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망국의 군주도 모두 어리석지만은 않다〕
진한(秦漢) 이래로 나라를 망친 임금이 모두 다 어리석고 포학한 이들만은 아니었다. 초나라 의제(義帝)는 참으로 뛰어난 임금이었고, 진나라 자영(子嬰)은 즉위 초에 조고(趙高)를 죽일 수 있었으니 또한 뛰어난 임금이라고 할 만하며, 한나라 헌제(獻帝)는 중간 정도의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말운(末運)을 만났을 뿐이다.
유선(劉禪)은 참으로 평범한 재주였지만, 시종일관 무후(武侯)에게 국정을 잘 맡겼다. 무후가 죽자 이막(李邈)이 “무후가 죽지 않았으면 필시 나라에 불리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유선이 노하여 이막을 죽였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곽광(霍光)을 믿고 맡긴 것도 이보다는 못하였다. 그런데도 용렬한 임금이라고 시호를 받았으니 원통하지 않겠는가.
위(魏)나라의 고귀향공(高貴鄕公)은 죽어서도 생기(生氣)가 있었고, 원위(元魏 북위(北魏) )의 경종(敬宗)은 직접 강성한 신하를 죽였고, 원위의 절민제(節閔帝)와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도 모두 영명한 임금이었다. 북제(北齊)의 안덕왕(安德王)은 충분히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고, 수나라의 황태(皇泰)도 충분히 선왕들을 계승할 수 있었다. 유요(劉曜)와 소연(蕭衍), 염민(冉閔), 부견(苻堅)도 모두 스스로 나라를 얻었다가 잃은 자들이다.
금나라 애종(哀宗)은 망국의 임금 중에서도 특별한 점이 있는 사람이며, 명나라 의종(毅宗)은 더욱 그러하니, 만일 태평한 세상을 만났다면 정치적 업적이 어찌 다만 중간 정도의 임금이 될 뿐이었겠는가.
[주-C001] 성언(醒言) :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으로, 총 3권에 인물평 및 일화, 사론(史論), 필기(筆記), 한문단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주-D001] 유선(劉禪) : 촉한(蜀漢) 후주(後主)로 유비의 아들이다. 위(魏)나라에 항복한 뒤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졌다.[주-D002] 이막(李邈) : 촉한의 장수로 제갈량이 죽었을 적에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상소했다가 유선에게 죽임을 당했다.[주-D003] 소제(昭帝) …… 것 : 곽광(霍光)은 소제가 어려서 즉위하였을 적에 정사를 도왔으며, 소제가 죽은 뒤에 창읍왕(昌邑王)을 맞이하였다가 곧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우고는 20여 년간 정권을 담당하였다.
[주-D004] 고귀향공(高貴鄕公) : 조모(曹髦)의 봉호로, 삼국 시대 위나라의 4대 임금이다. 유자(儒者)들과 유교 경전을 논하기도 하였으나, 사마소(司馬昭)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를 치려다가 시해당하였다.
[주-D005] 원위(元魏)의 …… 임금이었다 : 경종(敬宗)은 효장제(孝莊帝)의 묘호(廟號)로, 그는 530년에 권신 대장군 이주영(爾朱榮)과 상당왕(上黨王) 원천목(元天穆)을 죽였다. 절민제(節閔帝)와 효정제(孝靜帝)도 어진 자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혼란한 시기에 강한 신하들을 제압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주-D006] 유요(劉曜) : 자는 영명(永明)이며 흉노족이다. 오호십육국 시대 전조(前趙)의 4대 임금으로 후조(後趙)의 고조(高祖) 석륵(石勒)에게 피살되었다.
[주-D007] 소연(蕭衍) :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본명이다.
[주-D008] 염민(冉閔) : 350년 대위(大魏)를 세웠으나 모용황(慕容皝)에게 살해되었다.
[주-D009] 부견(苻堅) : 전진(前秦)의 3대 임금이다. 자는 영고(永固)이고 이름은 문옥(文玉)이다. 전연(前燕)과 전량(前涼)을 멸하고 강북 지방을 통일한 뒤 동진(東晉)을 멸하려다가 비수(淝水)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주-D010] 금나라 애종(哀宗) : 몽고군이 송나라 군사와 함께 채주(蔡州)를 포위하자 천흥(天興) 3년(1233) 1월에 동면 원수(東面元帥) 승린(承麟)에게 전위(傳位)하고 다음 날 스스로 목매 죽었다.
[주-D011] 명나라 의종(毅宗) : 숭정(崇禎) 17년(1644) 3월 19일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쳐들어올 적에 자신의 시체를 훼손할지언정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만세산(萬歲山)에서 목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