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일봉이 훈장한테 큰절을 올리고 꿇어앉아 “훈장님, 그간 저를 귀엽게 봐주신 은혜 목숨이 다하도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훈장은 일봉이 서당을 그만두고 장삿길로 들어서겠다는 걸 며칠을 두고 만류했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마지막 작별 인사를 받고 말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공부를 해서 출세하는 것은 나라의 녹을 먹으며 부정축재를 하라는 얘기라 아예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훈장이 한마디 했다. “장사에도 지켜야 할 상도(商道)가 있는 법이여.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 자제할 줄 알아야 해.” 일봉은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7세 일봉은 단봇짐 하나 메고 나루터 주막으로 가 보부상 행수(行首)에게 큰절을 올리고 새끼손가락을 물어뜯어 흐르는 피를 술잔에 따랐다. 행수 어른도 피를 뽑아 두잔을 만든 뒤 팔을 걸어 나눠 마셨다. 보부상 규율을 목숨으로 지키고 행수 어른의 명에 반드시 따르겠다는 맹세다. 스물두명의 상단(商團)에서 일봉은 막내였지만 학벌이 가장 좋아 치부책을 맡았다. 걷고 걷다가 강을 만나 황포돛배를 타고 충남 금산에 다다랐다. 금산 인삼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서 고리짝에 넣었다. 전남 강진으로 갔다. 삭힌 홍어 안주에 남도에서 담근 동동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이튿날 새벽 강진항에 나섰건만 가기로 한 판옥선을 개조한 대형 황포돛배가 오지 않았다. 사흘을 기다려도 선주는 이런저런 핑계로 배를 출항시키지 않았다. 성질 급한 행수 어른은 영산강을 오가는 수참선을 빌렸다. 바다가 호수처럼 조용한 것도 행수 어른의 무모한 결정을 부추겼다. 조선 인삼이라면 불로장생 약이라 여기는 중국에 가져다 팔면 경면주사가 동날 일도 없는데 성질 급한 행수 어른은 참지 못했다.
황해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하늘엔 구름 한점 없고 수참선은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모두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고 일봉은 뱃전에서 희미한 등불 아래 치부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얌전하던 하늘에 달이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더니 바람이 심상찮았다. 배가 흔들려 갑판 위를 걷기 힘들었다.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어어!” 하는데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쳤다. 일봉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타고 있던 수참선이 난파돼 어느 이름 모를 섬에 닿아 있었다. 수참선 선주가 살았고 행수 어른도 살았다. 금산 인삼을 몽땅 쓸어 담아온 고리짝은 흔적도 없었다. 해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이 일어나 기어 나왔다. 산 사람이 모두 일곱, 바닷물에 잠겼던 쌀자루를 건지고 난파선의 잔해도 하나하나 건져냈다. 외딴 이 섬은 크지 않았다. 그나마 힘이 남아 있던 일봉과 행수, 참수선 선주 이렇게 셋이 섬을 한바퀴 돌았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민물 샘을 찾았고 비를 피할 동굴도 발견해 모두 동굴로 들어가 쓰러졌다.
동굴 벽 한쪽을 두드리던 사람이 깜짝 놀랐다. ‘통통’ 속이 비었다는 얘기다. 큰 돌로 내려치자 벽이 무너지고 보물이 나왔다. 다 죽을 것처럼 끙끙 앓던 사람들도 벌떡 일어나 모두 벽에 달라붙어 보물 캐기에 매달렸다. 난파선 조각들을 모아 배를 만들던 선주와 사공도 하던 일을 팽개치고 보물 파기에 매달렸다.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생쌀이나 육포를 뜯어 먹으며 몇날 며칠 밤낮으로 보물을 캐던 사람들이 보물을 안은 채 기운이 소진돼 픽픽 쓰러졌다.
일봉이 행수 어른을 잡고 흔들었다. “행수 어른, 이 섬을 탈출해야 합니다. 곧 겨울이 닥치고 양식도 떨어집니다.” 일봉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선주뿐이었다. 선주와 일봉은 배 만들기에 매달렸다. 바람이 잔잔한 날 둘은 뗏목에 올랐다. 노련한 선주는 패철(나침반) 하나와 달과 별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 배가 흔들렸다. “일봉이, 단봇짐을 바다에 던지게.” 보물이 들어 있는 무거운 단봇짐을 바다에 던진 일봉은 얼굴이 벌게졌다. 흑산도 해변에 쓰러진 선주와 일봉은 목숨을 건졌다. 소문처럼 떠돌던 보물섬을 찾아 수많은 호사가들이 도전하다가 어느 뱃사람이 그 섬을 찾은 건 십여년이 지나서였다. 동굴에 보물은 없어지고 다섯개의 백골만 흩어져 있었다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