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우리의 패러다임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가 단식을 한다는 것은 '슬퍼하며 회개한다는 표현'입니다. 많은 성인들이 단식을 하였고,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을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에 고통을 겪으며 많이 기도하고 자신의 게으름이나 호강함을 부끄러워 자숙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외적인 형식을 갖춘 단식을 기뻐하지 않으시니까 말입니다. 카니발(carnival)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 사순절 시작 직전 3일간 떠들썩하게 벌이는 축제로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실컷 육식하고 놀아보자는 취지로 생긴 축제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사와 축제를 주님은 좋아하실까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단식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금요일에 지키는 소재(小齋)도 그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금육하기 위해서 비싼 회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재의 분명한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식도 밥을 굶는 것으로 슬픔과 뉘우침과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울음과 슬픔을 몇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우선 곡(哭)이 있습니다. 울거나 노래하는 것으로 상가에 가면 상주가 곡한다고 합니다. ‘귀신 곡하는 소리’라고 해서 음울한 소리도 곡이라고 합니다. 눈물은 흘리지 않고 그냥 소리만 내는 슬픔입니다. 또한 통곡(慟哭)이 있는데 이는 서럽게 울면서 크게 소리도 내는 것입니다. 즉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내는 울음이죠. 통곡과 조금 다른 애통(哀慟)이 있습니다. 슬퍼서 서럽게 울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가슴을 찧으면서 슬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 울음입니다. 그리고 읍(泣)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인데 이는 근심을 하면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서 떠나가실까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소리는 내지 않지만 연인과 이별할 때 흘리는 눈물이 바로 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체읍(涕泣)이 있는데 이는 애통과 같이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가슴 깊이 뉘우침으로 서럽게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당들에게 잡히고 매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며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보고 단식하며, 애통하고 체읍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반성하며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슬퍼하면서 단식을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오 5,4)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슬퍼하고 단식하며 보속하는 사람들이 바로 슬퍼하는 사람들이지요. 교리실화에서 통회의 눈물에 대하여 이런 일화를 전승으로 전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도록 하였지요. 제일 처음 천사는 금덩어리를 찾다가 “아니야, 아니야, 이런 건 우리 하느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있어!”하고 생각하고 한 아름의 다이아몬드를 움켜쥐었다가 보기만 하고 버렸습니다. 그 후 천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귀중한 물건을 찾느라고 세상을 두루 살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인이 꿇어 앉아 울부짖더니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심에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더랍니다. 이에 천사는 가장 아름다운 회개의 눈물을 성작(聖爵)에 받아서 하늘로 가져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찾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낡은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사고를 담을 수 없습니다. 패러다임(paradigm)은 우리의 기본적인 사고의 틀입니다. 이 기본적이 패러다임이 잘못되었으면 그 즉시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헌옷을 꿰맬 때 새 헝겊으로 깁지 말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말라고 하시지요. 구약의 환경에 맞는 사고방식으로 주님의 새로운 약속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년 전에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8번 째 범인으로 지목되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윤모씨에 대해서 우리의 시선과 관심과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처벌까지 하게 한 경찰과 검사와 수사관들과 법관을 우리는 전과 다르게 나무라고 있습니다. 윤모씨는 계속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욕한 사람들도 이제는 함부로 한 모든 말과 행동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우리의 패러다임은 전환되어야 합니다. 낡고 고정된 가치관과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분명 달라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람 냄새 나는 사람으로 서로 향기가 되어서 감칠맛 나는 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4,1-5
형제 여러분, 1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축일9월 6일 성 즈카르야 (Zachary)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6세기BC
같은 이름 :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가리야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에 하나인 즈카르야서는 자카리아(Zacharias, 또는 즈카르야)라는 한 예언자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이야기를 하면서, ‘은전 서른 닢’과 관련된 예레미야(Jeremias) 예언자의 말이 실현되었다고 밝혔다(마태 27,9-10). 그런데 이 표현은 즈카르야서 11장 12-13절에 나온다. 이로써 즈카르야서 전반부와 11장을 중심으로 한 후반부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즉 이사야(Isaias)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즈카르야 예언서 역시 한 사람의 동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
예언자 자카리아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즈카르야서 제1부(1-8장)에 의하면 예언자 자카리아는 “이또의 손자이며 베레기야의 아들”(1,1. 7)로 전해진다. 그는 예언자 하까이(Haggai)와 동시대 인물로서, 기원전 520년 8월 또는 9월부터(1,1) 518년 11월까지(7,1) 활동했다. 하깨가 종교적인 이상(理想)을 불러일으키는 데 헌신했다면(하깨 1,14), 자카리아는 성실성에 대한 호소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이 이상을 실현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전의 역할을 그처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단식문제에 대한 답변 장면(7,1-3; 8,18-19), ‘거룩한 땅’과 성성(聖性)에 대한 깊은 관심(2,16; 5,1-4. 5-11) 등으로 미루어 자카리아의 신분이 사제였음이 거의 확실하며(느헤 12,16 참조), 또한 옛 예언자들의 정신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1,3-6; 7,4-14; 8,16-17).
오늘 축일을 맞은 즈카르야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