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분수 (삼하 19:31-39)
31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이 시간에 “위대한 분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들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곧,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분수란, 아시는 대로 자기 능력과 신분에 맞는 한도를 뜻합니다. 이건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게 별걸까 생각하기 쉽지만, 솔로몬처럼 박학다식하지 않을지라도, 어느 고관백작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 분수만 알면 그 사람은 실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2:3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본문에서 봅니다. ‘바르실래’라는 사람입니다. 바르실래는 이스라엘의 요단 동편 길르앗 로글림에 살던 부자로 피난길에 오른 이스라엘 왕 다윗을 도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 읽진 못했지만 성경의 구구절절이 흐르는 문맥 속에서 그가 얼마나 충성되었으며 특히 자기 분수를 잘 안 사람이었는지 느끼게 됩니다. 우리 신앙에도 분수가 필요합니다.
분수를 알면 어떤 복이 있을까요?
1. 분수를 알면 성공이 있습니다.
32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그랬습니다. 큰 부자였습니다. 이건 도둑질해서 된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한 번 보면 ‘바르실래’ ‘무쇠처럼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무쇠처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쇠가 무른 쇠인 줄 알았는데 대문에 나사를 박아보려고 전동 드라이버로 애써봤지만 뚫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쇠는 쉽게 뚫어지는데 무쇠는 뚫리지 않습니다. 쇳물을 부어 만든 것인데 왜 그렇게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바르실래는 그 이름 그대로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 외적 많은 요단 동족 변방에서 무쇠 같은 마음으로 굽히지 않고 사업가로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본 모습이고 이것이 그의 분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살았더니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공하려면 자기 소질과 은사를 알고, 자기 능력과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형편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기술도 머리도 무엇도 없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열배 백배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분수를 모르고 다른 사람이 밤잠 자지 않을 때 나는 방심한다면 어떻게 경쟁에서 승리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신앙의 배경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영적 환경도 열악하다면 밤을 새워 가면 성경 읽고 부르짖고 사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믿는다면 몇 배로 힘써야 합니다. 분수만 알면 성공합니다.
2. 분수를 알면 충성합니다.
32절에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성경 기자는 그가 큰 부자이므로 당연히 왕을 공궤했다는 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가 참 잘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자기 분수에 맞게 왕을 도왔습니다.
삼하 17장을 보면 그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겨 다닐 때 다윗과 그 군사들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을 공급했습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눅12:48에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교회에서도 자기 분수에 맞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최선을 다한다면 부자는 당연히 더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부자는 제 몫을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해서 운영되더라고요. 그리고 직분에 맞는 분수여야 합니다. 직분에 맞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건강 주셨을 때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고전6:13에 “몸은 -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주를 위해 몸을 드릴 때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반대가 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를 바랍니다. 히스기야처럼 어려울 때 쓰게 몸과 마음의 헌신 저축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회 고시부장도 해봤지만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교회로 돌아가서 잘해야지, 분수를 모르고 하다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수님도 분수를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헌금궤 곁에서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액수보다 분수를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내용은 진분수였고, 가난한 자는 몇 푼 되지 않았지만 가분수였습니다. 바르실래는 진분수도 아니고 가분수도 아닙니다. 부자였으므로 당연히 도와야 했습니다. 굳이 가분수가 아니어도 분수에 맞게만 행동한다면 그 자체로도 아름답습니다.
옛말에 군사부일체라 했습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같다는 뜻입니다. 나이로 봐도 바르실래가 훨씬 많았지만 왕은 어려도 왕이요, 피난 길에 올랐어도 왕은 왕입니다. 더구나 적의 변방에서 다윗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한 분이신 것을 안다면, 그리고 장차 천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살 것인지 안다면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받은 은혜만 안다면 날마다 찬송해도 다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분수를 알면 겸손합니다.
33절에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함께 가지고 하니까 바르실래가 자기 나이를 부각시키며 어찌 왕께 누를 끼치겠냐고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평안히 죽겠다고 사양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로 자기를 안다면 교만할 리가 없지요. 모르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 천한 흙덩이로 만드셨을까요. 다 잘 만드셨는데 왜 추한 흙덩이를 우리에게 붙여 놓으셨는지,,, 그래서 위대합니다. 그것은 더 큰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영원토록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티끌에서 취하셔서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인 줄 알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4. 분수를 알면 소망이 보입니다.
37절에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여기 김함은 바르실래의 아들입니다. 바르실래는 왕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는 반면 자기의 아들을 부탁하였습니다.
“김함”의 뜻은 ‘갈망함’, 바르실래는 아들에게 대한 무언가 갈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노동하며 살았지만 너만은 위대해지길 바란다.’ 왕상 2장을 보면 다윗이 바르실래의 후손들을 후대하라고 유언했는데 왕이 유언할 정도면 대 성공한 것 아닙니까?
성공적으로 바르실래는 죽고 김함은 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내가 죽어져야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산 순교자가 되어야 내 영혼이 살고 하나님께서 후대하십니다. 소망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아버지 앞에서 아들로서의 분수를 지키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분수를 알면 성공합니다. 분수를 알면 아름답습니다. 분수를 알면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바르실래처럼 분수에 합당하게 행하여 가장 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