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3.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묵시11,4-12 루카20,27-40
부활신앙, 부활희망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떳떳함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매사를 삼가는 간절함에서 나온다."<다산>
"그대가 방에 홀로 있을 때,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시경)
주님 앞에서 늘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계속 행복하게 하는,
만추의 불암산을 바라보며 애송하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11월 위령성월, 얼마전 만추의 아름다운 단풍잎들 가득 덮인 수도원 뜨락의 황홀한 풍경을 보며
시화詩畫를 만들었고, 많은 분들과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란 시를 나눴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수 있겠다”<2024.11.20.>
또 11월 위령성월에 자주 불러보는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궁극의 힘입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라는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위령성월 11월 곳곳에서 죽음 소식도 계속 들려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 말씀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새생명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부활 희망의 기쁨 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도 없거니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삼 부활의 희망과 기쁨중에 선종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은 이웃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끝임을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일곱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살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부활한후
이 여자는 일곱형제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순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답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현세에서 세례성사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 파스카의 부활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주님은 탈출기 3장6절을 인용하여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가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이니 바로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 증인도 부활로 이어집니다.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자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중에 구름을 타고 올라갔으니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의 새생명이 시작됐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미사경문을 통해 부활을 명백히 고백합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감사기도 2양식>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감사기도 3양식중 위령미사시>
미사중 위령감사송1양식중 다음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부활희망을 선사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을 앞당겨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천상탄일의 축제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번 나눴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장차 있을 저의 장례미사 축제중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성가402장)로, 퇴장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오 감미로워라”를 내심 생각하며
부탁할 마음입니다.
강론 대신에 ‘하루하루살았습니다’라는 제 좌우명 자작 고백기도시를 읽어달라 부탁하려 합니다.
이 또한 좋은 죽음 준비라 믿습니다. 날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의 삶을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