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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예전 모습 같다.
무오 시월(戊午 十月)은 1978년 10월이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블로그 에서 옮김.
◇정규영(鄭圭永)
자: 명여(命汝)
생졸년: 1857년(철종 8) - 1932년
본관: 초계(草溪)
*정규영(鄭圭永)에 대하여
[1857년(철종 8)∼1932년. 조선 말기의 문인. 자는 명여(命汝), 호는 일옥(一玉)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의 29세손이며 교리(校理) 정창(鄭昌)의 15세손이다. 부는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며, 부인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아들은 효자로 이름난 정인상(鄭寅尙)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9살에 모친상을 당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예를 다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이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였다. 부가 노환으로 병이 깊고, 담수(痰嗽)가 심하여 메추리를 먹고 싶다고 하자 정규영은 수 일간 산야를 헤매다 다행히 메추리 두 마리를 얻어 봉양하였더니 부가 차도를 보였고, 그 후 바위틈에서 산삼을 얻어 봉양하였더니 부의 병이 완쾌되었다. 천수(天壽)를 다하고 부가 돌아가시자 두 형과 예법대로 상례를 행하고 3년간 시묘하였다. 상을 마친 후에도 매 삭망에 성묘하고, 사랑방을 ‘첨망헌(瞻望軒)’이라 이름붙이고 묘를 향해 앉아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였다. 1920년 육영사업(育英事業)에 힘을 쏟아 여러 인사들을 규합하여 도장동(道莊洞)에 도장재(道莊齋)를 신축하고 정돈영(鄭敦永), 정세영(鄭世永), 박창현(朴昌鉉) 등을 초빙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를 통해 선비들에게 유풍(儒風)을 불러일으킨 공이 크므로 김형식(金亨湜), 서상효(徐相曉), 박우봉(朴遇鳳), 박창현 등이 ‘도장재기문(道莊齋記文)’을 찬(讚)하여 정규영의 공적을 기렸다. 1932년 11월 13일 76세의 나이로 졸(卒)하였으며, 문집으로 《일옥유고(一玉遺稿)》가 전한다. 1970년 후손들이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정규영 효자비를 세웠으며, 1978년 9월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위시한 15개 서원과 음성(陰城), 진천(鎭川), 괴산(槐山), 충주(忠州) 각 향교 재임 제관 일동이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상모각(常慕閣)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옮김.
[<정규영(鄭圭永) 효자비>
--- 《금왕읍지》에서 옮김.
소재지 : 금왕읍 도청리
규 모 : 전체높이 270cm, 일반형
시 대 : 1970년
비 문 :
《孝子一玉處士鄭公之碑》
夫孝百行之源爲人子而能致其道則宜可以法當時傳後世余於一玉鄭先生見之矣 謹按先生諱圭永字命汝貫草溪一玉其號也 莊光際忠孝兩全底竹溪先生諱昌之十四世孫 宣廟時五孝之第四 贈參議諱國櫓之九世孫也 考諱孝善文學德望爲一鄕表率 高宗朝薦監役不就妣安東金氏士人東植女壺德極備有三男先生其季也 九歲丁母憂葬之日口絶食飲哀號擗踊衰不去身儼若成人鄕中長老稱其出天之孝其於監役公也志體之養無不用其誠及其年老病欲每夜沐髮潔衣禱天願代時值嚴冬有欲鶉煮之命先生焦煎不已彷徨山野數日不食忽有數鶉入懷熬蒸進見效又有得蔘根於雪中巖
底而進供久患平復若非誠孝之感於神明安能致此所謂孝子之與造化酬酌如呼吸孚鼓者信可驗矣 監役公有言曰昔聞雪筍氷鯉詎料今我食雪鶉氷蔘耶 若非家兒之孝吾已死矣 由是宗族稱其誠鄕邦頌其孝監役公以天年終先生與其二兄居廬執喪情文備至哭必盡哀墓必日省服除後朔望展墓終身不廢且以瞻望楣其所居之軒坐必向墓致終身之慕於乎休哉 先生天資粹美濡染庭訓立心制行剛明正大嘗入泮宮與名碩諸公講學於靑龍寺以尊聖道僻異端爲本辨華夷晳義利爲主學問德行蔚然著世廟堂文字多出於先生之手且見時潮怪異杜門求志因築講齋號以道莊乃導率門秀及鄕英或親自訓迪或延師曉諭各充飲河之量其扶育作成之功果何如哉 此所謂以不扶持而扶持者也 晚來與晦堂尹膺善石泉鄭世永石農吳震洙菊潭鄭萬憲與先人淸潭府君諱 炤用及諸賢( 원문에는 灼用이나《仰城面誌, 2014년》를 보면 宋錫星의 부친은 淸潭 宋炤用으로 나온다. 고친다. )講論經旨毫分縷晳爲道義之交且奉先之誠裕後之謨睦族之誼交友善處世之方詩格之冲(沖)和文辭之淸雅皆孝字上推去而允合規度雖由生質之美而亦有得於學問之力不可誣也 嗚呼 世値陽九人紀滅如崇報之典無可以任其責者然彛衷之極天岡墜故公論峻發章甫協謀伐此牲石特闡先生之孝行竪于陰城治西金旺之道晴使過者式焉 且以爲來世法於是尤感諸公尊賢衛道之誠而陽復之兆未始不權輿於此則豈非吾林之幸耶 自顧人微識淺不敢當襃(褒)揚之筆而其勤囑誼不固辭乃謹撮事實如右而歸之若夫幹其事董其役者胄孫祖憲及章甫趙炳天鄭用煥孫錫炘吳舜根也
中原郡 仰城面 永竹里 後學 恩津 宋錫星 撰]
<표점정리>
夫孝,百行之源。爲人子而能致其道,則宜可以法當時,傳後世。余於一玉鄭先生見之矣。
謹按,先生諱圭永,字命汝,貫草溪,一玉其號也。莊光際忠孝兩全底竹溪先生諱昌之十四世孫,宣廟時五孝之第四,贈參議諱國櫓之九世孫也。考諱孝善,文學德望,爲一鄕表率。高宗朝薦監役,不就。妣安東金氏,士人東植女,壺德極備。有三男,先生其季也。
九歲丁母憂,葬之日,口絶食飲,哀號擗踊,衰不去身,儼若成人。鄕中長老稱其出天之孝。其於監役公也,志體之養,無不用其誠。及其年老病,欲每夜沐髮潔衣,禱天願代。時値嚴冬,有欲鶉煮之命,先生焦煎不已,彷徨山野,數日不食。忽有數鶉入懷,熬蒸進,見效。又有得蔘根於雪中巖(문맥상 눈속 바위 아래가 맞다. 비문에 巖의 이체자인 碞자를 많이 쓰는데 혼동한 것 같다. 원문의 嚴자를 巖자로 고친다. )底而進供,久患平復。若非誠孝之感於神明,安能致此?所謂孝子之與造化酬酌,如呼吸孚鼓者,信可驗矣。
監役公有言曰:「昔聞雪筍氷鯉,詎料今我食雪鶉氷蔘耶?若非家兒之孝,吾已死矣。」
由是,宗族稱其誠,鄕邦頌其孝。監役公以天年終,先生與其二兄居廬執喪,情文備至。哭必盡哀,墓必日省。服除後,朔望展墓,終身不廢。且以瞻望楣其所居之軒,坐必向墓,致終身之慕。於乎休哉!(이 부분은 원문이 좀 어색하다. 《금왕읍지》에 정규영(鄭圭永, 1857 ~ 1932)에 관해 쓴 글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 시묘(侍墓)를 하면서 문뒤에 첨망헌(瞻望軒)이라 제(題)하여 붙이고 항상 묘를 향하여 앉았으며]그럼, 且以『瞻望』題其所居之軒之楣 또는 題其所居之軒 또는 扁其所居之軒이라 해야 한다. 여기서는
且以『瞻望』題其所居之軒之楣이 맞을 것 같다.
先生天資粹美,濡染庭訓,立心制行,剛明正大。嘗入泮宮,與名碩諸公講學於靑龍寺,以尊聖道、僻異端爲本,辨華夷、晳義利爲主。學問德行,蔚然著世。廟堂文字,多出於先生之手。且見時潮怪異,杜門求志,因築講齋,號以道莊,乃導率門秀及鄕英,或親自訓迪,或延師曉諭,各充飲河之量。其扶育作成之功,果何如哉?此所謂以不扶持而扶持者也。
晚來,與晦堂尹膺善、石泉鄭世永、石農吳震洙、菊潭鄭萬憲,與先人淸潭府君諱炤用及諸賢( 원문에는 灼用이나《仰城面誌, 2014년》를 보면 宋錫星의 부친은 淸潭 宋炤用으로 나온다. 고친다. ),講論經旨,毫分縷晳,爲道義之交。且奉先之誠、裕後之謨、睦族之誼、交友善處世之方、詩格之冲(沖)和、文辭之淸雅,皆孝字上推去,而允合規度。雖由生質之美,而亦有得於學問之力,不可誣也。
嗚呼!世値陽九,人紀滅如,崇報之典,無可以任其責者。然彛衷之極,天岡墜,故公論峻發,章甫協謀,伐此牲石,特闡先生之孝行,竪于陰城治西金旺之道晴使過者式焉。且以爲來世法。於是,尤感諸公尊賢衛道之誠,而陽復之兆,未始不權輿於此,則豈非吾林之幸耶?
自顧人微識淺,不敢當襃(褒)揚之筆,而其勤囑誼不固辭,乃謹撮事實如右而歸之。若夫幹其事、董其役者,胄孫祖憲及章甫趙炳天、鄭用煥、孫錫炘、吳舜根也。
中原郡 仰城面 永竹里 後學 恩津 宋錫星 撰
<번역문>
《일옥(一玉) 정 선생 효행비문》
효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능히 그 도리를 다한다면 마땅히 당대의 본보기가 되고 후세에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옥 정 선생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규영(圭永)이요, 자는 명여(命汝)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일옥(一玉)은 그 호(號)이다. 장광제(莊光際)에 충효를 모두 온전히 갖추었던 죽계 선생 창(昌)의 14세손이며, 선묘(宣廟) 때 오효(五孝) 가운데 네 번째로 꼽힌 분이자 증 참의(贈參議) 국로(國櫓)의 9세손이다.
아버지의 휘는 효선(孝善)이니, 문학과 덕망으로 한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고종 때 감역(監役)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사인(士人) 동식(東植)의 따님이며, 부녀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행을 지극히 온전히 갖추었다. 아들은 셋이었는데, 선생은 막내였다.
선생은 아홉 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날 음식을 끊고 마시지도 않으며, 슬피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뛰었으며, 상복을 몸에서 벗지 않아 의젓하기가 마치 어른과 같았다. 고을의 장로들은 선생의 효성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아버지 감역공을 섬김에 있어서도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봉양과 몸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봉양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연로하고 병들자, 선생은 밤마다 머리를 감고 옷을 깨끗이 갈아입은 뒤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의 목숨으로 아버지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버지께 메추라기를 삶아 드리려 하였다. 선생은 마음을 태우며 애를 태웠고, 산과 들을 헤매면서 며칠 동안 먹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메추라기 몇 마리가 품 안으로 들어오자, 이를 삶고 쪄서 아버지께 올렸는데 효험이 있었다.
또 눈 속의 바위 아래에서 산삼 뿌리를 얻어 아버지께 올려 드렸더니, 오랫동안 앓던 병이 나았다. 만약 정성스러운 효성이 신명(神明)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효자가 조화(造化)와 서로 응답하는 것이 마치 숨을 쉬고 북을 울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말이 참으로 증험된 것이다.
감역공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눈 속의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 이야기는 들었지만, 오늘날 내가 눈 속의 메추라기와 얼음 속의 인삼을 먹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내 아들의 효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종족(宗族)은 선생의 정성을 칭송하고, 고을 사람들은 그 효성을 기렸다.
감역공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두 형과 함께 여막에서 지내며 상을 치렀는데, 애통한 마음과 예법을 모두 지극히 갖추었다. 곡할 때마다 슬픔을 다하였고, 묘소에는 반드시 날마다 찾아가 살폈다. 상복을 벗은 뒤에도 초하루와 보름마다 성묘하여 평생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선친이 거처하는 집의 처마를 바라보고, 앉을 때마다 반드시 묘소를 향하여 앉음으로써 평생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다.(且以瞻望楣其所居之軒,坐必向墓,致終身之慕。於乎休哉!이 부분은 원문이 좀 어색하다. 《금왕읍지》에 정규영(鄭圭永, 1857 ~ 1932)에 관해 쓴 글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 시묘(侍墓)를 하면서 문뒤에 첨망헌(瞻望軒)이라 제(題)하여 붙이고 항상 묘를 향하여 앉았으며] 그럼, 且以『瞻望』題其所居之軒之楣 또는 題其所居之軒 또는 扁其所居之軒이라 해야 한다. 여기서는
且以『瞻望』題其所居之軒之楣이 맞을 것 같다.)
아아, 아름답도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가정에서 받은 가르침에 깊이 물들어 마음을 세우고 행동을 절제함에 강직하고 밝으며 정대하였다.
일찍이 반궁(泮宮)에 들어가 이름난 학자와 여러 선비들과 함께 청룡사(靑龍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성인의 도를 높이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을 밝히고 의리와 이익의 분별을 명확히 하는 것을 주된 뜻으로 삼았다.
학문과 덕행이 성대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조정의 문서 가운데에도 선생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또한 당시의 풍조가 괴이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자신의 뜻을 구하였다. 이에 강학하는 집을 짓고 도장(道莊)이라 이름하였다.
그런 다음 문중의 뛰어난 후배들과 고을의 영재들을 이끌어 가르쳤는데,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스승을 초빙하여 깨우쳐 주기도 하였다. 그들 각자가 강물을 마시듯 자신의 그릇에 맞게 학문을 충분히 이루도록 하였다. 그들을 북돋우고 길러 성취하게 한 공(功)이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른바 억지로 붙들어 주지 않으면서도 실은 붙들어 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만년에는 회당 윤응선(尹膺善), 석천 정세영(鄭世永), 석농 오진수(吳震洙), 국담 정만헌(鄭萬憲), 그리고 돌아가신 나의 선친 청담 부군 휘 소용(炤用)을 비롯한 여러 현인과 함께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다. 그 이치를 털끝만큼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도의로 맺어진 벗이 되었다.
또한 선조를 받드는 정성, 후손에게 물려줄 계책, 친족을 화목하게 대하는 도리, 벗을 사귀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시의 격조가 온화하고 조화로운 점, 문장의 말씨가 맑고 우아한 점이 모두 하나의 글자인 ‘효(孝)’에서 미루어 나온 것으로, 참으로 법도에 부합하였다.
비록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문에 힘쓴 결과로 얻은 바 또한 있었으니, 이를 부인할 수 없다.
아아! 세상이 액운을 만나 인륜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는 형편이 되니, 선현을 높이고 보답하는 일을 맡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타고난 선한 마음은 지극히 굳건하니, 하늘의 벼리가 무너졌더라도 공론이 엄정하게 일어나 선비들이 뜻을 모았다.
이에 이 돌을 다듬어 세워 특별히 선생의 효행을 드러내고, 음성(陰城) 고을 서쪽 금왕(金旺)의 도청리(道晴里)에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 또한 후세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竪于陰城治西金旺之道晴, 使過者式焉。且以爲來世法。
道晴里는 이 碑가 세워진 곳의 法定里이다. 道庄里와 晴日里에서 한 字씩 따왔다.)
이 일을 생각하니,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지키려는 여러 선비의 정성에 더욱 감동한다. 양기가 회복되는 조짐 또한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니, 어찌 우리 유림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사람됨이 미천하고 식견이 얕아 선생을 찬양하는 글을 지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 그러나 간곡하게 부탁받은 정리를 생각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삼가 사실을 간추려 위와 같이 기록하여 돌려드린다.
이 일을 주관하고 공사를 감독한 사람은 종손 조헌(祖憲)과 장보(章甫) 조병천(趙炳天), 정용환(鄭用煥), 손석흔(孫錫炘), 오순근(吳舜根)이다.
중원군 앙성면 영죽리에서 후학 은진 송석성(宋錫星)이 짓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