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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운흥사지 원문보기 글쓴이: 운흥동천
오늘은 노스님 40 년 추도일이다.
본납은 어릴적 아주 깊은 산 속, 옛 산사에서 노스님께 배우며 뫼시고 함께 살았다.
6 0 년도 어려운 시기라 어디를 다녀 올라치면 차비가 문제가 아니 될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 노스님께서는 요즈음 말로 교통비를 주시다 못해 항상 인색하게 주셨다.
그렇지만 탈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흔쾌히 심부름을 다녀오는 버릇이 있었다.
심부름이란?
절의 일상용품 구매며 신도님댁에 들려 노스님의 안부와 함께 사찰의 소식을 전하는가 하면
다녀 올때는 신도님들이 노스님 몰래 건네 주시는 보시금인 즉 비자금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비자금이란?
오랫만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영화관람도 하고 제과점에 들려 맛 있는 군것질도 하고
서점에 들려 이것 저것 책자도 살펴 보면서 호사를 즐길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자청 타청 우짜던지 사찰을 빠져나갈 궁리만 하였던 것이다.
산사에 와서는 막차를 놓쳤다 느니.. 아니면 신도님의 권유에 못이겨..
이유 아닌 핑개를 되면은 노스님께서는 저윽이 아시면서도 믿어 주셨다.
그리고 몰래 사 온 불온 책자를 이불 밑에서 밤 새 읽기도 하였다.
어느날 그 만 늦잠이 들어 눈을 떠 보니 책자가 온데 간데가 없었다.
공양 시간이 되었는 지라.. 허둥 지둥 공양실로 들어가 보니
노스님께서는 "너! 공양하고 내 방으로 좀 오라!"는 엄명을 주셨다.
이윽고 녹크를 하고 방안에 들어가면 노스님 앞에 눈에 익은 책자 들이 보였다. "너! 이 책들 아느냐?"
하시며 위엄스럼 말씀을 하셨다. "제가 어제 사온 책들 입니다!..아직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시 본납 앞으로 훌쩍 던져 놓어며 당장 후원 아궁이 불속에 넣고 들어 오라고 하셨다.
그 곳 공양간 아궁이에는 시뻘건 작장 불이 먹을 것을 더 달라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어다.
책을 넣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노스님의 영을 어길수도 없는 처지라 몆번이나 망설이다가
끝내 훌렁 던져 넣는 심정은 "심청이 인당수 심정"이라.. 그렇게도 허전하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때에 생에 처음 맛 본, 놓아 버리고 떠남의 고통을 몸소 수련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온 나에게 무거운 침묵을 보이시더니 "너? 방에 가서 짐을 싸라!" 시는 것이다.
왜? 제가 짐을 싸느냐?고 물어 볼 필요가 없이 당시 본납은 눈치상 이 젠 끝이 나는 모양 이구나!
네 죄는 네가 알렸다! 하듯이 그간에 요령을 피우고 적당히 탐닉한 일탈을 노스님께서는 전부 통찰하신
모양이다. 이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솔직히 이실직고 잘못하여 노라고, 용서를 구해 볼 까도 하다가
불 쑥 맡씀드리기를.. "스님! 잘못 하였습니다!
제가 마을에 내려가서 영화구경도 하고 노보살이 주신 용돈도 제가 챙겨 습니다!" 하면서
주머니 남은 금액을 커내 놓어며 부족한 금액은 커서 벌어서 갚게다고 하였다. " 이놈 봐라!
계산은 잘 하시는 놈이.. 그 돈은 니돈이야! 주머니에 다시 넣어!" 그러시더니 다시 추궁하시기를
불속에 넣은 책값은 어떻게 갚겠느냐?"는 추달이시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책 값을 갚아 라니?.. "노스님!..무슨 말씀입니까? 하였드니..
꿀빰을 한대 주시면서 "야!.. 이놈아! 노보살들이 영화 구경하고 이상한 책 사보라고 준 돈인줄 아니!
그 돈은 중노릇 하면서 쓰임세(맏게끔)에 쓰라고 준 보시금일새!.."뭐 나중에 벌어서 값겠다?"고
"뭣을 하여 갚게냐?"고 하는 것이냐?고 닥달을 하셨다.
참으로 알수 없는 말씀 뿐이였다.
그러나 일은 벌어진 것이라 짐작은 하고 방에서 보따리를
챙기자니 기침소리가 나더니 "너 이놈 필요한 것만 챙기라!"라 시는 엄명이시다.
틀림 없이 짐 보자기 검사를 하실것만 같은 예감이라 무척이나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 만이 보고 있던 책자며 또한 일급 문건에 해당하는 사진이며 편지는 어떡 하여야 할까?
한 참 보따리를 꾸리며 망설이 자니..
문 밖에서 기침소리와 함께 "녀석아!..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시면서
"사서면 어서 짐들고 나오는라!"는 것이다. 마치 저승사자가 제촉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산사에서 한참이나 걷고
또 걸어며 내려와 시골뻐스 정류소에 닿았다.
멀리서 먼지를 일어키고 달려오는 뻐스에 올랐다.
마침 시골장이 서는 날이라 이미 승차 한분들이 많았고
아침 시간대라 학생들도 많았다. 노스님이 허리를 숙이시고
서서 계시니 어떤 분이 자리를 양보 하면서 않으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안내양이 차비를 요구 한다.
노스님은 주머니에서 한참이나 뒤지시더니 동전 몇 잎을 꺼내어 안내양에게 건낸다.
그러나 문제가 돌출한 모양이다. 안내양이 승차비가 적어니 더 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노스님은 손바닥에 돈을 올러 놓고서 한참이나 팔을 들고 계셨다.
하여 또래의 아이들이 특히 여학생이 까르르 웃고들 하였다.
그리고 어느 분이 말하기를
"아가씨!.. 노스님이 돈이 부족한 모양이니 그냥 받으라"고 권한다.
어린 나 또한 보고 있자니 창피함을 넘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하여 주머니에 소지하고 있던 지폐를 꺼내어 노스님 손에 조심스럽게 얻저 놓으며
노스님을 흴끔 바라보니 스님께서는 고개를 숙이시고 잠이던 것처럼 두 눈을 감고 계셨다.
분위가 한참이나 이렇게 되고 보니..
차안이 온통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안내양이 어느사이 돈을 가져가 버리는 것이다.
차창을 바라 보면서 '노스님과 뻐스를 다시는 승차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는데..
자꾸만 어린 여학생들이 나를 바라 보고 웃고만 있는것 같아서 여간 곤혹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당시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일 오늘같은 나에게 비자금이 없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중간 강제 하차를 당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하면서..
지금도 이 같은 챙피함을 회상하면 저절로 묘한 미소가 나온다!
이윽고 어떤 신도님집에 도착하니
노스님이 오신다고 많은 신도분들이 와 계셨다.
큰 절을하고 상좌스님도 왔다고 연신 나의 손을 잡아 주셨다.
그리고 노스님이 열차시간을 물어 본 뒤
본납을 가까이 않으라고 하시더니 일장 훈시를 하시는 것이다.
"야! 이놈아 너는 오늘 부터 큰절에 공부하러 간다!. 일체 이곳 생각은 하지도 말고
다른곳으로 도망 갈 생각도 말구? 오직 부처님 이력(강원)을 잘 보고 중노릇 잘하라!" 시는 말씀이였다.
이어 말씀 하시기를 "야!,, 이 건방진 놈아! 나는 차비를 깍고 또 깍어며 다니는데..
니 놈이 돈이 얼마나 있다고 니가 차비를 보태느냐? 중은 더구나 얻어 먹고 사는 것이니..
무엇이던지 아끼고 또 한 절약하여야 한다! 그것이 중노릇 하는 것이며 공부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더니 안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주시면서..
" 이것은? 니! 놈이 큰 절 강원에서 쓸 돈이다. 아껴 쓰도록 하라!" 하셨다. 큰 절 강원은 또 뭐며 돈은 왜? 주시는 걸까?
그 때에 신도님이 노스님앞에 공손히 밥상을 갔다 놓아 드리면서..상좌스님 기차표를 발매하여 왔다며 승차권을 드렸다.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 하시더니..이 차표 받아라고 표를 건네 주셨다.
대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감이 교차 하면서 알수 없는 노스님의 의중과 더구나 그토록 아끼시던 돈 까지 주시다니..
노스님의 마음을.. 대충 짐작은 가는 것이나 도무지 혜아리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또한 일장을 훈시 하시기를
"중이 옷만 입어면 중이라면 허수아비도 중이 되어야 하고 머리를 깍아야 중이라 한다면 머리 깍은 처사 거사가
모두 중일 것이다. 그리고 절을 짓고 부처를 모신곳이 절이 된다면 대나무 세우고 손님 기다리는 곳이 모두 절이 될 것이다.
하여 너는 지금부터 다시 중노릇 하기위해 큰 절에 입문하는 것이다." 당시에 처음 듣는 노스님의 우렁찬 웅변론조의 법문 이셨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계셨고 실 같으신 평소의 눈매에 안광을 발하셨다.
지금의 결론은 '너도 이젠 커서니 큰 절에가서 중으로써의 과정을 밣아라"는 것이었다.
작별을 하면서
"스님!,, 가서 공부 잘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노스님께 큰절을 드렸다. 기다리던 기차를 타고 떠나 오면서
시종일관 알수 없는 슬래임과 큰 절에서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서
지금의 큰 절인 통도사에 처음 불교전문강원에 입학 하였던 것이다.
당시 노스님께서는 상좌를 큰절로 보내면서..
그것도 산에서 팔순노구를 이끌고 역까지 배웅 주시고,
숫한 해 마련해둔 쌈지 돈을 흔쾌후 학업에 보태라고 건네 주신 노스님의 마음을..
진작 스님께서는 한푼도 허투에 쓰시지 않으셨고, 어린 안내양의 수모도 감내 하면서
시줏돈의 쓰임세를 철저히 실천 하신 분이셨다.
그 후 노스님의 노환은 날로 더하고 한 번 가서 효드리지 못함을 편지를 드리니..
한 말씀으로 "일체 나 걱정은 말고 중으로써의 이력을 잘 보라"고 격려를 주셨다.
가을가고 겨울이 오니 당시에 귀한 액세레이 내복을 손수 소포로 부쳐 주시면서
자주 편지하지 말고 "백번 안부 보다는 너가 열심히 공부에 치중하는 것이 났다"고 하셨다.
실로 노스님의 깊은 은혜의 마음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 차릴수가 있어던 것이다.
실토 하지만 당시 본납은 사하촌에 어느 노보살님의 손주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 하고 있었다.
그 때 그는 형편상 서울로 식모살이(파출부)를 갔기 때문에 본납은 상당한 번민에 빠져 있었다.
손녀의 할머니가 잘못 배달한 편지를 노스님이 직접 개봉하여 보시고도 일체 함구무언 하셨고
그 로 인하여 통도사행 유학 길이 앞 당겨 이루어진 사실도 뒷 날에 와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노스님께서는 철딱서니 없고 보잘것 나를 사람이 되고 중이 되는 길을 잘 조준하여 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노스님이 멀리 가셨다. 오늘이 있기 까지 하늘 같은 노스님의 교훈을 잊을수가 없다.
그 토록 아껴 주시고 인도해 주신, 노스님에 마음을 한참이나 지난 후에 비로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일
들은 이야기로 공양을 잘 먹지 않음을 보시고
군음식 하는 줄을 아셨고 늦개 자고 일찍 일어나지
못함을 보시고 사춘기의 과정을 지켜 보셨다는 이야기며
특히 아랫마을 손녀와의 관계를 최우선 걱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본납을 '될 나무를 떡잎 부터 관찰하셨다'는 점이다.
지금은
노스님의 교훈을 전부지키고 사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겠다.
생활에 필수인 컴도 하여야 하고 더구나 온갖 정보며 일일권에 살고 있다보니
일반 교통 보다는 승용차에 신경을 쓰야 하는 시대에 본납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모두가 변한다고 하여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승가는 수행이 최우선이다.
운동을 한다고 해서 골프를 치지 않아도 되고, 차를 탄다고 해서 고급 승용차가 필요한 것은 절대로 본납은 아니라고 본다.
요즈음
상당수 젊은 스님들이 수행보다는 개인사찰에 대한 소유및 확장욕이 많으며 종단에 줄 잇기를 원하고 많은
시줏돈에 관심을 갖는 스님들도 많은것 같다. 근자에 신도님들이 오죽하면 "절을 믿지 말고 스님을 믿지 말고
불교교리를 믿고 따르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승보도 가려서 공경하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으로 암담함도 사실이며 어찌 이지경까지 왔는지?..
그러나 일부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사는 스님보다 그렇지 않은 우리스님들이 월씬 많다고 본납도 믿고 있다.
그러나 제발! 사찰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어떤 위용과 현란한 불사가 아니다. 보게 되면 느낄수 있고 느끼면
행복해 질수 있는 편한한 도량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재불사에 치중하여야 한다고 본다.
근래에
큰스님 상주도량에 사자전승은 없어지고 주지전승만 하겠노라고 하는 서로 부끄러운 아우성이다.
이 부분은 전 종도가 참회의 심정으로 돌아가 자문자답하여 보아야 한다. 그것은 수행을 하지 않음에서
불거진 현상이라 하겠다. 당연히 정진하여 스승의 자리를 이어야 하고 주지소임 또한 화합하여 선출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일화를 언급해 보면서 이제는
청정한 비구정신으로 다 함께 돌아 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진정 이시대에 우리 곁을 떠나신 노스님들의
교훈이며 유훈이 아니 겠는가 싶다. 가끔씩 삭발본사에 가게 된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노스님에 부도를 뵈올때 마다 달라도 너무 많이 변해버린
본납의 모습들을 비추어 보면서 울고 싶고 통곡하고 싶을 때도 솔직히 많다고 하겠다.
끝으로
나는 같은 처지의 종도로써 객관적인 사고로써 이 글을 적는다.
동짓날 사가의 어머니께서 죽을 끓여 부처님께 올리셨다. 한편으로 우울한 심정을
감출수도 없었다. 생계형이니 직업형으로 우리 출가자들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동지팟죽과 부처님과의 연관은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해 보면서 오늘은 우리 노스님의 40주기
추도 일이다. 밤새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도 하였다. 어떻게 나머지 날 들을 마무리 하여야 하는 것인지?..
너무 넉두리가 길어 진것 같다. 살펴들 주시고 혜량해 주시기를 거듭 빌면서..
우리 도성거사의 세벽 목탁석을 들어 면서 이 만 붓을 놓는다.
갑오년 동짓날 기나긴 밤에
운흥동천은 적는다.
첫댓글 스님 께서 계시기에 그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명성스님 tv 에서 뵙고 스님들께서 왜 정치까지 관여하시나 걱정스러웠습니다
요즘은 신도가 스님을 걱정해야하는 정말 말세에 시대인가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글 넘잘보았읍니다
공감합니다
한국불교가 지금넘쇠태해가는데불제자로불교를이끌어갈수있는젊은스님들 마니마니양성해야합니다
또한 장사속으로 가는 천년고찰 사찰들 개선을좀했음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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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