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악적인 진보와 어울리는 원내정당모델
:시민들의 실생활에 정책과 소통으로 반응하는 네트워크정당
채진원(경희대 시간강사)
1.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와 정당 공론장의 약화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는 도덕성을 강조해온 진보적인 성향의 전직대통령이 부패스캔들에 연루되어 검찰 및 보수언론과의 진실공방과정에서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아울러 그 서거배경에 ‘작동되지 않는 정당정치’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제기한다.
즉, 노 전대통령의 자살배경에 대해, ‘MB정권의 정치보복설’, ‘검찰의 보복설’, ‘보수언론의 공격설’, ‘대화와 타협이 부재한 증오와 정치보복 관행’ 등 다양한 관점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주요한 지는 논리적 연관성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을 좀 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추상화하여 살펴보면, 지적된 요인들이 정당을 중심으로 한 대의적 공론장이 약화됨에 따른 ‘정당의 사인화’(personalization of political party)와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현상과 연관되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당의 사인화’와 ‘정치의 사법화’현상은 대의적 공론장을 활성화할 주체인 정당의 의원들이, 특정 보스나 지도자 개인의 정치성향과 정치활동에 속박되어 자율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갈등을 정당들간의 충분한 토론과 합의에 따라 새로운 정책과 판단기준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기존의 관행을 중시하는 검찰과 사법부에 넘김으로써 여야관계를 ‘적대관계’로 변질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한국의 정당정치가 대의적 공론장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정파들간의 갈등과 경쟁이 증오와 보복의 관점으로 폭력화되거나 극단화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이 같은 두 현상은 그동안 정치보스의 역할을 해온 ‘3김씨’가 퇴진하고, 2002년 16대 대선이후 ‘당정분리’, ‘의원들의 자율성 강화’, ‘상향식공천’ 등 여러 정당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2009년 현재 여야관계 및 전직대통령관계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상징화된 ‘3김식 정치관행들’로부터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민주화 이후 적실성 있는 대안정당모델을 찾아 제도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2. 두 정당모델과 그것의 차이점
그동안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적 논의가 있었지만 크게 ‘대중정당모델’과 ‘원내정당모델’로 수렴되어 왔다. 원내정당론자들은, 정당이 소수의 진성당원의 뜻에 좌우되는 원외정당적 성격에서 벗어나 의원들의 자율성과 유권자들의 반응성(responsiveness)에 따른 정책역량 강화를 중시하는 원내정당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대중정당론자들은, 의원중심의 원내정당화는 ‘정당조직’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보수엘리트 지배구조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민중들의 정치참여를 줄인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계층적․계급적․이념적 균열은 아직 정치적인 균열로 동원되지 않고 잠재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사회균열을 이념적으로 조직화하여 대변할 수 있는 ‘대중정당’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두 정당모델의 ‘당 운영방식’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대중정당모델은 대체로 사회․경제적인 균열에 따른 정치적 균열을 조직화하여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을 대의민주주의의 이상형으로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정당의 이익집성(interest aggregative) 기능을 다른 어떠한 기능보다도 중요하게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모델’에 입각한 대의적 운영을 선호한다. 특히, 이것은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균열된 사회이익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 때문에 사회이익을 정치적으로 반영하고 대변해야 할 주요 행위자로서 고정된 지지기반을 대리하는 이념적 활동당원(정파) 또는 이념적 성향이 강한 대리인(의원)의 협상능력이 중요시된다. 따라서 의원의 역할상은 대리인(delegate)의 모습이다. 이에 비해 원내정당모델은, 후기산업화와 지구화 등으로 요약되는 전환기적 시대상황이 고정된 기존의 사회이익들을 파편화시키고 유동성을 커지게 한다고 본다. 때문에, 고정된 사회이익을 단순히 평균하여 중간점을 찾는 ‘이익집성’(interest aggregative)에 기반한 ‘절차적 민주주의모델’이 작동하기 어렵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일반유권자들의 선호와 이익에 민감한 대표자(trustee)들이 충분한 토의를 통해 의견들을 공공선을 중심으로 통합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당의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의원의 역할상은 자신의 고정된 지지자의 선호기반에 구속받는 명령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의견을 가지고 대화와 토론속에서 공공선을 재발견하는 토의자(deliberator)의 모습이다.
3. 민주노동당의 경험과 원내정당모델의 적실성
그렇다면 이 두 모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민주화 이후 지구화, 후기산업화, 탈물질주의화, 정보화, 탈냉전화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시대상황과 부합할 수 있는 모델일까? 이것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서 대중정당모델의 전형으로 진보적 이념정당, 계급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은 분단과 반공주의에도 불구하고, 선진 사회처럼 이념적․계급적인 대중정당이 뿌리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정당사의 획기적인 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 이후 4년이 지난 2008년 18대 총선에서 분당과 함께 의원수 축소 등 극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 10여 년간의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쇠퇴의 모습은 대안정당모델로서 대중정당모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준다. 왜냐하면, 2005년 10월 26일 울산북구 재선거 패배 이후 대중정당모델로서 민주노동당의 특성이 점차 약화되거나 이러한 특성을 포기함으로써 원내정당모델이 촉진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중정당모델로서 민주노동당의 한계는 ‘진성당원제의 약화’와 ‘당원에서 차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 비율의 약화’로 극명해 진다. 즉, 당의 지지기반이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대기업 소속과 정규직,조합원 등 상층노동계의 이익만을 대변하게 되고, 반대로 다수의 비정규직과 약자들이 이탈하게 된 전환기적 시대 상황에서는 진성당원을 확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한계가 집약된 것이 2005년 울산 북구 재선거 패배였다. 그리고 이 같은 조직약화의 반작용으로 촉진된 원내정당화의 예는 ‘공직-당직겸직제도의 폐지’와 이에 따른 ‘원내의원조직의 영향력 증대’ 및 ‘개방형경선제도 도입 논의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중정당모델로 출발한 민주노동자조차 원내정당화가 촉진되었고 그 촉진 배경이 후기산업사회와 연관되어 있다는 경험연구(『민주노동당의 변화와 정당모델의 적실성』)는 한국에서 원내정당모델의 시대적 적실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즉, 그 모델이 적실성을 갖는 이유는 작금의 시대상황은 비교적 단일한 계급적 동질성에 뿌리를 내려 분명한 이념적․정파적 정체성과 노선을 추구하려고 했던 대중정당모델의 작동을 불리하게 만들고, 반대로 유동성이 커진 시대상황이 원내정당모델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4. 다성악적인 진보와 정당개혁 방향
민주화 이후 탈냉전과 탈이념사회라는 전환기적 시대상황에서 진보의 의미는 어떻게 재정의가 될 수 있을까? 민주화 이전 시기는 대체로 보수독점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진보주의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선과 이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진보주의만이 절대선이자 절대진리라는 역편향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민주화 이전의 진보는 단성악(單聲樂)적인 진보였다. 그러나 다양성과 복잡성 및 유동성이 커지는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추상적인 이념’에 기초하기 보다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기초한 다성악(多聲樂)적인 진보가 필요하다. 즉, 진보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다성악(多聲樂)적인 세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보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의견 중에 하나의 의견정도로,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잠정적인 결론수준에서 위치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같은 배경 때문에, 다성악적인 진보를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 모델은 시민사회와 네트워크하면서 토의민주주의가 강조되는 원내정당모델이 적당하다. 만약 노 전대통령의 비극을 불러온 정당공론장의 약화를 개선할 민주화 이후 대안모델로서, 다성악적인 진보와 어울리는 원내정당모델이 정착되기 시작한다면 다성악적인 보수와 어울리는 원내정당모델이 짝을 이룰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원내정당모델의 핵심은 의원간의 대화와 토의이므로, 그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외 중앙당과 대의조직의 슬림화와 조직의 네트워크화. 둘째, 의원과 원내조직의 자율성과 비중 강화. 셋째, 의원과 원내조직의 정책과 소통능력의 제고. 넷째, 상향식 후보선출방식의 정착과 정책결정의 개방화. 다섯째, 기초조직의 상향식 운영과 생활정치화 및 단계적인 지구당 부활 등이다.
* 좋은정치포럼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