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묵은해를 보내면서 서신 올린 지도 벌써 오륙 년을 넘어 지나 버린 것 같습니다. 해마다 새해 인사를 전해 올리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학교 당국에서는 아직도 단 한 마디 말씀이 없습니다. 저로서는 단지 학과 수준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이 글을 써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생산적인 일들을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슬픈 일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한 것은 이전까지 지적된 사항에 대한 학교측의 해명과, 대학원 국문학과 교수님들의 답변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것을 요구한 데에는 다른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문제 해결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라도 한 조각 읽어볼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가슴 훈훈한 말 한 마디라도 들어볼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내용 증명'으로 보낸 서신을 발송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제가 받은 편지는 선생님의 편지 한 통밖에 없습니다. 왜 또 선생님 혼자 모든 책임을 다 지려 하십니까? 왜 문제를 선생님 개인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감정 문제로 처리하려 하십니까? 이것이 감정 문제라면, 애시당초 저와 같은 대학원생으로서 정교수에게 상대가 되는 일이었겠습니까? 저는 하룻강아지이지만 범 무서운 줄은 알고 있는 하룻강아지입니다. 그리고 과연 지적된 문제들이 선생님 혼자의 잘못이더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문제로 삼은 일들에 대한 해명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문제를 개인적 원한의 차원에서 보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저의 의도를 철저히 오해하고, 완전히 왜곡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 일은 본디부터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개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 문화사적, 지성사적, 종교사적, 인류사적인 문제입니다. 이 점 다시 한 번 새겨 보십시오. 이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아예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이렇게 며칠째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김종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편지 속에서, 제가 '학과 교수를 불신하고 매도'했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 또한 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입니다. 저는 우리 학과 문학 담당 교수님 세 분을 다 모시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삼 년, 사 년 씩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런 제가 그 분들을 불신하고 매도하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애쓴 그 많은 흔적들을 선생님께서는 단 하나라도 알고 계십니까? 또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왜 또 이런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까? 김종균 선생님, 저로 하여금 언제까지 이런 글들을 쓰도록 하실 작정이십니까? 좋습니다. 또 더 많은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학교의 신연구동이 완공되어, 우리 국문학과 어느 교수님 연구실을 옮기는 날, 그 이삿짐을 저도 함께 날랐습니다. 이때는 무슨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시고 있던 선생님의 이삿짐 정도는 날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참여하지 않으면 더 눈 밖으로 날 것 같아서, 마지못해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또 듣고야 말았습니다. 이사가 끝나고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다시 논문 심사 과정의 투명성에 대한 말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은, '박사 학위 취득에 드는 돈을 준비하라고 강의를 주는 것이다!', '그 강사료 모아서 학위 취득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라!'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 아득한 말씀이었습니다. 멀리서 들려 오는 그 무슨 '복음'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순간 눈앞으로 어떤 아련한 안개 같은 것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지하실에 갇혀 있지만, 도대체 출구를 찾지 못할 때의 그 암담함을 김종균 선생님께서는 한 번이라도 느껴 보셨습니까?
그리고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 선생님은 '그것이 싫은 사람'은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참다 참다 저는 단호하게 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서슬 시퍼런 교수님 앞이라서, 우리말로 대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영어로 말했습니다. "아이 엠 뎉 맨! (I am that man!)"이라고 말씀입니다. 함께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 순간의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와 그 선생님을 번갈아 가며 힐끗힐끗 쳐다보더군요. 그날 저녁에도 저는 혼자서 술을 마셨습니다. 아마도 아주 많이많이 퍼 마셨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교수님들에게는 말도 통하지 않고 말할 기회도 별로 없어서, 특별히 어느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1997년 봄 학기초를 전후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 선생님을 찾아 뵙고 힘들게 주저하며 말씀을 드렸지요. "학과 돌아가는 모양이 이래서는 학위를 취득할 수가 없습니다.......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렸을 때, 그 선생님의 대답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갈 사람은 가야지!" 제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신 대답이 이 말 한 마디였습니다. 그토록 차분한 음성일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말을 입밖에 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떠나겠다'는 말이 정녕 떠나기 위해서 한 말이겠습니까? 진짜로 떠날 사람이 뭐하러 일부러 찾아가서 그런 말을 듣겠습니까? 정말로 떠날 사람은 말없이 그냥 조용히 사라집니다. 또한 학위를 위하여, 강의를 위하여 젊음과 청춘 시절의 십수 년을 고스란히 바친 제가, 학위도 못 받고 강의도 팽개치고 '갈 사람'입니까? 어찌 그리도 무책임한 말을, 비정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실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남산에 있는 힐튼 호텔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발전 기금 조성을 위한 무슨 행사가 있던 때에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강사는 다음 학기 강의를 주지 않겠다'는 칙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칙령을 받들어 모신 칙사가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행여 강의를 잘릴까 봐, 오들오들 두려움에 떨며 힐튼 호텔로 가는 언덕을 걸어서 올랐습니다. 올라갈 때에는 오금도 저려 왔습니다. 처음에는 행사의 성격도 몰랐습니다. 막상 가서 보니 우리 학과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와 있더군요. 테이블 네댓 개가 모자랄 정도였으니까요.
알고 보니, 학교 발전을 위한 모금 행사였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서 근근히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제가, 그만한 모금 행사에 어찌 참여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황당했습니다. 서글퍼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어디 구석 자리 하나를 찾아서 앉아 있다가, 한끼 식사대가 몇 만원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들 듣고 놀래서, 물만 몇 모금 마시다가 그 길로 그냥 슬그머니 나와 버렸습니다. 모금에 참여도 못할 형편인 사람이 식사대까지 축내서야 되겠습니까? 그 남산 길을 지척지척 걸어 내려오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뒤에 들으니, 다른 어느 학과에서는 '강사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는 풍문도 들리더군요.
저의 시집이 나온 뒤, [선언문] 사건에 관련된 어느 교수님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건 한국 학계가 다 고쳐져야 되는 일이야!"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천번만번 옳으신 말씀일 것입니다. 분명히 한국 학계가 다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해 보십시다. 나 하나부터, 우리 학과부터 그것을 해 보십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저의 관심은 한국의 학계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저의 관심은 한국 사회 전체에 있습니다.
여태까지 우리 학과 선생님 중에 제 말을 들어주신 분이 정말로 누가 계셨습니까? 단 한 분도, 단 한 마디도 들어주신 분이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그토록 철저히 굳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지경인데도 학과에서 말이 통하겠습니까? 선생님이시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잘 알았나이다. 부디,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옵소서!' 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사라지시겠습니까? 그래서야 되는 일이겠습니까?
최근 일 년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학과 문학 전공 교수님들 중에, 대학원 건물에서나 교문 앞 대로변에서나 또는 스승의 날 회식 석상에서, 저를 똑 바로 쳐다보시는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실들을 접할 때, 제 마음은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저는 왜, 제자를 똑 바로 바라보시지도 못하는 스승들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살기 싫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저 혼자만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런 날, 그런 마음으로 저는 혼자서 더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아마도 고주망태기가 될 때까지 퍼 마셨을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 사회와 시대와 역사와 교육을 원망하면서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회와 시대와 역사와 교육에 대한 관심 없이는,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에 관심을 쏟아야만 합니다. 우리 학과에서부터, 우리 학교에서부터 그런 일들을 차근차근 해 나가자는 말씀입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아무 길도 없습니다. 다른 어떤 행위들도 모두 다 자기 욕심 채우는 일밖에 안됩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일밖에 안됩니다. 그것뿐입니다. 김종균 선생님, 저에게는 이것 말고 다른 마음은 밴댕이 소가지만큼도 없습니다.
과연, 이러한 일들이 제가 선생님들을 '불신하고 매도'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까? 이런 말씀들을 다시 또 꼭 드려야만 합니까? 저는 [인간]을 미워하지 말자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스승을 미워하면서 원한을 품고 살아가겠습니까? 김종균 선생님, 더 이상 이런 말들은 하지 말고 살아가십시다. 제발,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런 비생산적인 행위들은 떨쳐 버리십시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도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떻게 하면 김종균 선생님을 위시한 학과 교수님들의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를 부드럽게 풀어 가는 길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왜 아주 간단히 고쳐질 수 있는 문제들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을까 하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도와주고 밀어 주고 이끌어 주며 퍼져갈 수 있는 일이, 그렇게 진행시켜도 턱없이 부족한 이 일이, 왜 이 지경으로밖에 안되었는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보에 싸인 핏덩이]같이 보채지 않았다면, 최소한 이런 식으로 나마의 대화가 성립되었겠습니까?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학과의 여러 선생님과 저는,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시대와 역사의 희생자들입니다. 예전 가치관이 사라졌으나 새로운 가치관을 찾지 못한 시대의 피해자들입니다. 하기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역사를 '전환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란의 시대를, 오욕의 역사를 살다 가는 불쌍한 중생들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본다면, 그리고 이해한다면 어찌 서로 헐뜯고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새로운 가치관이 저토록 탄탄하게 확립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인, 지성인으로서 그 길을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종균 선생님, 부디 이 말씀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저를 전혀 이해 못하시는 것 같아서, 여기에 저의 처지와 자세를 다시금 말씀 드릴 테니까 보다 신중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저는 개인적으로 누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해원(解寃)하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저는 그 무슨 원한에 사무쳐 있는 것도 아니며, 해원(解寃)해야 할 그 무엇을 지니고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말씀입니다만, 저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 사회의, 우리 학과의 도덕성에 관련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누구의 잘못을 세세히 따지고 밝혀서 벌을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소문들이 오가고 있는 지금 현재 보다, 조금이라도 더 도덕적 완성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말씀이었으며,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비리와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 다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 학과에서부터, 우리 학교에서부터 관심을 기울여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육]의 이름을 걸고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인문 과학 분야에서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우리 대학원 국문학과의 모태는 사범대학이라는, 선생을 길러 내는 대학에 소속된 학과이며, 그 학과의 교수님들 아니십니까! 그러나 지금의 우리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좀 생각을 달리 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강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전임 교수가 아니라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왔으며, 제가 하고자 하는 강의는 일반적인 강의가 아니라, 올바른 인간을 길러 내는 강의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강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서, 학기마다 마음을 졸이게 하시며 다음 학기의 강의를 애처롭게 기다리게 했던, 교수님들의 그 행위들을 좀 돌아보십시오.
평생을 시간 강사로 살아도 좋다고, 이 일만 좀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 길을 좀 열어 달라고, 정히 어려운 일이라면 두 시간 짜리 강좌 하나만이라도 좀 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했던, 그렇게 애절한 하소연을, 그 애끊는 간청을, 단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묵살해 버리신 그 행위에 대한 해명을 과연 무슨 말씀으로 하시렵니까? 십년을 넘게 가르친 제자를, 십 사 년 동안 얼굴을 마주 대고 살았던 학생을, 그렇게 쫓아내셔야만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반드시 박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재단 비리 문제 등이 없이 학교 조직이 건실했고, 거기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져 주었다면, 이 일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가능성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한국외대 내에서의 그 가능성도 분명히 보았거든요. 그러나 당시의 학과 상황과 교수님들의 태도로 볼 때, 그것이 성사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14년을 보낸, 제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이 허비해 버린 결과밖에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 사회와 학교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사람들을 길러 내어야 할 때인데,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봉쇄하려는 작태에 슬픔을 느낀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극한 상황까지 참을 만큼 다 참았습니다. 학과의 상황과 교수님들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십시오. 당시의 제 일기장에는 온갖 일들이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 일기장을, 다 지나간 일들을 들추어보며 살아야 하는 일이겠습니까?
또한 저의 바램은,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인류의 성인(聖人)이 출현하고 활동한, 바로 그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그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동참하는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시기에, 그 어린 새싹 하나를 그냥 짓밟아 버리려는 작태를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새싹 하나를 살려 보려는 그 애틋한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서는 아직도 거의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등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글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크리슈나무르티]의 글과 말은 세세히 기록 또는 녹음되어 남아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의 모습 또한 생생하게 녹화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의 의미를 잠시 짐작이라도 좀 해보십시오.
기록된 문헌에 의한 지식 싸움은 이제 끝장이 났습니다. 조직화된 종교들도 이제 그 의미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언론에까지 저렇게 대문짝만 하게 보도가 되는, 저런 행태들을 보이고 있는데, 무슨 놈의 인간 구원이 있겠습니까! 도대체 지금 무슨 짓들을 하고 있습니까? 좀 쳐다보십시오. 철학의 제창도, 이념 싸움도, 의견 대립도, 주장의 난립도 이제 완전히 끝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서구 이론 몇 개 들여와서, 이러니 저러니 다투고 있는 작금, 문학 연구의 구태의연한 흐름에 일침을 가할 때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의 새 이론이라는 것도, 해체주의라 해서 이전의 이론들에 대한 파괴가 기세를 울리고 있는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파괴 뒤에 해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적으로 복잡하게 얽어서 이루어 놓은 그 파괴가 인간 정신에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과 사랑은 지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저다지도 명확하게 지적되어 있으니까, 그 길을 누군가가 저렇게도 탄탄히 닦아 놓았으니까 선생님께서도 거기에 관심을 좀 기울여 보십시오.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있다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대학원생들을 지도하실 때, 선생님께서도 이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신봉(信奉)'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만, 이것은 신봉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봉의 문제라면 철학이나 사상, 이념, 소신, 주장 따위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행위는 사실의 인지와 이해, 그리고 직관에 관련되는 '지성(知性)'의 문제입니다. 제가 과연 앞으로 얼마만한 지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으나마 지성적인 사람은 결코 그 무엇을 터무니없이 믿고 받들지 않습니다. 부디 이것을 이해하십시오.
지금 또 다시 이렇게 결코 짧지 않은 글을 적어 올리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런 소모적인 일에 시간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젊음과 청춘을 다 바쳐서 찾아낸 그 일을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진행해야만 합니다. 여기에만 쏟아도 남아 있는 제 인생은 너무도 짧습니다. 앞으로 제가 50년을 더 산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너무너무 아까운 시간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십년 이상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이토록 가슴 저리는 심정을, 그 사실을 선생님께서는 눈곱만치라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제가 찾은 일은 학생들에게, 제가 정말로 하고자 하는 바로 그 강의를 하는 일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런 강의를 해야만 합니다. 학생들의 호응도와 그들의 변화되는 이 모습들을 좀 보십시오. 단 한 학기의 강의만으로도 훌쩍훌쩍 커 가는 이 젊은이들을 좀 보십시오. 그 [인간(人間)]들을 좀 보십시오. 이토록 엄청난 가능성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저의 그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보다 많은 학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이러한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먼저 시작한 사람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만, 일단 제대로 시작만 된다면, 여기 저기서 여러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파급 효과를 제발, 좀 헤아려 보십시오.
여기서 학위 논문과 관련하여 말씀을 좀 드려야 하겠습니다. 제가 석사 학위를 받을 때, 그 논문 심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학과 선생님 중에 아무도 제 논문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신 분이 없었습니다. 하여 저의 논문은 조건부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저는 인문학 분야의 연구자로서, 인문학 그 자체에 대한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 기계를 전공하였지만 인생 자체를 기계처럼 살 수가 없어서 분야를 바꾸어 인문학 대학원으로 진학했던 저였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인류사적인 성인(聖人)으로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엄청난 의미를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저에게 [그 일]이 일어난 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인간]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문 . 사 . 철의 분야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 분야에서 다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분야입니다. 물론 종교 분야에서는 더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교육]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아주 희소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고 있는 저로서는, [문학]을 기계적으로 재단하는 연구 방식에 많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에 와서 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제가 어찌 문학 연구 방법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형식주의적인 재단 방식을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문학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이미지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문학의 효용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만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수님들께서 이것을 이해하시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처음 쓴 논문은 통과되지 않았고, 논문을 완전히 새로 써야 했습니다. 석사 학위 청구 논문의 종심일이 6월 22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8월말까지, 그 무더운 여름 두 달을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불철주야로 노심초사 고쳐 썼습니다. 아니 고쳐 쓴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 썼습니다. 바로 그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견뎌 낸 논문이 지금의 제 석사 학위 논문입니다. 그 고생으로 쓰여진 논문도, 통과되어 인쇄한 후에 논문의 반 넘는 분량을 태워 버렸고, 나머지는 아직 포장 끈도 풀리지 않은 채로 창고 어디에 처박혀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남아 있는가 하는 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뒤로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써낸 논문이 그런 대접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그 젊은 열정을 쏟아 부은 결과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뭡니까?
만약에 그 처음 논문이 제대로 통과되었고, 거기서 누군가가 좀 더 도와주었더라면, 저의 열정은 천 배 만 배 더해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10년이 지난 지금의 제 모습은 그 얼마나 더 성숙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랬다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참으로 가슴 쓰라린 일입니다. 김종균 선생님, 지금 제가 드리고 있는 이 말씀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실 수 있으신 지요? 제발,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고통이 따랐지만, 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다시 박사 과정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러고서 학위에 필요한 소정의 학점을 다 이수했으며, 종합 시험과 외국어 시험 등의 자격 시험을 모두 다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다른 곳에서 시 이론과 작시 공부도 꼬박 만 삼년이 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일주일에 네 시간씩을, 똑같은 두 시간 강의를 두 번씩 복습해 가며 들었습니다. 거의 결석한 적도 없습니다. 하여 저는 대학원 전공인 문학부 시 전공에 대해서도 평균 수준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도올서원]이라는 곳에서도 만 삼년이 넘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중국 고전(古典)을 공부했습니다. 거기서도 인정받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여 [한문]에 있어서도 국문학과 박사 과정의 평균 수준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러한 과정을 밟아 온 것은, 학위 논문 제출 자격에 대하여, 대학원의 학사 행정상의 공식 인정을 넘어서 더욱 확고한 토대를 스스로 닦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그것을 위하여 [시학교실]이 개설된, 그 출판사의 궂은 일들을 다하고 다닌 그 고생도 좀 알아주십시오. 또한 서원의 그 썰렁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나이밖에 안되는, 그 스무살 짜리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한문을 배우고 했던 그 정성도 인정을 해 주십시오.
이제 다시 박사 학위를 청구하는 논문을 쓴다고 하더라도, 저는 한 분야의 세세한 연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전 석사 논문 집필 때의 고통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 고통을, 그 암울함을 되풀이 할 수는 없습니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온 인류의 구원과 관련되는 주제입니다. 거기에다가 이 일은 세계적으로 거대한 흐름이 되어서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아직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어찌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단 일 초가 아쉬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저는 평생을 다 바쳐서 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김종균 선생님!
선생님의 편지로 볼 때, 그 편지의 내용이 선생님 개인적인 생각인지, 또는 암묵적으로나마 학과 교수님들의 동의를 받은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학교 당국에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려는지 전혀 알 수도 없습니다. 만약, 학과 교수님들이 여전히 저를 미운 오리 새끼쯤으로 보고 계신다면, 박사 학위 취득 과정에서 또 무슨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학과에서 저를 보는 눈이 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으슥한 방앗간에서 서방질하다가 들킨 딸년도 아니고, 일 년 열두 달 계집질을 일삼는 방탕한 아들놈도 아니며, 종놈과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했다가 소박 맞고 돌아온 별당 아씨도 정녕 아닙니다. 단지 실제로 있는 문제를 덮어만 두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고쳐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학과가 아무 문제없이 정말 깨끗했다면 저는 애초에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조심조심 이런 문제들을 상의 드렸을 때, 학과 교수님들의 태도는 과연 어떠했습니까? 제 말을 단 한 마디라도 들어주시는 분이 안 계셨습니다.
김종균 선생님! 저는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이 너무도 많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 아픔을 쓸어 누르고 생각해 봅니다. 군자가 가는 길,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편지 글 속에서 '얼마 안 남은 정년, 이제 좀 편안하게 해 달라'고 하셨던 말씀도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예,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아주 편안하고, 아니 편안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엄청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길이 아주 환히 열려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 보십시오. 선생님께서는 그냥 터벅터벅 걷기만 하시면 됩니다. 가다가 조금 숨찬 언덕이라도 나온다면, 거기서는 제가 선생님을 업어서라도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의논해 가면서, 말 한 마디라도 좀 더 따뜻하게 주고받으면서, 그 평온한 공(空)으로 가는 길로 걸어 가 보십시다.
편지에서 선생님께서는, 저더러 우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지요? 예,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주셔야 돌아갈 것 아닙니까? [강의]로 쫓아 내셨으니까, [강의]로 불러들이십시오. [강의]할 일도 없는 사람이 뭐하러, 물가도 비싸고 인심 사납기로는 세상에서도 유명한 그 서울에 가겠습니까? 정말 저를 학교로 불러들이고 싶으시다면, 한시라도 빨리 [강의]를 주십시오. 학생들이 저렇게 목이 길게 빠져서 기다리는 저 모습이 안보이십니까? 그리고 학교 당국에도 긴급하게 건의를 하셔서 정식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라고 하셨지요? 예, 그렇게 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또한 도와 주시겠다고도 하셨지요? 예, 도와주십시오. 도와줄 뿐만 아니라, 이제 서로가 합심하여 정말 '일 같은 일' 하나 해 보십시다. 여기서 저는 저의 박사 학위 청구 논문과 관련하여, 아주 간단한 제안을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 번역, {통찰력으로의 탐험}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장 다음 학기에라도 [강의]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문제를 풀어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만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박사 학위 하나 주는 것이 그리 힘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강좌 한 두 개 맡기는 일 또한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저는 주위의 축복 속에서 학위를 받고 싶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떳떳하게 학위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 결코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제 강의를 저렇게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 드린 대로, 크리슈나무르티 번역, {통찰력으로의 탐험}을 학위 논문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당장에는 좀 의외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그 의미들이 하나하나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박사 학위 하나에 관련되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제가 살아 나갈 인생과 관련되는 것이며, 우리 사회 지식인층에서,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지성사적, 인류사적인 충격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소화해 낸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럴 만한 역량을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국문학 분야의 한 지평을 여는 작업이 될 수도 있고, 한국외대 대학원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자체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외대 구성원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고, 크게는 대한 민국의 지성이 열려 있음을 세계 만방에 고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되풀이되는 말씀 같습니다만, 이토록 엄청난 인류사적인 충격을 받고서 그것을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일은, 문 . 사 . 철과 같은 인문학 영역의 다른 그 어떤 주제보다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다만 얼마나 더 깊이 있게 해 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학과 교수님들께서 구태여 저더러 한국시 영역에서 주제를 찾아, 그 범위 내에서 논문을 써라 하시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께서 꼭 그렇게 주장하시면, 저는 또 다시 석사 학위 논문을 쓸 때의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에는 그 작업에 대한 기쁨도 없습니다. 그런 작업으로 논문이 통과되었다 한들, 지금의 제 석사 학위 논문처럼, 창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을 뿐입니다. 아니면 그 옛날과 똑같이, 또 두물머리 강가에 가서 태워 버려야 하겠습니까? 박사 학위 청구 논문들 가운데에는 이런 상황에 처한 논문들도 많이 있음을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편지 글 속에서 선생님께서는 '이제 다 살아 버린 인생'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저 또한 벌써 나이 40 줄에 들어섰습니다. 그럴진대 자신이 더 많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주제가 있는데도 그것을 팽개치고, 그다지 큰 의미도 없는 일에 또 몇 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저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로써 학위를 받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이제 더 이상 몇 개월이라도 허비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한국외국어대학교에는 번역을 학위 논문으로 인정하는 풍토도 일찍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 인정받기에도 별무리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제 자신의 개인적 역량도 고려하신다면,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은 불교에서의 반야심경보다도 심오한 내용이면서도 훨씬 자세하고 이해하기가 쉬운 책입니다. 또한 중국 고전 십삼경을 다 합쳐도 이 책 한 권에 따라오지 못합니다. 저는 이 책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지도 교수 문제는 김종균 선생님, 김형필 선생님, 예창해 선생님, 세 분께서 함께 의논하십시오. 어느 분이 지도하시든지 간에 저는 좋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 방법이 제일 무난할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논문 심사에도 세 분께서 다 함께 참여하십시오. 또한 교내에서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교수님과, 통번역센터 관계자 어느 교수님 한 분을 초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내에는 이미 상당한 관심을 가지시고 이 번역물의 초고를 다 독파하신 교수님들도 계십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께서는 적극 참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심사에 참여하시는 선생님 다섯 분 모두, 이 논문을 책으로 낼 때 뒤에 붙일 발문(跋文)을 하나씩 써 주십시오. 꼭 그러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이 박사 학위 논문을 영국, 미국, 인도 등지의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에도 보낼 것입니다. 그들이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 흐뭇해 할 그 모습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더구나 영국 재단(KFT)에서는 저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기뻐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정도의 논문은 세계적으로 이미 그 선례가 있을 것입니다. 설령 선례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만 찾을 수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김종균 선생님,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부드럽지 못했던 일들은 모두 이 역사적인 일을 이루기 위한 진통쯤으로 여기시고, 이제는 다만 이 역사적인 흐름이 보다 더 도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온 관심을 다 기울여 보십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후배, 후학들에게 하나의 등불을 켜 놓으십시다.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십시다. 이 일들은 물론, 우리 국문학과가 아니더라도 또한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아니더라도 분명히 이어지는 일입니다. 아마 지금쯤 또 다른 어떤 움직임들이 일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흐름에 하나의 작은 보탬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은 것입니다. 보탬은 적지만 그 의미는 큰, 그런 일입니다.
또한, 학생들의 보고서로써 만들어진 책, {학기가 다 지나서야 시작되는 강의}를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한시가 급합니다. 보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목을 길다랗게 빼고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학기부터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비록 강사들의 명단이 다 정해져 있겠지만, 이런 정도의 상황이라면 보완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동일 강좌명의 강의를 두 사람이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학교측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교양 과정부에도 말씀을 하셔서, 정식 명칭을 갖춘 강좌를 시급히 개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또한 저는 하루라도 빨리, 미네르바 동산에 사는 비둘기들에게 모이도 주고 싶습니다. 일초라도 더 빨리, 명수당 가에 앉아서 명수당 비단잉어들을 바라보고 싶기도 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 오라'고 하신 말씀이, '나도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정말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저에게 [강의]를 맡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교양 강좌도 그렇거니와, 한교과 전공 강좌에도 시와 관련된 강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강의도 한 번 맡겨 보십시오. 또한 교육대학원 교육학 관계 강좌 쪽으로도 관심을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범 삼아서라도 개설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시면, 당장 다음 학기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강의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맡겨지는 그 어떤 강의라도 아주 '감동적'으로 진행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제 강의는 한 학기 동안, 마치 그 무슨 공연과도 같은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공연이 끝나면 잔잔한 여운과 함께, 아련한 감동이 감싸고 돕니다. 이런 감동과 여운들은 학기가 거듭될수록 더욱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잔잔한 여운과 아련한 감동이 있는 강의! 그런 강의들이 바로 {학기가 다 지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강의}입니다.
여기에다가 이번 학기에는 자랑삼아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 저는 경남대와 중부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제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그들의 보고서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제가 이번 학기 강의를 한 반은 모두 다섯 반이었는데, 그 다섯 반의 학생들이 모두 한 권씩 책을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 왔습니다. 이 책들을 받아 들고서, 제가 또 눈물을 흘렸다면 김종균 선생님께서는 믿을 수 있으십니까? 김종균 선생님, 이러한 강의는 정말로 너무도 필요한 강의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립니다.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에 관련되어 학과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눈길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아량을 베푸십시오. 또한 자꾸만 물을 흐리게 하려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면, 그들을 멀리 하십시오. 그리고 비겁하게 뒤에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좀 일깨워 주십시오. 바로 그런 태도들이, 그런 정신들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한 정신들을 일깨우지 못하면, 그들 스스로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들은 평생을 그 모냥 그 꼴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무섭도록 파괴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에라도 선생님께서 따끔하게 충고를 좀 하십시오. 저같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하십시오. "자꾸 그러면 [강의]를 잘라 버리겠다고......."
이제 이 편지도 거의 끝이 나는 것 같습니다.
김종균 선생님!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서 얼른 뜯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젊음과 청춘 시절을 줄곧 맑은 하늘에 벼락만 맞고 살아 온 사람이기 때문에, 또 무슨 벼락같은 말들이 들어 있을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끄러미 선생님 댁의 주소를 읽어보았습니다. 정릉 가는 길에서 굽어 들어, 교회를 지나고 언덕빼기로 올라가는 그 길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습니다. 더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동동주]였습니다. 말통 두 개에다가 동동주를 가득 담아 들고 낑낑거리며, 그 길을 올라가던 일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그렇게 아프신 몸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드리라고 고향 마산에서 손수 빚어 담그신 그 동동주 말씀입니다. 그것을 옮기는 데, 고향 마산에서부터 아홉 시간이 걸렸더랬습니다. 그날 저녁 정릉 선생님 댁에서, 커다란 다라에다가 동동주 한 말을 다 부어 놓고, 잔을 띄워 가며 밤이 이슥하도록 마셨지 않습니까!
그 생각이 나서 잠시 심정이 좀 씁쓰리했습니다.
김종균 선생님!
이제 힘을 합쳐서, 정말 [일다운 일] 하나 해 보십시다. 학과의 여러 선생님과 함께 도와주십시오. 이 일들은 결코 제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님을, 이제는 어렴풋이 나마 아시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학과에서 문제들이 원만히 해결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총장님을 비롯한 학교 당국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용옥 씨가 못한 일을, 이제 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해 내십시오.
이 인류사적인 일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쯤은 되어야 제가 다시 법정 스님에게 서신을 올릴 수 있는 염치가 좀 생기지 않겠습니까!
제자 하나 좀 더 잘 키워서, 이제 여러 선생님 체면도 좀 세우십시오.
손을 꼽아 가며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만나 뵐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1998. 12. 17.
고향 마산에서 제자 김 기 호 올립니다.
추신 : 만약, 이 편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겠거든, 지난 11월에 변형윤 이사장님께 올린 글을 통째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