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因緣
<제8편 풀꽃>
①어느 봄날-44
남자는 그녀의 심중을 꿰뚫어 묻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굳은 낯빛이 백열등 불빛아래에서 마치 잿빛 마네킹을 닮아있었다.
“난, 몰라. 깜깜해서...”
그녀가 메마른 입술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겨우 몰랐다는 말을 씹어뱉고, 있었다.
“그런데 왜 놀라서 튀어나왔니? 넌, 한 자락 숨기고, 하는 말일 거야!”
남자는 적이 웃는 낯으로 악의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까발기려는 기세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움츠러들던, 그녀는 아까 팔로 목을 조이며, 끌어가서는 입술에 혀를 스치던, 미지의 사내의 짓을 털어놓고 싶은 궁박감에 빠지어들고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더는 말할 생각의 여유조차 없어지었다. 그런데 남자가 그 어두운 방에 따라 들어오기라도 한 듯이 묻는 거였다.
“명자랑 함께 있는 남자가 누군 줄이나 아니?”
정녕 그의 말은 그녀로 하여금 뜨끔하게 만들었다.
“남자라니?”
그녀는 시치미를 떼며, 메마른 입술로 대꾸하기는 하였으나, 그 사내의 행동은 어둠속에서만, 허용할 수 있는 돌발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내를 누구라고, 짐작할 수는 없었던 거였다.
“그 남자가 당신 형부 동생이야.”
“어머! 자기가 어떻게 그걸 알아? 나도 모르는데. 그 남자가 언니 시동생 명훈 씨라고?”
“그래!”
“어머나!”
윤희는 그제야 명자와 함께 있던, 정체불명의 사내가 바로 형부의 동생 명훈임을 알아차리었다.
“여보! 자기, 그 얘긴 그만해요. 내 몸이 뜨거워.”
“그래, 그만하고, 자자.”
윤희는 김봉규의 가슴으로 들입다 파고드는 거였다.
그녀는 여기까지 지난밤 일을 되살리면서 여자 중과 형부를 그렇게 남자와 여자로만 보고 있었다.
까까머리에다 앳되고, 고운 얼굴과 형부에게 걸맞은 앙증스러운 몸매를 하나로 묶어 가상으로 보면, 짜릿한 맛이 엉기려니 하였다.
그녀는 잠시 그러한 생각을 하다가 옥희의 옆에서 몸을 일으키고, 방을 나와서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점포에 있을 줄 알았던 김봉규가 구두를 쪽방 문 앞에다 벗어놓은 게 아닌가.
아침을 먹고 나서, 그는 바우네가 있는 쪽방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그때 안방의 밥상이 물리고, 쪽방의 밥상도 물리어서 좀 뒤는 형부와 여승의 밥상도 물릴 걸 생각하여보면, 설거지감이 벅찰 거만 같아,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쪽방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어오는 거였다.
“우리 아그가 총각 닮으서 잘 생겼제.”
이 말은 분명히 바우네가 하는 말이었는데, 윤희의 귓속으로 오롯이 파고드는 거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김봉규와 바우네의 관계가 그녀에게는 의구심으로 잠재되어있는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김봉규가 방에 함께 있었기에 웃음엣소리로 하는 말이라고, 이해하고 말았다.
“친구넌 벨소리럴 다허네이, 총각은 무신 총각여? 사모관대만 안 썼제, 벌씨 동거생활얼 헌디, 기왕이문 신랑이라고 불러.”
정읍댁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리어오고 있었다.
윤희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칫거리면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나넌 총각 적이 만났은게, 대구 총각으루 불러지넌겨. 오호호.”
“쉿!”
바우네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마저 흘리자, 그 말을 말리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봉규는 방에서 무얼 하는 걸까도 의문이었다.
그때 옥희가 뒷방에서 물린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거였다.
“언니! 바우네아줌니 아기를 봉규가 낳아줬나봐요?”
윤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귀엣말로 속살거리었다.
“고기 뭔 상관여? 난, 모른디, 바우네가 울 시어머님이랑 동갑인디야, 남자가 동성동본이라고, 총각 적이 씨받는다고 혀서나 씨뿌린디. 나도 모른디, 눈치가 그려.”
옥희는 연신 모른다면서 아주 털어놓고, 마는 거였다.
“언니, 그게 어딨어?”
윤희는 옥희의 말에 도대체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하였던 거였다.
“고건 암시랑 않여. 남자가 총각 적이 그럴 수 있제. 바우네가 이팔청춘도 아니고이. 김봉규가 그 여자허고 살 배도 아닌디, 한때 씨받은 걸 갖고, 뭔 상관이라냐?”
“그래도 언니, 그런 얘기 들으면, 찜찜하잖아요.”
첫댓글 비밀스런 이야기를 너무 쉽게 들 얘기합니다
바우네도 배포가 크고 김봉규만 난처해지겠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듣는다는데 쉽게 입을 놀리네요.
윤희에겐 상처가 아닐 수 없겠지요. 허나 옥희가 잘 다독거리네요.
당시만 해도 홀아비가 새장가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헌여자는
40살이나 넘은 홀아비 같으면 과부도 환영이지요. 30대까지만 해도
새장가 갔고 40대도 웬만하면 새장가갔습니다. 청상과부도
실은 시집가기 어려웠어요. 한번 남자맛을 알면 여자는
쓸모가 없다는 사회적 관념이 뿌리박혀 있었지요. 해서 시집에
불만이 있어도 시집가기 어려워 눌러살다보면 시집귀신되고
말지요. 가정은 여자가 지킵니다. 여자가 밖으로 나돌면 언젠가는
가정 여자 다깨집니다. 요즘 그게 문제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