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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8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8장. #아브라함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그리스도께서 두 천사를 먼저 소돔으로 보내시고 아브라함과는 좀 더 대화를 나누시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특별하고 다정하게 대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여러 차례 언약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굳이 천사들을 대동해서 아브라함의 눈에 띄도록 오실 이유가 없으셨다. 게다가 그렇게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점검하시려는 목적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순찰하시는 것보다는 아브라함을 방문하시는 것이 주 목적이신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보이시고 인간에게나 유익할 뿐이고 하나님께는 그 어떤 유익도 없을 인간의 음식을 흡족히 드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는 하등 상관없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것도 굳이 일부러 말씀하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너무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비밀도 나누시고 싶어서 못견뎌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모든 자녀들을 아브라함을 대하시듯이 사랑스러워 하시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우둔하여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중간에 취소됨이 없이 영원하므로 사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이 끊어질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그 사랑을 악용하여 방자하게 행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려 절망하게 하는 양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고난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견뎌낼 수 있어야 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별 걱정없이 형통한 때를 살아가는 중에도 혹시나 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게 될까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더욱 충만한 비밀을 허락하시는데 그 비밀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신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 시대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환상 등의 직통계시로 하늘의 비밀을 주시기를 바라서는 안되고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더욱 깊고 풍성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
아브라함은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매우 기뻐하였겠지만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도리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간구한다. 아브라함의 간구가 소돔과 고모라에 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걱정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이 걱정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후자가 당연하겠지만 속마음을 숨길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롯에 대한 걱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아슬아슬한 티키타카를 진행한다. 사실 아브라함으로서는 절대선이신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에 아무런 토를 달 자격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 하신들 거기에 그 어떤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고서도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자기 의견을 개진해 나가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건의를 언짢아 하지 않으시고 너그러이 수용하신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을 알리신 이유가 이런 대화를 하고 싶으셔서가 아닐까 싶다. 이미 그 도시들에 대한 심판은 결정되었더라도 아브라함에게서 그 도시들을 위한 간구와 기도를 이끌어내심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선을 쌓게 하시고 상급을 주시기 위해 그러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모세에게도 비슷한 간구를 들으셨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대적하여 들고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시고 모세를 제외한 모든 백성을 멸하려 하셨으나 모세의 목숨을 건 간구를 들으시고 그 진노를 거두셨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내밀고 겉옷을 뺏는 자에게 속옷도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함으로써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모든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므로 신자된 우리는 심판을 행하려 하지 말고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이는 분명 우리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오로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소부재하셔서 안계신 곳이 없으시고 전지하셔서 모르는 것이 없으시며 전능하셔서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천사들과 대동하셔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직접 순찰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시려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순찰하러 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숲에 숨어있을 때에도 그를 부르시면서 직접 찾으셨고 심판의 홍수 이후 사람들이 성읍과 탑을 쌓을 때에도 직접 순찰하시며 니느웨 성에는 요나를 통해 40일 동안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범죄한 인간들에게 약간의 유예를 두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그 순간이나마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셔서 그러신 것 아니었을까 싶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범죄할 때도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태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교인들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심판하지는 않으신다. 오랜 기간을 두시고 범죄한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그런데도 패역한 교회와 교인들은 죄를 짓고도 아무런 심판이나 징계가 없으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더욱 담대히 죄를 짓다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 악한 교회와 교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거나 징계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복이자 저주이다. 복이라 함은 그들이 돌이켜 회개할 기간이 주어졌기 때문이고 저주라 함은 그럼에도 그들이 깨닫지 못하여 결국 점진적으로 죄악의 분량이 쌓여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건 교인이건 신앙의 연륜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기간 동안 얼마나 죄를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왔는지를 살펴보고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한 열매가 없다면 기간이 오래 되어봤자 멸망 받을 심판의 날이 가까웠음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20210108
#민수기 #Numbers 23:1-4 #발람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규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드렸던 것과 같은 족장 시대의 초기 제사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람은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아니었어도 여호와께로부터 예언을 받는 자였으므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발람은 일곱이란 숫자가 여호와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일곱 제단과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숫양으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어쩌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상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여호와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사 규례에 따르지 않는 몇몇 제사들을 받으시기도 하시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는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를 드린 것은 광야 40년과 솔로몬이 통치한 40년과 이후 소수의 선한 왕이 통치했을 때가 전부이다. 솔로몬이 통치하기 전에는 기드온, 입다, 삼손의 부모, 사무엘 등이 규례 외 제사를 드렸고, 다윗조차도 자기 범죄로 인해 백성이 죽어나갈 때 이를 대속하기 위해서 아라우나의 밭에서 규례 외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르호보암 때에 여로보암이 반역하여 세운 북 이스라엘에서는 참된 제사가 중단되었으므로 엘리야가 바알 아세라 제사장들과 대결하면서 규례 외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런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고 해서 이런 제사들이 제사 규례와는 별도로 보편적인 효력을 가진 제사라고 볼 수는 없다. 도리어 이런 규례 외 제사들은 그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단 한가지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고 전부 제각각이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제사의 보편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규례 외 제사들이 드려진 각각의 시대와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거의 바닥으로 떨어져 있거나 율법과 규례들이 확립되기 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 등의 사사시대에는 백성들이 반복적으로 범죄하였고, 여로보암이 세운 북 이스라엘은 시작부터 하나님을 떠났다. 사무엘과 다윗 시대에는 그런 신앙의 바닥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도기였다. 따라서 이러한 규례 외 제사들은 모두에게 주신 제사법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특별한 섭리로 세우신 이들을 통해서 예외적으로 허락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역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종종 남들과는 아주 다른 신앙체험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으 명백하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체험은 너무나 신비하고 특별해서 많은 신자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 위주로 모이게 마련이고 자기들도 그러한 체험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게 되면 그 체험자는 간증이란 형식을 빌어 목사가 아님에도 교회에서 가르친다거나 출판을 한다거나 하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의 체험이 있어야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선을 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현혹된 적지 않은 교인들은 그 체험자를 위주로 교회 내에서 파당을 짓거나 심지어는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버리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비한 영적체험은 마치 구약시대 규례 외 제사와도 같아서 아무에게나 보편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그러한 체험과 은사들은 체험자가 속한 시대와 장소와 교회의 상황에 따라 한시적으로 특별하게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존속하기까지 변하지 않는 제사 규례를 주셨듯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성경과 교회예식 등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며 변하지 않는 신앙의 도구들을 주셨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먼저 이러한 보편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자라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반면에 이러한 보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신비하고 신령한 영적 체험 자체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서 사탄마귀의 짓이라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는 우리가 감히 측량하거나 판단할 수 없으므로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는 미명하에 모든 신령한 체험을 부정하는 것은 자칫하면 하나님이신 성령을 우리 수준으로 제한하고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민수기 #Numbers 23:5-30 #발람
5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12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여호와께서는 발람의 제사를 받으시고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씀을 주시면서 발락에게 전하라고 명하신다. 이에 발람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예언을 그대로 발락에게 전하는데, 발락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예언을 듣자 발람을 질책한다. 아마도 여호와께서는 모압 왕과 신하들을 배제하시고 오로지 발람에게만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모압 왕과 신하들도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신 여호와를 흑운과 뇌우 등으로 본 것처럼 무언가 표징을 보았다면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예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발람을 질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특별한 무언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락은 발람이 여호와의 예언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기를 대적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발락의 질책을 들은 발람은 자기는 이스라엘을 반드시 저주하겠노라고 말한적도 없고 오로지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말씀만 전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발락이 자기 멋대로 오해해고 화를 내자 그에게 대꾸하며 항변한다. 어쩌면 여전히 발람에게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축복함으로써 발락이 주는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 본심도 몰라주고 질책하는 발락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받는 모든 부당한 취급은 마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발락의 계략과 음모와도 같다. 여호와께서 발락의 계교를 역이용하셔서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듯이, 교회와 성도 또한 절대 끊어지지 않는 성령의 끈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주는 부당함을 도리어 교회와 성도들에게 선한 것으로 바꿔주신다. 때로는 그것이 이 땅에서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급으로 주신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받는 고난에 대해서 이 땅에서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발람의 두 번째 예언
13 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14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
15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16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17 발람이 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고관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18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21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2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23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25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26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
모압 왕 발락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면서 모압 신을 섬기는 아주 영험한 곳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두번째에도 여호와께서는 첫 예언보다 더 강력하고 확실한 예언을 발람에게 주셨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죽을 인생처럼 후회도 없으시기 때문에 한 번 작정하시고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야곱 개인의 허물은 커녕,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반역도 무시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복주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신들이나 귀신의 힘을 빌린 점술이나 복술로도 이스라엘을 해칠 수는 없으시다는 것이다. 발람은 이번에도 어쩔수 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발락에게 전해야 했다. 발락이 실망과 원망과 질책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모든 복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원불변하시고 진실하시며 미쁘신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부터 이스라엘처럼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우기도 전에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 안에서 무시하신다. 애굽에서 이끄신 이스라엘을 힘센 물소에 비유하셨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로 삼으신다. 하나님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시게 하셨으니 공중권세 잡은 자라도 설령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을지언정, 영원한 사망은 줄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발람의 세 번째 예언
27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28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
29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30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두 번이나 제동이 걸리고도 발락은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 요청한다. 모든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런 발락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여호와를 모르는 발락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처사다. 또한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집요함은 예수께서 경고하신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우는 사자처럼 찾아다니면서 밀까부르듯이 하려는 마귀의 계략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덕진지를 드러낸다. 하늘의 붉은 용은 북극 보좌를 탈취하려고 하나님의 군대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실패하여 쫓겨나 땅에 떨어진다. 붉은 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자와 그녀의 아들을 많은 물을 토해 삼켜 죽이려 하나 이번에는 땅이 입을 벌려 물을 삼켜 실패한다. 그러자 붉은 용은 포기하지 않고 바다와 땅에 자기 형상대로 두 짐승을 세워 세상을 미혹하고 장악하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에서 내려 온 두 선지자에 의해 1260일 동안 저지를 당하게 된다. 눈엣가시 같은 두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두 선지자들은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들림을 받음으로써 붉은 용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세운 두 짐승과 그 짐승들이 세운 거짓 선지자들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되고, 용 자신은 천사들에게 결박되어 1천년 동안 감금된다. 1천년이 지나 풀리게 되자 용은 마지막으로 온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추종하는 악인들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큰 군대를 만들고서는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한다. 하지만 이 전쟁에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참전하셔서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칼날로 용의 군대를 멸하시고 붉은 용은 영원히 타는 불못에 던져넣으신다.
#20180108
#미혹
‘미혹’에는 두 부류의 관계자가 있다. 한 부류는 미혹하는 자이고, 다른 한 부류는 미혹당하는 자이다. 미혹하는 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거짓과 왜곡과 과장과 날조 등으로 미혹한다. 미혹당하는 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미혹하는 자의 이야기를 듣고 분별력이 없이 미혹된다.
이러한 미혹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미혹하는 자는 그 악의적 미혹으로 인해 그에 따른 적법한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미혹당하는 자는 미혹하는 자로 인해 손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그 손해를 만회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자신이 당하게 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악질 사기꾼이 여러 현란한 감언이설로 여러 사람을 사기쳤다가 들통이 났다고 하자. 그럼 그 사기꾼은 사기를 친 것에 대한 법적 처벌을 받게 되나,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어디서도 보상받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미혹이라는 것은 미혹하는 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미혹당하는 자에게도 그 책임이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미혹’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적하는 미혹이 있고, 하나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의 미혹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미혹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고 왜곡하고 과장하고 축소하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진리를 미혹하는 주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귀라고도 하고 옛 뱀이라고도 하는 사탄이다. 이 옛 뱀의 미혹으로 인해 하와가 미혹당했고,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인 아담까지 미혹에 끌어들이게 된다. 구약의 여러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영에 미혹되어서 잘못된 예언을 하고 참된 예언을 하는 선지자를 핍박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마귀의 미혹을 받지 않으려면,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에 기초한 지식보다는 수천년 간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사를 주신 위인들을 통한 보편적인 바른 해석에 기초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을 기초로 하여 지금까지 정립되어 온 보편적인 신앙고백들인 것이다.
삶 가운데서의 미혹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바른 성경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온전히 삶에 적용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상에서의 잘못된 판단들이다. 이는 주로 자신이 자라오고 경험해 온 것들로 인해 형성된 가치관과 자아가 성경보다 우선하여 생기는 것들이다. 때문에 교회신자들 중에서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비방하고 박근혜 정부를 두둔하고, 박근혜와 박정희를 신성시 하며, 촛불집회가 아니라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며, 자유한국당과 같은 시정잡배들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삶에서의 미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내 생각과 가치관을 끊임없이 성경의 잣대로 들이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성경의 판단 기준 중에서 가장 함축적인 것은 십계명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적어도 자신의 판단 기준을 일차적으로 십계명에 먼저 들이대기만 해도, 대부분의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진리에서건 삶에서건 미혹을 당하는 신자들은 마치 멸망하는 바벨론 성에 여전히 안주하고 있는 신자들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미혹된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이 경고를 무시하고 여전히 바벨론 성에 남아있기를 좋아하는 신자들은, 멸망의 때에 자신들에게 닥칠 주의 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