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여러분, 한 주가 무척 분주하게 지나가지요?
저는 오늘 모교를 방문하는 날입니다. 20년도 넘은 시간을 풀쩍 장대높이뛰기 하듯 마음은 벌써 교정에 달려가 있네요.
이번 <두레문학 미리보기>에서는
두레문학 사이트에서 현재 <추천해설> 방을 맡고 계시는 유현숙 시인의 시평 중 일부를 보내드립니다.
오거리에서 바람잡이 시정마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시고
중세 여인들의 벨가모라는 정조대와 비상키도 함께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두레문학 편집실 김정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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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기쁘다. 드디어 그녀가 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역시 나의 매력은 집요함에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스무 번 찍으면 된다. 뒷발길쯤 하나도 매섭지 않다. 역시 계집은 예뻐야 한다. 까짓 발길질도 못 참고서야 어찌 사랑을 말하랴.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위대해지는 바다의 이치를 어찌 알랴. 프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려면, 한 여름의 찌는 뙤약볕과 살을 에는 찬바람을 함께 해야 한다. 홍어처럼, 식당 한 구석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푹푹 썩어갈 때 사랑은 발효한다. 모두들 지쳐 돌아갈 때 내 사랑은 빛난다. 허울 좋은 참사랑 따위에 빠져 갈급해져선 안된다. 이만한 사랑도 내겐 너무 과분하다. 종마種馬가 올 때까지가 나의 임무다. 미친 듯이 사력을 다해 절규해도 소용없다. 사랑은 원래부터 프로그래밍 속에 없다. 그녀의 행복을 빌며 발걸음을 돌려야겠다, 히이잉.
-시 <기쁜 시정마/이희원> 전문-
<오거리>*에서 이희원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순간 흥분된 시정마 한 마리에 관심이 쏠렸다.
시 <기쁜 시정 마>의 각주에서 뒷받침 되었듯이 試精馬라는 건 수종마가 암말과 교배 할 수 있도록 암말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실 시정마의 스트레스라는 것이 얼마나 크겠는가.
황진이 앞에서 돌부처와 다름없는 서경덕도 아닌, 애숭이 말馬에게 있어서야 그 흥분된 본능을 어찌 잠재울꼬?
중세유럽의 흑기사들은 그들이 십자군 원정을 나갈 때 그의 아내들에게 벨가모라는 정조대를 입혀 자물쇠를 채웠단다.
그 자물쇠를 만든 대장장이들은 비상키 하나를 이미 더 만들어서 남편인 흑기사들이 출정 후, 프레미엄을 듬뿍 얹어 흑기사들의 아내들에게 팔았다하니…… 동서고금을 통하여 性이란게 참!,
시정마에게도 가죽 앞치마를 입혀 암말에게 보낸단다.
뒤따라 입장할 품질 좋은 수종마를 위하여 무드조성만 하는 게 시정마의 역할이다.
그걸 지켜보는 조련사들은 흥분된 시정마가 안타까워 더러는 조랑말을 대기시켰다가 애숭이 시정마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한다지만, 어디 말(馬)이 말(語)이지만 그게 할 짓일까?
그녀의 행복을 빌며 발걸음을 돌려야겠다, 히이잉
하는 마지막 행의 울음소리가 제목과는 상반된 슬픈 시정마의 절규로 들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만한 사랑도 내겐 과분하다 종마가 올 때까지가 나의 임무다 미친 듯이 사력을 다해 절규해도 소용없다
이와 같이 스스로 기쁜 시정마를 자처하는 이희원 시인이 상당히 의뭉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트레스를 감수하고 물러서는 그 마음이 짠하게 읽혀지며 공감이 간다.
여기까지 나는 시정마가 암말의 품종 좋은 교배를 위한 성(sex)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시정마라는 건 사실 우리사회의 모든 조직에서 엄연히 존재한다고 본다.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우리가 매일 치루는 일상이 무엇인가. 직장이라는 조직, 그 일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종마에게 바치는, 잘 차려내야만 하는 밥상 같은 것들이 아닐까?
물론 거시적 안목으로 볼 때 자기계발이라는, 사회성장과 발전이라는, 진화라는 말도 얹을 수 있지만 <나>라는 개개인은 언젠가는 용도폐기 되어 소멸되는 세상의 소모품이지 않는가.
높거나, 크거나, 무겁거나, 가볍거나, 그 소모품의 하나라는 것은 시정마의 역할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시적 진술에 있어서는 대체로 평이한 문장들이지만 그가 들여다보는 현상은 깊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삶의 성찰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에서는 든든하고 폭넓고 느긋한, 비움의 연륜을 되짚게 해준다.
[유현숙] 시평 - [오거리에서 바람잡이 시정마를 만나다] 중
(두레문학 제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