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외 1편)
정재리
설원에 서 있는 하얀 말을 본다
긴 속눈썹 긴 다리에 관절 마디가 볼록한 어린 말
혼자 서 있다
언덕 너머엔
요정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사람보다 많은 말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궁금해
평원에서 눈을 들어 가장 먼 곳을 바라보면
돌아오는 항해의 시간
자신의 그림자를 알지 못하는 말
조용한 두 귓속으로 바람이 훅 들어오면
외로움을 배울 것이다
문득 키가 자랄 것이다
아, 또 눈이 온다 눈이 와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온통 하얀 그림 속에서 하양을 잃고
자칫 떨어트린 잉크 방울로 검푸른 눈동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그리워하나요
악천후처럼 지나가 버린 마음을
다시는 못 보게 된 것을
또 어떻게 그리나요
테이블
술잔 앞에선 앞날을 생각지 말자 했고 또 누군가는 뒷일을 걱정하지 말자고도 하여 기우뚱
맨발로 달리는 독주
앞과 뒤는 한 몸이 맞다 백허그하면서 입술을 찾듯이
새가 물고 온 모래바람
극지에서 보고 싶은 건 나무였다지
쓸 만한 나무를 분질러 네 다리를 만들어 주자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고 일어나
직립을 주장하는 건
왕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유명과 무실 불협과 화음 숲과 金을 소맥처럼 말아 삼킨 다음
혀를 느리게 늘려 간신히
잃어버린 것을 잊을 수만 있다면…… 다 내려놓겠어요 우선 팔꿈치부터
그렇게 펼친 이야기는 알고 보니 거기서 끝이었다 목재의 결을 따라 쓰다듬어 봐도 그게 다였다
모서리를 자꾸만 욱여넣고 있었다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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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리 / 2017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