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설날 여행 2020, 마지막 편지
내 지금에 와서야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은 내게도 좌절의 세월이 있었다.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내 나이 20대 중반의 청년시절에 내 그랬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 대부분이 번듯한 직장에 다니거나 돈벌이를 하거나 해서 사회적 입지를 굳혀가고 있을 때, 제대로 학벌을 갖추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뒤를 챙겨주지 못하는 아버지를 믿을 수 없어 무작정 상경했었다.
그래서 청파동 어느 주유소에서도 일해 봤고, 마포 굴레방다리 부근의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배추장사도 해봤고, 군고구마 장사도 해봤고, 만화방도 세 얻어서 해봤다.
다 때려치워야 했다.
내 한 입 먹고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돈벌이도 안 됐지만, 그보다도 더 힘든 것이 쪽팔림이었다.
그래도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등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공부를 꽤나 잘했다는 사실이, 늘 내 마음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롭게 눈을 뜬 것이 공무원시험에의 도전이었고, 쪽팔렸던 지난 세월이 밑거름이 되어서 국가공무원 9급인 검찰서기보 시험에 합격을 해서 검찰수사관으로서 사회에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렇게 변신하기까지의 5년 세월이 내게는 감내하기 너무나 힘든 좌절의 세월이었다.
바로 그때, 나로 하여금 그 좌절의 세월에서 헤쳐 나오게끔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가까운 주위가 아니었다.
가깝다고 하는 친가나 외가의 그 어느 누구도, 물질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나의 세상사 입지에 별반 도움을 주지 않았었다.
그때의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은 가수였다.
그것도 눈이 먼 맹인 가수로,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TV 화면으로 내 앞에 나타난 그가 부른 노래 한 곡이,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던 내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것이다.
다음은 그가 그때 부른 노래의 그 노랫말 전문이다.
잊어 달라는 그 한마디가
거짓말 같아서 거짓말 같아서
다시 또 읽어보는 마지막 너의 편지
밤새워 울까요 그러면 잊어질까
긴긴날 맺은 정이 그러면 잊어질까
잊어 달라는 그 한마디가
믿을 수 없어서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또 읽어보는 마지막 너의 편지♪
바로 맹인 가수 이용복이 부른 ‘마지막 편지’라는 그 노래였다.
그날로 내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좌절, 곧 그것이었다.
나처럼 그 노래를 좋아하는 내 친구가 하나 있다.
내 국민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인 권만식 친구다.
어쩌다 노래방엘 가면, 꼭 그 노래를 부른다.
나이가 자꾸 들어가다 보니, 툭하면 친구 생각이 나서 그러는가 한다.
몇 해 전에는, 같은 국민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인 안휘덕 친구의 만촌농원에서 한여름 밤의 그 뜰에서 그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영신 숲까지 간 김에, 그 가까운 곳에 사는 권만식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좀 보자 했다.
설 하루 뒷날이었음에도, 가타부타 않고 쫓아 나왔다.
이때 얼굴 안 보면 또 언제 볼까 안달이 나서 그랬는지, 그 쫓아 나옴이 마치 득달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