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잡아주세요”
다섯 살 배기 재희는 급성골수성 백혈병을 앓던 아이였다. 벌써 반년째 혈액종양내과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무균격리실을 들락거렸지만 재희는 늘 웃음을 머금고 살았다. 지독한 항암제가 몸에 주입될 때마다 구토와 두통에 시달렸지만 매번 잘 견뎌내었다.
혈관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피부 밑으로 지나가는 혈관들을 괴롭히는 정맥유치침을 달고서도 당시에 유행하던 텔레토비 흉내를 곧잘 내서 소아병동에서 간호사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아이이기도 했다.
그런 재희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항암치료 뒤 며칠 동안 입맛을 잃었던 재희가 갑자기 오른쪽 아랫배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처음에는 항암제 효과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복통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소아과에서 외과로 컨설트가 나왔다.
재희의 배를 촉진하고 몇 가지 검사를 한 결과 급성충수염으로 진단을 내린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면역기능이 약화될 만큼 약화된 아이의 배를 연다는 것은 상당한위험이 따랐지만, 수술을 늦출 수는 없었다.
나는 그때 재희를 처음으로 만났다.
오랜 병원 생활에 지칠 만큼 지쳤을 아이가, 배에 벌레가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수술해서 벌레를 잡으면 꼭 저 주세요. 보고 싶어요.”
아이들은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하면 대견스러울 만큼 성숙해진다. 남들이 수십 년에 겪을 고난을 미리 경험하는 탓인지, 장기 투병을 하는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어른스럽다.
그런 재희가 수술실에 들어왔고, 우리는 어린 천사의 하얀 배를 갈라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던 작은 꼬리처럼 생긴 충수돌기를 무사히 절제하는데 성공했다. 회복실에서 약속대로 절제된 충수돌기를 재희에게 보여주었다. 재희는 수술 뒤의 통증을 참으면서 “벌레가 꼭 돼지꼬리처럼 생겼어요. 선생님” 하고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3일 뒤 재희의 몸에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면역기능의 약화로 수술 뒤 복막염이 발생한 것이다. 재수술이 결정되어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던 날 재희는 내 손을 잡고 “선생님, 저 살 수 있죠? 약속해 주세요. 꼭 살 수 있죠?” 하고 말했다. 무엇인가 예감한 듯한 재희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랐고, 마취가 시작되기 전에 전 스태프들이 재희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러나 재희는 수술 뒤 일주일 만에 패혈증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 가엾은 어린 천사가 우리에게 걸었던 손가락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때 재희가 걸었던 앙상한 손가락에서 느껴지던 체온은 이후 내가 수술실에 들어설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때 약속 못 지켰죠? 이번에는 꼭 지키세요. 아시겠죠? 꼭 살리셔야 돼요.”
그 이후로 재희와의 약속을 제대로 못 지킨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데, 재희는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고 있을까? 그때 약속을 못 지킨 우리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렇게 외과의사의 마음은 늘 두렵기만 하다.
박경철 / 안동병원 원장 /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저자
첫댓글 마음이 좀 아프네요. 재희가 잘 되었으면 좋았을텐데...산처님 고맙습니다.
산님요...건강하시소오...'의창너머로' 부산 의사문우회 8호 책을 읽으며 가슴을 슬어 내렸지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어디에 그 기준이 있을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더 아리게 합니다.
어머님 병상에 계실 때 6개월병원을 드나 들면서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았었어요..잠시나마 그아픔 마음으로 밖에 함께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웠는데 지금두네요..산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