만사, 인간 세상, 인간의 손때가 묻은 것들의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은 바로 유한성입니다. 지속성의 결여입니다.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인간과는 달리 지속성입니다. 한결같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모든 인간적인 것들, 인간만사, 인간 세상은 세월의 흐름 앞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천천히 사라져갑니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태초의 상태 무(無)로 돌아가고 맙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가고, 꽃다운 청춘도 다 지나갑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권세도 잠시입니다. 모든 것이 떠나가고 인간 세상과 인류 역사의 끝에 오직 한 분만 남을 것인데, 그분은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끝, 종말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겠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사랑은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끝, 재림의 시기, 하느님을 거슬러 살아온 사람들, 하느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때가 확실하다.
그러나 반대로 하느님 말씀 안에 살아온 사람, 하느님만 신뢰하며 그분만 붙들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해방의 날이자 구원의 날, 기쁨과 환희의 날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하느님 말씀 안에, 말씀을 열심히 실천하며 살아온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작,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새 출발입니다.
머무르기
-정희성신부-
어린이들이 세상에 대해 가지는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가 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옳음’이고, 부모가 하지 않는 것, 싫어하는 것은 ‘그름’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소아과 의사들은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아이에게 바라는 그 모습을 부모가 직접 보여 주라고 권고합니다. 아이가 공부 잘하기를 바란다면 공부하는 모습을, 사랑하기를 원하다면 사랑하는 모습을, 기도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보다 보여지는 모습을 친숙하게,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라면서 아이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제 어느 곳에 서 있느냐가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따뜻한 곳에 서 있는 아이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따뜻하고, 추운 곳에 서 있는 아이에게 세상은 추운 곳으로 다가옵니다. 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올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눈으로 판단하기” 복음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이 바람이 가능해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 바로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물 때,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게 영원히 남는 말씀
-김찬선신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당신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시는데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데 어떻게 말은 사라지지 않고 남겠으며,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한들 그 말이 어디에 가 닿을 거냐고 혹시 시비 거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신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사람은 죽어도 그가 한 명언은 남는다는 그런 뜻의 말일까요?
결코 그런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 말씀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영원할 것 같은 하늘과 땅이 우리에게서 사라질지라도 당신의 말씀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현존의 의지이며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 말씀의 영원성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허무를 체험하는 우리, 바로 나를 위한 주님의 현존 약속입니다. 철저히 나를 위한, 나 중심적인 것입니다.
나에게 의미 있었던 것들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갑니다. 내가 하던 일들도 못하게 됩니다. 건강도 힘도 잃게 됩니다. 돈도 명예도 사라집니다.
이때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들은 윤 심덕의 “사의 찬미”를 흥얼거립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았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이 노래 가사 중에 “세상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라는 가사는 저에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그래서 “나 없으면 다 없다.”는 나 중심적인 존재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이 아니 계시면 나도 없겠지만 반대로 내가 없으면 하느님도 없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계셔도 나에게는 아니 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란 유의미한 자기 전달입니다. 의미 없는 말이 소리에 불과하듯 내게 무의미하면 아무리 주님 말씀일지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전에 나에게 유의미하던 하늘과 땅은 시간이 지나 무의미해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영원히 유의미할 것이라는 주님의 보장입니다. 약 장수의 보장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의 확신에 찬 보장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 김순중 수녀-
무화과나무는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가 짧은 봄이 아니라 여름이 오면 잎을 낸다. 따라서 이 잎은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표시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하늘의 표징, 천체와 바다의 표징에 적용해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파악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한 획이 없어지기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을 포함한 피조물은 모두 일시적이다. 그러나 이런 일시적인 것을 사용해 영원으로 가는 발판으로 삼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잡아서도 안 되지만 잘 사용하지 않으면 인생의 끝에 닥칠 재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생각하면 굳은살이 부드러워져 피가 통하는 것 같고 막힌 담이 헐려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 같다.
우주가 생성된 원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만물이 주님한테서 나오고, 주님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주님께 나아간다. 주님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께 돌아가는 데 있음을 아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이는 마치 값진 진주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주님, 당신께로 돌아가는 행복을 누리도록 넘치는 자비를 베푸소서.’
어떤 직장인이 우연히 땅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한 장을 주워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단지에는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당신! 무료로 상담해 드립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실이 아주 지긋지긋했고, 그래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전단지에 나와 있는 약도를 보고 무료로 상담해 준다는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실 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 멋진 인생을 살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는 “당연하지.”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두 개의 문이 그를 반기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문에는 다음과 같은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왼쪽 문에는 ‘고용주’라는 명패가, 오른쪽 문에는 ‘고용인’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과연 어느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고용주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른쪽 문인 ‘고용인’이라는 명패가 붙은 곳으로 들어갔지요.
그런데 그 안에는 또 두 개의 문이 있는 것입니다. 왼쪽 문에는 ‘연 수입 1억 이상’이라는 명패가, 오른쪽 문에는 ‘연 수입 1억 이하’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연 수입 1억 이상 받는다는 것을 불가능해 보였지요. 그래서 이번에도 오른쪽 문인 ‘연 수입 1억 이하’라는 명패가 붙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는 이번에도 두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왼쪽 문에는 ‘자산규모 3억 이상’, 오른쪽 문에는 ‘자산규모 3억 이하’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또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산규모가 3억 이상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다시 오른쪽 문인 ‘자산규모 3억 이하’의 명패가 붙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에 들어왔던 그 자리로 다시 되돌아온 것입니다.
새 문을 열려면, 새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인생이 재미없다고 투덜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새로운 마음으로 전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불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들이 어디서 또 언제 일어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나무들의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알게 되는 자연의 이치처럼,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던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안일한 나의 모습을 모두 접고, 대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새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혹시 과거에 계속 연연하고 있는 헌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제 자리만 계속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의무는 없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주님의 예고편
-조명연 신부-
“기대하시라 개봉박두”라는 말은 자주 듣던 이야기입니다. 주로 텔레비전이나 극장에서 어떤 영화의 예고편을 내보내면서 나오는 말이지요. 즉, 그 영화의 아주 멋있는 장면들만을 모아서 영화를 꼭 보게끔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키지요. 마치 이 영화를 안 보면 커다란 손해를 입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사는 영화 제작 못지않게 예고편도 대단히 신중하게 준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예고편을 말씀하십니다. 즉, 마지막 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올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서 그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서, 그날과 그 나라에 대해서 파악하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런 예고편까지 말씀해주시지만 우리는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부수적인 것만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제 주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 모두 들어가도록 합시다.
영원으로 사라지다
-김찬선신부-
영원으로 사라진다. 영원 안에서 잠들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든 느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 안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과 땅위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도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주님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합니다. 제가 영원으로 사라지기를. 영원 안에서 잠들기를. 그리기 위해서 저는 믿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믿고, 주님이 영원하심을 믿습니다. 사랑으로 주님께 달려가 사랑으로 주님 안에 닻을 내리고 싶습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전삼용신부-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커서 무엇이 될 거냐고 물으면 신부님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래야 칭찬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하나 둘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저도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에서 들려오는 부르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더 이상 그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누를 수 없었고 그래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렇게 결혼하는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늦게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늦게 들어간 것은 주님께서 늦게 불러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저 스스로 오래전부터 불러주시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성소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시간도 많이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는 눈도 단순해야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며 진리를 올바로 보고 듣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 바람소리도 그 사람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지만 자신의 생각에만 갇혀 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옆에 나타나 함께 걸어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셨을 때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의 고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과 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 나라에 가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천국에 가면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죄는 인간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만약 자유가 사라진다면 죄를 지을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 이유는 인간에게 더 이상 죄를 지을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십년이 넘게 신학을 배우고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더 놀랐던 것은 함께 있던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그 신부님의 말씀에 찬성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없어서 죄를 안 짓는다...?”
사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그런 말은 틀린 것을 넘어서서 이단에 가깝습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유’입니다. 만약 자유가 없다면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은 아닐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천국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도 항상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으면 기계나 로봇이 되지 참 인간은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유가 없으셔서 죄를 짓지 않으셨을까요? 오히려 죄를 지으면 자유를 빼앗깁니다. 죄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돈에 눈이 먼 사람은 돈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어떤 것의 노예가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우셨던 것이고 그래서 죄의 노예도 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들의 자유로 자신들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만을 따를 정도로 완전한 자유를 사셨던 모범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그런 단순한 진리들을 벗어나서 오류에 빠지고 말까요? 그것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진리들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더 우선시하는 우리의 고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일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봄이 가고 바로 다시 겨울이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진리는 이렇게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이 단순한 진리가 들어있지 않다면 나무에 잎이 돋는 것을 보아도 여름이 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해서 멸망하고 말았고 또 지금도 멸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인과응보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도 선하게 산 사람과 악하게 산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심판이 이루어질지는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곧 올 죽음과 곧 받게 될 심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처럼 단순해지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 악을 일삼으며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겠지만 악을 일삼기 때문에 심판이 있음을 믿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에 성소에 대한 부르심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에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어른처럼 복잡해지면 그만큼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공부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겸손하고 깨끗해지는 작업을 멈춘다면 많은 단순한 진리들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 우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진리를 믿기 위해 어린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고 있는 발타살이란 신학자는 수많은 책을 쓰고 추기경 서품 이틀 전에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성탄 카드에 마지막으로 이 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실패를 하게 되니 더 이상의 희망도 생기지 않고, 이제는 모든 것이 자포자기인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갈 뿐이었지요.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던 이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낡은 차를 몰고 빗속을 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무슨 이유인지 달리던 자동차의 엔진이 멈춰버린 것이었어요. 그는 생각했지요.
‘무엇이든 잘 안 되니 이제는 이 자동차도 고장 나는구나. 비는 오는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당황해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차 한대가 멈췄습니다. 그리고 한 신사가 내리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엔진이 멈춰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뚜껑을 열어 무엇인가를 건드렸지요. 그러자 차의 시동이 신기하게 다시 걸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운전자는 너무 고마워서 “감사합니다. 엔진이 끝장난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그때 그 신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차든지 아주 작은 스파크만 있으면 적어도 한번 정도는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는 원리죠. 우리 삶에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었던 이 운전자는 그 말에 큰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실패했던 내 자신. 그러나 아직도 작은 스파크는 얼마든지 다시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는 자신을 도와 준 그 신사의 말에 용기를 얻어 새롭게 삶을 시작하였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하나 같이 사회 경제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스스로 이 세상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모든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작은 스파크를 낼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그 작은 스파크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요 며칠 동안의 복음을 보면 계속해서 종말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천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예언 말씀에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날 것이며, 특히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늘 초조해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은 단순히 위협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산고 후의 산모의 기쁨처럼 그 고통 후에 하느님 나라가 동녘에 떠오르는 해처럼 나타나는 기쁨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희망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이렇게 희망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희망이 바로 우리의 삶 안에서 작은 스파크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 때, 또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에도 기쁨 속에서 힘차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포자기 하기 전에 먼저 내 곁에 있는 주님의 작은 스파크를 찾아보세요.
표징
-이승준 신부-
야구 경기를 보다 보면 이런 느낌이 올 때가 있습니다. ‘아, 이 분위기에서 실점할 것 같은데’ 하는 불길한 생각이나 ‘여기서 뭔가 풀릴 것 같아’라는 기대어린 마음이 경기 내내 교차해서 보는 재미를 더욱 북돋워줍니다. 때론 불길한 가운데 불안감과 긴장이 가득해지거나 반면 설레고 흥분해 있는 자신의 감정들을 보면서 무언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으로 또는 경험에 의해 느끼는 그 무엇, 그것이 표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표징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징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표징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그것에 관심을 갖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됩니다. 더불어 표징은 하나의 힌트입니다. 힌트의 의미를 조합해보면 해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듯이, 우리가 표징을 알아차려보려고 노력해봄으로써 그 표징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본질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참으로 복잡한 사회이지만 이 순간에도 우리가 느끼든 못 느끼든 수많은 표징들이 우리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져만가는 세상이지만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눈과 마음을 길러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유효하다
- 원영배-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와 있다. 계절이 때맞춰 오듯 어김없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은 음악회가 열리는 극장에 앉아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무대에는 육중한 커튼이 드리워져 청중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청중석에서 자리를 찾고 프로그램을 뒤적이는 무질서와 소란함이 가라앉으면서 신선한 긴장과 흥분이 무대를 향해 쏠린다. 무대 가까운 쪽에 앉는다면 커튼 밑을 살짝 젖혀보고 싶은 유혹이 들게끔 그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연주자와 스태프의 발걸음도 보이고, 악기의 음을 고르며 일으키는 불협화음도 귀를 자극한다. 그 소리는 다가올 음악의 향연을 기대하는 마음을 더욱 벅차게 부풀리는 매력이 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불이 꺼지며 장막이 걷힌다. 숨겨졌던 오케스트라가 흐트러짐 없는 정물처럼 반짝이는 악기와 함께 정돈된 모습을 무대 위에 드러낸다. 연미복을 입은 지휘자가 걸어 나오면 청중은 일제히 우레와 같은 박수를 터뜨린다. 단상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향한 지휘자의 손에 들려 있는 지휘봉 끝이 서서히 올라와 허공에 멈춘다. 모두 숨을 죽여 지켜보는 정적이 절정에 도달한 순간 지휘봉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청중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격의 탄성에 오케스트라는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음악으로 화답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정하신 일들을 미리 알아내고 비밀을 캐고 싶어 씨름을 거듭한다. 유전자를 연구하고 생명체를 복제하는가 하면 고성능 망원경을 인공위성에 실어 올린다. 아득히 먼 우주 끝에서 천체가 영롱한 빛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하늘의 비밀을 엿본 흥분으로 위대한 인간 능력이 이룰 끝없는 성취를 확신하며 자만한다. 하지만 그런들 하느님의 때를 조금도 앞당길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셨다. 하늘과 땅은 서로 동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창조주의 말씀이 낳은 뜻에 따라 함께 관계 맺는 동반과 협력의 현장이다. 하늘의 뜻은 곧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당장 끝장날 듯한 재앙에 휘둘리더라도 구원의 약속은 말씀이 영원한 만큼 언제나 유효하다. 구원의 때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 지나갈 테니 어떤 경우에도 절망해선 안 된다. 잎이 돋으면 열매 맺을 것을 알아차리듯 시작을 보았으면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이 반드시 우리에게 미치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커튼 뒤에 가려진 오케스트라를 정해진 시간이 오기 전에는 볼 수 없지만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부단한 준비가 진행됨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사인이 움직이고 있다. 간절한 기대에 응답하는 나팔이 곧 우리에게 울릴 것이다.
속량의 시간
-장재봉신부-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예언은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는
지금 나에게 허락된 생애에 불과합니다.
세상이 영겁으로 계속된다 해도
지금 이 삶만이
나의 것이며
내 짧은 생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바오로사도는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 6,2)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은혜를 깨닫고 하느님을 향하지 못해서
때를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성경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승승장구하며
그 기세를 몰아 예루살렘까지 장악했던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하느님께 징벌을 당한 후에야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종교박해를 반성하고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죽을 수박에 없는 존재가 자기를 하느님과 동격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2마카 9,12)라고 참 하느님을 선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던 사실을 전합니다.
안티오쿠스의 뼈저린 참회도
결의에 찬 맹세도(2마카 9 참조)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때를 놓치고
구원의 날을 놓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역사를 살피고 정립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으라 하십니다.
그분의 뜻을 깨달아서
미래를 준비하는 토대를 삼으라 하십니다.
끝까지 성공하는 삶은
성장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이르십니다.
스스로 성찰하여 살피지 않는 신앙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도
사회도 마찬가지이지요.
주님께서 이르신 ‘좁은 문’은
우리의 정성과 시간,
인내와 기다림의 성찰을 통해
확고해지고 견고해진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 매일
하느님의 것을 쌓아가는 일과
삶을 통해서
선한 것을 선택하는 일만으로 의인이라 하십니다.
이토록 큰 속량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날은
악인들에게는 형벌의 시간이지만
의인들에게는 기쁨의 때입니다.
복된 속량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양승국신부-
<매사를 좋게, 밝게 바라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전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 앞에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다가오면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기를 쓰고 쌓아올린 업적들도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던 재산, 명예, 자리...모두 허사가 될 것입니다.
모든 육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군요. 지금까지 우리가 목숨 걸고 살아왔던 육적인 삶을 버리고, 이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삶, 그분 말씀에 따라 이웃사랑의 실천을 우위에 둔 영적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하더라도, 곧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며, 다시금 용기를 내어 일어서는 낙관적인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매사를 좋게 바라보고, 넓게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노력을 주님께서는 높게 평가하실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모친 맘마 말가리다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크나큰 시련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밭에 나가서 땀 흘려 일하다 돌아온 남편이 지하창고에 들어갔다가. 그 서늘한 기운에 급성폐렴이 걸리고 맙니다. 투병 단 몇 일만에 남편을 야속하게도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돈보스코의 나이가 2살이었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29살이었습니다. 20대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와 아들 세 명이 그녀의 손 안에 남겨졌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대 기근으로 인해 중산층조차도 양식을 걱정해야할 정도였습니다.
한 순간에 사랑하던 남편이자 가정의 지주를 잃어버린 맘마 말가리다는 그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밤낮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식음도 전폐했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상황, 도망가고 싶은 상황,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맘마 말가리다는 결국 스스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고통스런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묵묵히 일어섭니다. 매일 하느님께 간절히 ‘일어설 힘을 달라’고 수도 없이 청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평상심을 되찾습니다. 들로 나가 남편이 하던 일을 그대로 다 해냅니다. 동시에 자녀교육에 헌신합니다. 돈보스코를 위대한 교육자 사제로 키워나갑니다.
그녀의 그런 배경에는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근면 성실한 삶의 태도, 열렬하지만 조용하고 깊이 있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대교육자 돈보스코는 가난한 어머니 맘마 말가리다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 낙관주의란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날, 하느님 나라를 목전에 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자세는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려는 노력입니다. 힘겹고 고달프더라도 꾸준히 희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매사를 좋게. 밝게 보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재원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부는 차가운 바람이 겨울의 문턱에 온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과 앙상해진 나뭇가지를 보면서 죽음과 이별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인생의 무상함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서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이제 내일 저녁부터는 대림주간이 시작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맞게 됩니다. 연중 마지막 시기에 계속 봉독되었던 종말에 관한 성서 말씀은 대림과 새로운 한 해라는 빛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간에 계속 들었던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루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다 되었음을 아시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입성 뒤에 하신 가르침들은 바로 그분의 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의 가르침들을 집약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그냥 죽으시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을 그렇게 집약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부활하리라는 것을, 죽음과 죄의 굴레를 쳐부수고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확신하셨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삶의 원칙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거나, 변화와 혼돈의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하는 것 속에서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을 붙잡고, 거기에만 매달린다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변하지 않고, 우리가 매달릴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어두움과 혼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잡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잡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알기에, 그곳은 적어도 세속의 판단기준이 판을 치는 곳이 아님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허리끈을 단단히 조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품고 살아갈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변화지 않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새 하늘 새 땅을 희망하며 다가오는 대림 시기를 기쁘게 맞이합시다. 아멘.............◆
새벽을 열며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몸이 너무나 허약해서 각종 병을 안고 사시는 형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하느님께서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조금 이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 형제님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이 바위를 매일 같이 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형제님은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기쁨에 그리고 이 바위를 밀어 놓은 다음 자신의 병을 치유시켜 주실 것이라는 희망에 매일 같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바위를 밀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글쎄 8개월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의 꿈에 대한 회의가 생기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인데, 정말로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혹시 개꿈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떠나지를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는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는 단 1인치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8개월 동안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원통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이 형제님께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니?”
“당신 때문이에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움직이지도 않는 바위를 왜 옮기라고 하신 것입니까?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저한테 시키신 것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셨어요.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한 적이 없단다. 단지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지.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거울 앞에 선 그 형제님께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위를 움직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형제님을 변화시키는 것에 하느님의 뜻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위를 옮겨놓는 것보다 바위를 미는 행동 자체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도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바위를 움직이지 못했다고 절망하는 이 형제님처럼, 스스로 세운 결과에만 집착하고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눈앞의 현실은 그 바위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 역시 조금도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이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서 너무나 많이 변화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 깨우침을 주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보면서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지요.
혹시 나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만을 보면서 한숨만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요? 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그것도 나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니까요.
나를 향한 배려에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빠다킹신부
월동 준비
-민경철 신부-
쭉쭉 뻗어나가던 나무들은 이파리를 하나 둘씩 떨궈가더니 어느새 발가벗고 있습니다. 가로수는 몸통 러닝셔츠를 입고, 성당 건달 진국이(개) 옷은 어느새인가 색깔을 달리 했고, 성당 관리장님은 수도관, 보일러 파이프, 온열 장치 정비에 분주하고, 차들도 살아보려고 부동액을 갈고 스노 타이어로 갈아 신고, 연탄 때시는 분들은 창고에 연탄도 쟁여 놓고…. 동네 아줌마들은 김장김치 품앗이도 합니다. 저도 예전에 사둔 장갑, 목도리, 두툼한 옷들, 이불 꾸러미들을 확인하고 그러지요. 겨울이 오는 소리에 제 마음은 ‘으이구 겨울이구나, 이놈의 겨울을 우찌 보낼꼬’ 하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분위기상 겨울을 감지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으셔서 준비하게끔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느님 나라도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이에게는 쓰나미 해일과 같은 폭격처럼 두려움으로 몰아칠 수도 있지만, 깨어 있는 이에게는 옷을 벗어 준비하여 기다리게끔 따뜻한 온기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잎이 돋으면
-신금재-
어느 봄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침엽수 세 그루와 이름 모를 활엽수 한 그루만이 덩그렇게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뒷마당의 잔디는 관리를 하지 않아서 가을 잔디처럼 누런 빛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바라보던 남편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저 옆집 잔디 좀 봐. 정말 파랗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더니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기 시작했다. 비료를 사다 뿌리고 잔디가 패어 나간 곳에는 씨를 심었다. 1주일쯤 지났을까? 잔디들이 파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젠 앞마당의 활엽수도 제법 그늘을 드리워서 화분 분갈이를 하거나 꽃모종을 할 때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하면 꽃이 없는 나무지만 꽃이 가려져 있을 뿐이지 사실 인류가 재배해 온 가장 오래된 과일나무 중 하나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난 후에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 무화과나무 잎이었다(창세 3,7). 나무에 잎이 돋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와 봉사의 잎으로 무성해지면 우리의 믿음도 여름처럼 뜨거워질까? 이곳 캘거리는 유난히 겨울이 길다. 기나긴 겨울을 보낸 탓일까? 봄이 오면 집집마다 정원을 손질하는 손길이 무척 바쁘다. 동네마다 가장 예쁘게 꾸민 정원을 뽑아서 상을 주는 행사도 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그 집 주인이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사계절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상태를 보면서 신앙을 점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나무에 물을 주듯이 기도생활을 좀더 열심히 해야지.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많이 방문해야지’ 결심은 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어제는 작은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한국 친구들끼리 모여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날 딸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내 마음에 찍혀 눈물짓게 했다. 그 친구의 엄마는 한국에서 이민 올 때 근육암 수술을 받았는데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암이 재발했다. 앙상하게 마른 손과 발, 힘없이 웃으며 서 있던 모습! 야채전을 좋아하는 그 자매를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나뭇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오듯이
- 김웅태 신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오늘 복음에서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즉,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들이 잎이 돋아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여름이 가까운줄을 아는 것처럼, 다시 말해서 여름이 올 때를 자연의 징조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시신다. 그리고 당신이 하신 말씀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정적이고 불변적인 말씀을 하신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세대 사람들의 세대가 가기 전에 예루살렘은 기원 70년에 파멸을 당했으나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서가 말하고 있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안오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예수님 말씀대로 하늘의 천사도, 인자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시고 집행하시는 시기라고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기여이 세상의 종말, 파멸의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파괴와 소멸을 목적으로 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하느님을 외면한 무질서와 부도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하느님의 간섭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세상 종말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세상의 파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새로운 세계를 완성하시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모습 속에서 죄많은 인간들과 세상이 겪어야 하는 진통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모습은 우리가 장례 미사때마다 봉독하게 되는 마태 25장에서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당신이 구속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도적과 같이 오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 개인의 죽음, 내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며 맺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것이다.
-박재철 신부-
예전에 읽은 책 중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죽어가는 노 스승과 미치라는 젊고 유능하지만 일상에 지친 한 제자가 만나 서너달 동안 매주 화요일에 인생을 주제로 가진 수업의 내용을 적어놓은 글이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 자네는 아나? 난 질식해서 죽을 거야. 그래. 천식 때문에, 폐가 이 병을 제대로 견뎌낼 수 없거든. 이 루게릭 병이란 놈이 몸 위로 차츰차츰 올라오고 있어. 이미 다리는 다 잡아먹었고. 이제 곧 팔과 손에도 올라올 거야. 그게 폐까지 올라오면... 난 끝이야.”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징조들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잘 받아들이는 그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미치라는 제자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쁘게만 흘러오던 자신의 삶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가는 스승의 모습에서 의문과 충격을 느끼게 되고, 한번의 만남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를 이 만남이 매주 화요일의 만남과 수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에는 시한부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들 모두가 이 책에 나오는 모리처럼 죽음을 잘 준비하고 내 삶을 잘 돌아보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내가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왜 인간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떤 분들은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라고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오늘 암 선고를 받고 내일까지밖에 못산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래서 죽음이 실감이 나고,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러한 준비를 잘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징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봄이 지나가고 무화과 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듯이 너희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러한 일들이란 그전까지 이야기되었던 종말에 관한 징조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리라는 것을 알아돌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종말이 끝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임을 알아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도 알고, 또 이 세상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앎 뒤에는 그로인해 모든 것이 끝나버리지는 않을지, 그 끝남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애써 외면하고 그 죽음을 준비하거나 대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 그분과 함께하는 나라에 대한 믿음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죽음과 종말은 공포와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과 기다림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는지, 나는 정말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보는 오늘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이 새 하늘과 새 땅
-이수철신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21,33).
모두가 다 변하고 사라져도
하느님의 말씀만은, 하느님만은 영원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연관되어 생각나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1베도1,24).
풀과 같이 덧없이 사라져버릴 우리 인간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의 만남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늘 새롭게 합니다.
또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을 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깨닫게 합니다.
이래서 성독(聖讀:렉시오 디비나) 수행의 생활화가 절실합니다.
여기서 새삼 깨닫게 되는 거룩한 전례의 역할입니다.
거룩한 전례를 통한 말씀의 은총으로
날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환경을 바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말씀의 은총으로 내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 어디나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묵시록의 말씀처럼,
매일 하늘로부터 하느님께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통해서
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도다.”(묵시21,3ㄷ).
아멘.
나무에 잎이 돋우면
-이회진신부-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줄 알아라.”는 말씀이나
서리가 내리고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들면 겨울이 다가온 줄 알아라 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 말일 것입니다.
제가 버리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꼭 챙겨가지고 다니는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제 증명 사진들입니다.
어릴 적에는 그냥 재미로 한 장씩 모았고,
커서는 서류 만들 때 필요할 때마다 사진 찍는 것이 싫어서 한두 장 모아두던 것이
지금은 꽤 여러 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지금까지 증명사진들을 쭈욱 나열해 보면
제 모습이 변화되어 온 지난 시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거울을 한두 번 보면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변화가
한 눈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나 자신과 너무나 가까운 곳에 이렇게 변한 것이 있고,
또 변해 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대로이고, 마음도 그대로인 것 같지만
사진 한 장 한 장에 들어있는 제 모습이 그때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변하였음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아직도 마냥 젊다고 외치고 있지만
사진으로 보게 되는 제 모습은 분명 변화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의 모습만이 변해가는 것은 아니겠죠.
제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도 분명 달라졌고, 세상도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들과 가치관과 삶을 이해하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달라졌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 달라졌으며,
내가 하는 일도 달라졌습니다. 우리 각자는 지금 다른 곳에 와 있습니다.
또한 지금 나의 생각은 어릴 적 생각과는 분명히 다르고,
세상의 가치로 살던 시간과도 다르고, 심지어는 몇 년 전과도 다릅니다.
나무에 잎이 돋아났기에 여름이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여름이 벌써 다가왔기에 나무에 입이 돋아나는 것이겠죠.
그처럼 내가 변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다가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이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시고 들어오시기에 우리가 변한 것이죠.
이러한 변화의 한 가운데는 자신이 있고, 주님이 있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잎이 나오는 것을 봐야 여름인 줄 알게 되지만
(사진을 보아야 자신이 변했음을 알게 되지만)
자신의 모습이나 생활이나 생각들이 예전과 다르다면
이미 변화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 변화는 하느님을 향한 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올 때
하느님의 모습도 보다 분명히 우리 영혼을 채울 것이고,
하느님 나라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들과
지금 자신의 삶 속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를 볼 수 있다”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과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보라고 예수님이 요구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 역사의 시간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작하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주변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라시기 때문이고, 주님이 그 변화의 한 가운데서 이끄시기 때문이죠.
오늘 하루 그렇게 주님께서 변화시켜 주신 자신의 시간과 삶들을 돌아보며
우리 자신을 당신 나라에 초대하는 그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 주님, 나를 부르시는 주님! 이만큼 살아온 시간과 이만큼 제 주변에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것들을 통해 저를 이루었듯이 이것들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제 삶에 이루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조명연신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주로 텔레비전이나 극장에서 어떤 영화의 예고편을 내보내면서 나오는 말이지요. 즉, 그 영화의 아주 멋있는 장면들만을 모아서 영화를 꼭 보게끔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키지요. 마치 이 영화를 안보면 커다란 손해를 입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사에서는 영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예고편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고편이 그 영화를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커다란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어떤 예고편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마지막 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올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서 그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서, 그 날과 그 나라에 대해서 파악하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런 예고편까지 말씀해 주시는데, 솔직히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참으로 많지요.
어느 부부가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서 유명한 화가인 렘브란트의 걸작인 '야경'을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겠지요. 그 유명한 화가의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야경'을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이렇게 기쁜 마음을 가지고 박물관에 들어갔고, 여러 복도를 지나 한참 걸은 뒤에 마침내 그 유명한 걸작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앞에서 그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얼마 뒤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봐요. 이 액자가 참 아름답지 않소?"
물론 액자가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어쩌면 그 액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액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 남편은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액자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 렘브란트의 걸작 '야경'을 보러 갔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액자는 사실 그 그림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이 자꾸 이 남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더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예고편까지 해주시는데, 우리는 그 중요한 것보다는 부수적인 것을 더 찾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찾고, 더 중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간다면 우리는 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보다는 중요한 것을 돋보이게 하는 것들에 현혹되어 '왜 나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체험되는 기적이 없을까'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액자에 현혹되기보다 그 걸작을 보라 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시간에 느낄 수 있도록 우리는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 그 계명을 실천하는데, 우리의 관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
-백광현 신부-
예수님이 행하신 마지막 기적은 바로 눈먼 소경을 보게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인간의 마음 안에 들어간 적이 없는 것을 느끼도록 부름 받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그 날과 그 때에 대한 궁금증은 현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를 하느님 안에서 충만하게 사는 사람의 눈은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세상 마지막 날이 언제이고, 무엇이 일어나며, 어떻게 다가오는가’였습니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서 내놓은 십자 나무의 표징 아래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도록 초대하는 무화과나무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늘나라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표징이 이루어지는 곳에 가까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일회적인 사건 안에서 일어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각자의 삶 안에서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 잎과 하늘나라(天國)
-강영구신부-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에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지금 창밖을 내다보시겠습니까? 무엇이 보입니까? 초겨울의 푸른 하늘이 보입니까? 푸른 하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입니까? 그 속에 하늘나라(天國)도 보입니까? 텅 빈 하늘이 온 우주를 감싸고 비어있기에 충만한 하늘은 하느님의 품이자 하늘나라(天國)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나는 새들을 보고(마태 6,25) 그것들이 심거나 거두거나 하지 않아도 먹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들에 핀 나리꽃들을 보고(마태 6,28) 그것들을 솔로몬보다 더 아름답고 화사하게 입히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새록새록 피어나는 무화과나무의 새순에서도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은행잎에서도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일상(日常)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당신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깨친 눈으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이웃 안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는(마태25,40) 당신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시련과 고통, 십자가마저도 하느님의 손길임을 아는 당신은 그 안에서도 부활(復活)의 기쁨을 누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나는 당신은 하늘나라에 머물고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오늘도 하늘나라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오늘의 거울 속에 내일이 보인다.
-박상대신부-
매일 거의 비슷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이 전혀 다른 하루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어제의 결과요, 내일은 오늘의 투영(投影)이다.”고 말한다. 내일이 오늘의 투영이라는 말은 ‘오늘이 내일을 미리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① 하나는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계획하여 추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D-Day’를 정하거나, 정해진 ‘D-Day’에 맞추어 준비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다’는 단언(斷言)은 유효하다. 시험을 치루기 위해 시험날짜에 맞추어 공부하거나,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공부를 한다거나, 결혼식이나 잔치 등을 준비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통상 준비한 만큼의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가 주어진다. ② 다른 하나는 스스로가 계획한 적이 없는 예상치 않은 일에 벌어짐으로써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이다. 뜻밖의 사고를 당하거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성공이나 실패, 또는 선택이나 거부 따위의 단어는 설자리가 없다. 여기에는 불응(不應)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말없이 따라야 하는 순응(順應)만 있을 뿐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내일이 들이닥쳐, 이를 선택, 혹은 거부하거나, 이에 불응할 수 없고, 순응해야만 한다면, 그런 내일을 오늘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고, 또 대비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현명한 일이다. 세상의 종말이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가 계획하지 않았으면 네가 계획한 것이고, 네가 하지 않았으면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다. 자연의 섭리도 그렇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기 마련이다.(30절) 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성서적 언어에서 여름이란 곧 열매를 맺는 때를 말하며, 이는 곧 수확이 멀지 않았음을 뜻한다. 수확의 때는 바로 심판의 시기를 의미한다. 성도 예루살렘의 멸망도 하나의 심판이었으며, 계획된 하느님 왕권의 계시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정확한 세상종말의 때를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으시다. 그러나 봄 안에 여름이 포함되어,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자연의 섭리와 같이 오늘 안에 이미 내일이 포함되어, 종말의 내일은 분명히 온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은 종말을 맞이해야 할 만큼 익었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 비리와 부정부패, 매관매직과 청탁과 향응, 황금만능주의와 한탕주의, 자연파괴와 인명경시풍조,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天災地變)과 인재(人災) 등이 세상종말의 징조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이런 모습을 관상(觀想)하면서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세상과 거래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사리고 엎드리며 피하여 숨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럴 때일수록 “몸을 세우고 머리를 들라.”(루가 21,28)고 말씀하신다. 몸을 세우고 머리를 드는 것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남아 있을 주님의 말씀(33절)을 따라 사는 것이다. 내 발의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신(시편 119,105)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옳게 사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루가21,29-33)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십자가를 말하고 다른 모든 나무들은 복음을 말한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나무들의 잎이 돋자마자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로 저절로 알게 되듯이 제자의 배반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대사제들에 의해 예수님이 붙잡히고 재판을 받게 되어 십자가에서 죽게 될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 때가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때이다. 왜냐하면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구원사업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고 거기에서 구원의 싻이 움터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난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모두 십자가에 의해 심판받을 것들이며 결국 남은 것은 십자가와 복음의 말씀들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사라질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십자가와 복음이다. 따라서 십자가와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아무리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겁내지 않고 주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든 일들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 앞서서 예수님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와 복음을 믿는 이들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가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증언할 때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 거기에는 모든 재앙과 박해까지 포함해서 다 사라질 것이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십자가와 복음이다. 결국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권력도 재물도 아닌 십자가와 복음의 말씀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라질 이 세상 것들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와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며 거기에서 생명을 받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코 전 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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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