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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현님이 오교수 관련기사를 올리셨기에 과거 제가 올렸던 오교수의 글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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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로 있다. 그동안 마이아미 대학교, 알버타 대학교, 마니토바 대학교, UBC,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서 객원 교수로 강의하였고 미국 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도덕경』(1995),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1996), 『장자』(1999), 『예수는 없다』(2001),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2002), 『세계종교 둘러보기』(2003)가 있고,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1993),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1997), 『귀향』(2001), 『예언자』(2003), 『예수의 기도』(2004), 『예수 하버드에 오다』(2004) 등이 있다. 제17회(1987) 코리아 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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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섯 단계
믿음은 어느 면에서 자전거 타기와 같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있을 수조차 없다. 바울도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기를 바란다고 했다.(살후1:3)
하버드 대학을 거쳐 지금 에모리 대학 교수로 있는 파울러(James Fowler)(현재 에모리 대학 윤리연구소(Center for Ethics) 및 신앙과 윤리 발달 연구소(Center for Research on Faith and Moral Development) 소장으로 있음.)가 쓴 『신앙의 단계』(Stages of Faith)라는 책이 있다. 그는 유명한 발달 심리학자인 스위스의 피아제(Jean Piaget)와 미국의 콜버그(Lawrence Kohlberg)의 이론을 종교 심리학 분야에 적용했다.
피아제는 아기가 자라나면서 나이에 따라 인식능력이 어떻게 발달하는가를 연구한 사람으로, 콜버그는 인간이 자라나면서 나이에 따라 도덕적 의식이 어떻게 발달하는가를 연구한 사람으로 각각 유명하다. 그러니까 피아제는 인간의 인식발달(cognitive development)에, 콜버그는 인간의 도덕발달(moral development)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이다.
파울러는 이들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인간의 신앙심이 어떻게 발달하는가를 연구하는 데 적용했다. 그는 여러 사람을 직접 면접하고 관찰해서 인간이 갖는 신앙에도 뚜렷한 발달 단계가 있다는 결론을 발표하여 1980년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파울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신앙적으로 완전히 자라게 된다면 모두 6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제 그 여섯 단계를 간략하게 훑어본다.
먼저, 첫단계에 들어가기 전의 단계 아닌 단계로 '전단계(pre-stage)'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갓난아기가 배가 고프면 울고, 엄마가 와서 먹을 것을 주거나 안아주면 그냥 좋아하는 것처럼, 아직 지적 능력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엄마나 다른 보호자에게 가지는 무조건적 신뢰의 단계로서 이 때 갖는 신앙을 무분별적 신앙(undifferentiated faith)이라고 했다. 아직 이분법적 사고가 생기기 전 단계인 셈이다.
제1의 단계는 "직관적 문자적 신앙"(mythic-literal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 설화, 신화나 신앙내용이나 의식(儀式)을 받아들이되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아직 이런 것들의 상징적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이런 이야기가 말하는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생기고 굴러간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자기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싼타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많이 주고 갈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옮긴이의 잘못인지 2단계는 빠졌습니다)
제3의 단계는 "종합적 인습적 신앙"(syntheic-conventional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사춘기 때 형성되는 것으로서, 자기가 지금껏 문자적으로 믿어오던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나 신앙내용, 의식(儀式)이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질 때의 모순을 의식(儀式)하는 단계이다. 이런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모순을 종합해주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종합적 인습적 신앙형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독립적인 사고에 의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외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맞추려는 획일적 사고가 강하게 나타나고, 또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따라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소위 자기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수하겠다고 애를 쓰는 열성파 사람들 대부분은 이 단계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이다.
제4의 단계는 "개성화와 성찰의 신앙"(individuative-reflective faith) 단계이다. 이 단계는 20대 중반의 청년기, 경우에 따라서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서도 형성되는데, 자기 자신의 신앙이 내용이나 가치관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고 통찰하는 단계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이 단계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제4단계는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속했던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집단이 주는 가치관이나 신앙내용이나 이데올로기에 그대로 안주하느냐, 혹은 자기 스스로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와 태도를 가질 것이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되면 자신과 세계를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고, 지금까지 검토되지 않던 상징체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아직도'의식'(儀式)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남아 있다.
제5의 단계는 "접속적 신앙"(conjuncive faith)이다. 이 단계는 주로 중년기 이후에 생기는 것으로서, 이분법적 양자택일이나 이항대립적 사고 방식을 넘어서서 '양극의 일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단계이다. 우리가 계속 말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냐냐주의'에서 '이것도 저것도'(both/and)의 '도도주의'를 깨닫는 단계, 변증법적(dialectical) 사고, 대화적(dialogical) 태도, 역설적(paradoxical)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이다. 빛이 파장도 되고 입자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한 가지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볼 줄 아는 마음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선입관으로 사물을 보는 대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이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 내가 어디에 속했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리 자체가 전해 주는 것에 따라 소신을 가지고 말한다.
여기 제5단계는 의식(儀式)의 영역을 넘어선 단계라는 면에서 앞에 나온 제4단계와 구별된다. 5단계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단계이다. 진리란 단순한 일차방정식 같은 것이 아니라 다차원적이라는 것, 사물이 서로 얽히고 어울려 있다는 것, 교리나 상징체계 등은 어차피 궁극 실재에 대한 부분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 자기의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궁극실재와 비교할 때 상대적이라는 것, 따라서 모든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 등등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종교적 상징이나 의례가, 그것이 나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깊이 이해될 때 진정으로 새로운 의미를 전해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6단계는 "보편화하는 신앙"(universalizing faith...우주적인 신앙이라는 번역이 더 정확하지 않을지요)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극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아를 완성한 이른바 성인(聖人, sage)의 경지이다. 어떤 외적 걸림이나 거침이나 울타리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와 무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와 껴안음의 사람, 그러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의와 공평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파울러는 구체적으로 근래 우리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들 중,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테레사 수녀, 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슐드, 히틀러 암살 기도에 실패해 처형당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훼퍼, 유대인 사상가 에이브라함 헤쉘, 미국의 신비사상가 토마스 머튼 같은 사람이 이에 속할 것이라고 본다.(이런 현대의 성인과 불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보살을 비교한 훌륭한 책으로, Taigen Daniel Leighton, Bodhisattva Archetpes: Classic Buddhist Guides to Awakening and their Modem Expression. New York: Penguin Arkana, 1998이 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도덕적인 면을 포함해 모든 면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간디가 비폭력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지만 자기 부인에게 거칠게 대한 것과 같은 예이다. 루돌프 옷토가 말한 것처럼 성(聖)의 경지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차원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분들은 일반적으로 인습적 사고방식, 가치체계, 사회질서에 대해 '뒤집어엎는'(subversive)면을 지니고 있다. 이 단계가 또 기독교적 용어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일상적 가치를 종속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를 위해 구체적 전통이나 윤리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버려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정도로 큰그릇이 된 것이다. 이들의 사랑과 희생, 열림과 감싸 안음으로 인간 개인의 미래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미래와 희망이 있다.
파울러의 연구결과가 모든 면에서 다 맞는지, 특히 그의 연구 대상이 모두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동양 문화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줄로 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발전한다는 것을 강조한 그의 기본 입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지금 어디쯤 와있나 하는 것을 점검하기 위한 임시 '좌표'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파울러의 주장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여섯 단계를 다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한 사실이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어느 단계에서든지 더 이상 발달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 수가 있다. 신앙의 여정에서 대부분의 북미 기독교인은 사실 제2단계나 제3단계에서 성장을 멈춰버린다고 했다. 교회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일생을 끝내는데, 사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을 교회는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교회 입장에서야 그런 사람을 다루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교회로서는 권위에 도전하는 자주적 사고나 기존 실서와 가치에 도전하는 그런 믿음 같은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제도적인 교회, 제도적인 신학의 한계이다.
신앙은 발전하는 것이라고 본 이런 기본적인 견해를 피력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동양에서도 당(唐)나라의 종밀(宗密, 780-841) 같은 사람이 있다. 그는 천당 지옥 같은 내세의 인과응보 사상이 주관심이 된 믿음을 "인천교"(人天敎)라 부르고 이를 가장 저차적인 형태의 믿음이라 분류한 다음 신앙이 거기서 점점 발달하여가야 한다는 생각을 명쾌하게 논하고 있다. 종밀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이런 생각은 옛날부터 많이 있어 왔다.
이제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번 장 '신앙의 6단계'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함 선생님도 파울러가 열거한 간디 등과 같이 제6단계에 이른 분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 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는 개체적으로나 종족적으로나 다 자람이 있다. 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함석헌 전집9, 200)
두 가지 사유 방식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파울러가 말하는 신앙의 단계에서 겨우 제 3단계 정도에 이르러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되는가? 제4단계는 독립적 사고를 가지고 사물을 보는 단계요, 제 5단계는 사물의 양면을 다 볼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단계라고 했지만,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종래까지의 고정 관념에 매이고 마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한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피상적인 '서양적 논리'에 근거하여 사물을 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 너의 생각은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을 철칙처럼 여기는 태도는 피상적인 '서양적' 사유방식의 산물이다. 우리는 어느 면에서 우리도 모르게 모두 이런 서양식 사고의 희생자 내지 피해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서양은 2000년 이상 '이분법적 사고'에 지배받은 사회였다. 영어로 하면 either/or라고 하고, 우리말로 하면 '냐냐주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택일, 이항대립의 논리. 이런 식 논리를 간단히 'A형 논리'라 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서양 사상사를 지배해온 Aristotle, Augustine, Aquinas 세 사람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좀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을 근간으로 하는 형식논리이다. 서양식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 거의 전부가 이런 용어를 알든 모르든, 혹은 의식하든 못하든, 이런 논리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방적인 논리말고도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사고'에 의한 논리도 있다. 영어로는 'both/and'의 논리라고 한다. '이것도 저것도' 동시에 가능하다고 본다는 뜻에서 '도도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의 논리라고도 하고, A형 논리와 대조적으로, 이런 논리를 퍼트린 기원전 5세기 Epimenides, 그보다 몇 세기 먼저 살았던 Eublaides,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 Eckhart의 머리 글자를 따서 'E형 논리'라 하기도 한다.(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알아보고 싶으신 분은 김상일 교수의 책『동학과 신서학』을 참조하기 바란다.)
최근 어떤 부류에서보다도 과학자들 사이에서 실재(reality)를 설명하는데 고전주의적인 이분법적 논리만으로는 이해도 설명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정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빛은 과장이냐 입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이분법적 논리를 따를 경우 그것이 파장이든지 입자든지 둘 중 하나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보고, 빛은 파장도 되고 동시에 입자도 된다고 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런 과학 분야를 필두로 하여 철학이나 신학에서도 이제 'both/and'의 입장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옛날 같았으면 신이 인격적이냐 비인격적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도 인격적이든가 비인격적이든가 그 중 한가지만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항대립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신은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비인격적(더욱 정확히 하면, 초인격적)임을 쉽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실 이런 것은 최근에 알아낸 생각이 아니다. 중세의 유명한 신비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최근에 와서 더욱 보편화되고 있을 뿐이다. (과학의 새 패러다임이 종교 사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참고문헌 목록에 나타난 Ian Barbour의 책을 참조하실 수 있다.)
정말 아니러니컬한 현상을 지금까지 이원론적인 사고에 지배받아 오던 서양에서는 이분법적 사고방식만으로는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깨닫는 지성인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는 반면, 전통적으로 비이분법적 사고가 주류를 이루던 동양에서는 서양식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사물을 보는 유일한 진리의 방법으로 떠받드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동양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에 깊이 물들기 전에는 비이분법적 사고가 주류를 이루던 사회였다. 도가사상이나 화엄사상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역시 도가와 우리가 공부하는 화엄이 대단합니다요)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서양' '동양'할 때 동서양이 딱 부러지게 100% 정반대가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서 양쪽의 전체적 경향을 지칭하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예로부터 서양에서도 E형 논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많았고, 동양에서도 A형 논리에 따라 사고한 사람이 있었다. 편의상 여기에서 서양적 사고라고 하는 것은 주객이분의 의식에 초점을 두는 A형 논리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것이고, 동양적 사고라고 하는 것은 초이분법에 역점을 두는 E형 논리를 일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사실 동서양의 문제라기보다 종교 의식의 심천에 관한 문제이다.
아무튼 서양에서 이분법적 세계관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넘어서겠다는 이들의 대표격이 바로 초인격 심리학자나 과정철학자, 과정신학자 같은 사람들이다.
한편 동양에서 이분법적 사고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대표가 인간사를 모두 선과 악, 빛과 어둠, 나와 원수간의 쟁투로만 보는 고전주의적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람, 그리고 기독교의 이원론적 역사관을 그대로 채받아 역사와 사회를 착취자와 피착취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 사이의 투쟁으로만 해석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지금까지의 남북한은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이원론적 병을 앓고 있던 '한통속'이었다 할 수 있다.)
한 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라는 말이 있다지만,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한 번 진리면 영원히 진리요, 한 곳에서 진리면 어디서나 진리이다. 이른바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이야기하게 된다. 역사의식(historical consciousness)이 모자라는 이른바 고전주의적(classicist) 사고이다.
커피 잔이 동그랗다고만 생각하던 사람이 커피 잔을 똑바로 앞에서 보니 네모로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고 커피 잔에는 동그란 면과 함께 네모인 면도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그것이 동그랗기도 하고 네모이기도 한다."고 말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가 진리를 버리거나 비진리와 타협하는 것인가? 물론 아직도 "커피 잔은 반드시 동그랗기만 해야 한다.", 따라서 "네모난 면이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영구불변의 진리라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커피 잔에 대해 한 때 특수한 환경, 특수한 사정, 특수한 지적 능력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견해' 같은 것을 옹호하는 것이 진리 자체를 수호하는 일은 아니다.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고 계속 추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한 때 형성된 커피 잔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끊임없이 그 커피 잔의 다른 면을 계속 검토하고 실험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다른 면, 더 깊은 면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파울러가 말하는 제4,5의 단계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적, 영적 자라남에 관한 한, 그야말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오강남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를 <유아기의 기독교>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간디같은 분은 6단계 현대성인의 반열이지만 부인에게 거칠게 대했다는 것은 6단계 성인의 구분이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도사님 감사합니다. 도사님도 언급하셨지만, 오강남교수님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신 분이라면 바로 우리 카페가 신앙6단계 중 바로 제6단계(아니, 어쩌면 더 높은 단계일지도)를 설하는 카페임을 아실 겁니다. 2,3단계에 머무는 다른 가르침과 달리, 이렇게 우리는 바로 최후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우리 카페 가르침을 이해도 못하면서 비웃거나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분들이 너무나 그동안 많았습지요...
파울러박사가 빠뜨린 신앙단계 하나는, 6단계 너머의 신앙입니다. 우리 큰스님 같은 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큰스님 경계는 간디나 테레사 수녀가 도저히 따라오질 못합니다. 그것은 큰스님이 뛰어나신 탓도 있지만, 큰스님이 지향한 공부의 세계가 바로 반야-화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화엄은 <원만>을 그 근본으로 합니다. 원만하니 간디같은 행동이 나올수가 없는 것이지요. 화엄, 보현의 경계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한결같음! 그것이 보현의 세계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드립니다._()()()_
커피잔의 모양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커피잔이 물, 흙, 바람,... 6대가 모여 형성되었으며 그 형성도 없음을 말한다면 서양식 사고에서는 무엇이라 말할까요?
화엄의 세상은 대단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