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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돌고 돌아... 인연이었던가...
어느 해인가, 오래전에 백봉선생에 고나해 듣고, 책도 보았는데..
또다시 인연들이 다가오면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네요..
생생한 공부 과정을 보시고, 공부에 도움이 되시기를...()...
백봉 김기추(白峯 金基秋) 거사의 생애
<도솔천에서 만납시다>(장순용 정리, 판미동)에서 인용·발췌함
1908년 음력 2월 2일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대범하고도 반항적인 기질을 지닌 그는 항일 민족운동을 벌이다 부산형무소에서 일 년을 복역하는 등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광복 후 교육 사업을 하던 그는 오십이 넘은 늦은 나이에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해 ‘무(無)자 화두’로 정진하던 중 1964년 1월에 세상 이치가 모두 열리는 듯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居士風)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여러 철학교수와 예술가들이 그를 찾았으며 청담, 전강, 구산, 경봉, 탄허, 혜두, 강혜스님 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자비심 넘치고 열정적인 그의 설법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망상을 놓게 해 그들이 참다운 자유와 평화에 이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5년 8월 2일 아침,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입적했다. 중생에 대한 지극한 연민으로 열반에 든 뒤에도 거사의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고 한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선문염송요론』 『절대성과 상대성』 등이 있다.
* 감방벽에 쓴 관세음보살
무신론자였던 시절
백봉거사의 본명은 김기추(金基秋)이다. 1908년 2월 2일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원을 운영했다. 전통적인 유학(儒學)의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부산 영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조선어와 조선사를 교과목에 넣어 달라고 요청하고 일본어로 된 학교 교명을 바꾸려는 운동을 선동하다가 주동자로 퇴학을 당한다. 그 후 백봉은 민족단결과 조선해방에 뜻을 둔 청년동맹에 가입해 일제(日帝)에 항거하지만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요시찰 인물이 되어 부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수감 생활을 할 당시 동생이 『채근담』이나 『벽암록』 같은 일본어로 된 책을 넣어 주었는데, 백봉은 『벽암록』에서 참선법에 관한 짧은 글을 읽고 무작정 면벽(面壁)을 했다. 이틀 동안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벽 밖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과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 몇 마리가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창문틀을 잡고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사람들이 오가고 전깃줄에 참새가 앉아 있었다. 백봉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당시 사회운동과 민족주의 사상에 전념했던 그는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던 무신론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일제하의 탄압과 해방 후의 온갖 시련을 거치면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회의로 발전했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은 양심적으로 살다가 깨끗하게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감방 벽에 쓴 관세음보살
감옥을 나온 백봉은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피신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헌병대에 잡혀가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바로 이 감옥에서 그는 관세음보살과의 인연을 갖게 된다. 그의 직접적인 육성을 들어보자.
그럼 여러분, 내가 공부하게 된 계기를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과거 일제 시대에 청년운동을 좀 했습니다. 청년운동을 하다가 징역도 살고 그랬는데, 불교니 예수교니 하는 것들을 전부 미신으로만 알았습니다. 그 당시 내가 어떻게나 똑똑했던지 일제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사람으로 안 봤어요. 그들이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어도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민족적 사상도 없다고 얕보았지요. 지난 일이니까 탁 털어놓고 말하자면, 아마 젊을 때는 그런 생각도 한번쯤 갖게 되는 모양인가 봐요. 그렇게 사회운동도 하게 되었는데, 날 아끼는 친구들에게서 '네가 그렇게 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런다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겠나.' 하는 충고도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 그들의 말이 옳지요. 그 말이 전부 긍정이 돼요 . 하지만 긍정이 되면서도 왠지 모르게 내 생각이 없어지질 않아요. 나중엔 학교도 퇴학 당하고 취직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취직을 하려고 해도 일본 사람 밑에서는 꿈도 꿀 수 없어요. 설사 내가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겁니다. 항상 사상이 나쁘다고 감시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지내다가 나중에 만주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난 먹고살기 위해서 만주에 갔어요. 가긴 갔는데 만주나 우리나라나 매한가지입니다(요시찰 인물로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음). 당시 경상남도의 경찰 간부들이 만주의 경찰 간부로 옮겼다는 말이 있었습니다(백봉은 부산과 경남 지역 청년동맹 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그러니 취직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취직을 하려고 해도 취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만주에서 ‘동만산업개발사’라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회사 광고지를 일본 말로도 쓰고 한국 말로도 써서 일본의 관청과 한국의 관청에 다 보냈습니다. 이 회사는 금광과 토지를 소개하는 일을 한다고 알리고, 만약 토지를 살 경우 농사까지 지어준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자본 한푼 없이 무작정 벌인 일이었습니다. 한 열흘쯤 지나니까 일본에서 답장이 오고 한국에서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답장에는 이력서가 들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울었습니다. ‘나를 그 회사에 넣어 주시오, 월급은 얼마 안 주셔도 됩니다, 내 뼈를 만주 땅에 묻을랍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가만히 보아하니 내 신세와 다를 바가 없어서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후에 헌병대에서 헌병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날 유치장으로 데려가 그 안에 집어넣었는데, 거기서 예닐곱 달 고생했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붙잡혀 들어간 거예요. 그 당시엔 필요없는 인간은 수갑을 채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 꿇어앉힙니다. 그리고 수갑을 풀어주고 구덩이를 파게 한 뒤에 칼로 쳐서 죽입니다. 당시 나하고 함께 감옥 생활을 하던 사람 중에 최 씨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무식한 사람인데 딸이 보고 싶다는 얘기를 늘 하곤 했지요. 그 사람 하는 말이 아버지나 마누라보다도 열다섯 살짜리 딸이 제일 보고 싶다고 그래요. 또 공산당 유격대 대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김 씨라고 했죠.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잘났습니다. 또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었고, 공산당 당원인 중국인과 일본인도 한 명 있었어요. 일본인은 경찰서장 하던 사람인데,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붙잡혀 왔어요. 그런데 그 조그만 유치장 안에서도 그렇게 사회가 다르고 이념이 달라요.
또 내가 있던 여관 주인과 거기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도 나 때문에 다 붙잡혀 왔습니다. 무슨 죄목인지도 몰라요. 내가 죄가 없는데 그 사람들이 죄가 있을 턱이 있나요. '김기추를 언제부터 아느냐?'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고문해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기를 꺽는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한 번씩 불려 나가면 어찌나 두들겨 맞는지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요. 좌우지간 반죽음이 돼서 들어와요. 그런데도 나는 부르질 않아요. 난 '한 번 불려 나가서 맞기 시작하면 굉장히 맞으려나 보다. 까딱하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헌데 죽을 때 죽더라도 정신은 차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소리만 나면 가슴이 덜컥했어요. 게다가 반죽음이 돼서 돌아온 사람들이 전부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것 참 할 짓 아니데요.
당시 나는 무신론자였는데, 이 얘길 하려고 옛날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그런 내가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회칠한 감방 벽에다 한문으로 ‘관세음보살’을 쓰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부산에서 청년동맹 위원장을 하다가 붙잡혀 들어가 징역을 살았는데, 그때 책을 보다가 관세음보살이란 명칭을 알긴 알았어요. 아무튼 이 관세음보살을 감방 벽에다 쓰기 시작했는데, 한 대여섯 달 쓰니까 벽 전체가 관세음보살로 꽉 찼어요. 물론 벽에다 낙서를 하면 걸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겁을 내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아마 내 딴엔 죽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아까 말했던 딸 생각하던 최 씨가 그 방에서 제일 먼저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밖에 나가서 죽을 때 '에이, 니기미 X팔' 하고 앉은 뒤에 한 칼에 죽었다고, 밥 심부름하던 아이가 소식을 전해 줬어요. 또 공산당 하던 김 씨는 헌병에게 다가가 '날 살려 다오, 내가 이 은혜는 갚을게, 날 살려 다오.'라고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하, 무식하긴 두 분 다 무식한 분인데, 최 씨가 좀 더 여유가 있구나. 죽는 순간에도 그렇게 늠름하게 갔으니.’
또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아버지가 중국인인 아이는 만주국 국가를 부르고 죽었다고 전해 줘요. 그도 공산당으로 들어왔는데, 마지막에 만주국 국가를 부르면 혹시 살려 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부른 게 아닐까 싶었어요. 아무튼 감옥 안이 이런 판이었어요. 한쪽에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서 들어오고, 한쪽에선 모가지가 떨어지고 있었단 말예요. 그러니 내 딴엔 놀라고 걱정스러우니까 온 벽에 관세음보살이라고 쓴 것 같아요. 겁나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생각이 그리 깊지가 않았어요. 참 이상한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밖으로 나오라고 해요. 방을 점검하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밖으로 나오면서 '아이고, 오늘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감방 벽에다 글자를 잔뜩 써 놓았으니까 말예요. 사람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 앉아 있는데 ‘사토’라는 헌병이 와요. 이 자는 사람의 목을 삼백 명까지 자르고 그 다음부턴 자르지 않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 사람입니다. 이 자가 다가와서 '어이, 김기추, 너는 관세음보살을 막 써놓았네.'라고 말해요. ‘어이쿠, 이젠 큰일 났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그 자의 표정을 보니 웃고 있어요.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일본엔 불교가 성하다던데 이 자가 불교 집안인가 보구나.' 하는 것이었지요. 나는 죽을 판이라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그 자의 표정을 가만히 보니 사람을 죽이려는 표정이 아니에요. '어쩌면 내가 살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생각 하면서 감방에 들어와 보니 벽에 관세음보살 써 놓은 것도 그대로 있어요.
당시에 나는 글자를 쓰면서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다 써 놓고도 '관세음보살'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우면서 쓴 것 같아요. 안 외우면 그렇게 쓰질 못합니다. 여러분이 자비심을 발동시키면 바로 여러분 자신이 관세음보살의 대행기관이 됩니다. 관세음보살과 여러분이 둘이 아니에요. 또 여러분은 파순(波旬, 악마. 육계의 여섯 번째 하늘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마왕)이도 될 수도 있습니다. 모습놀이(모습[相]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것)를 좋아하면, 그 몸 그대로 파순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이런 걸 알 턱이 있나요.
그러다가 한 달쯤 지났는데, 헌병 오장(伍長)인 ‘기무라’라는 자가 운동복을 입고 막대기를 들고 들어왔어요. 덜커덩하고 큰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더니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이제 난 죽는구나. 물을 먹이면 물 먹을 자신은 있는데, 정신은 잃지 말아야겠다.’
단지 이 생각 뿐이었습니다. 따라 나가니까 기무라가 목욕탕으로 가요. '그렇지, 물 먹인 뒤에 때리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문을 열더니 '어, 아직 준비를 안 해 놓았네.'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날 죽일 생각이면 물 먹일 준비를 다 해 놓고 날 불렀을 텐데, 이거 이상하구나. 어쩌면 살지도 모르겠구나.’
목욕탕에 고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자, 기무라가 날 다른 방으로 데려가요. 그 방에선 다른 사람이 취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하, 다른 사람을 취조하고 있는 방을 빌리려는 걸 보니 계획적으로 하는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방에서 취조하고 있던 자가 날 보더니 '아, 이게 김기추인가?' 하는 겁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방 한 편에 서 있었는데 날 데리고 나온 기무라가 내게 의자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해요. 내가 의자에 앉자, 기무라는 연필을 가지고 와서 내 손가락에 끼운 뒤에 누르는 거예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뼈가 부서져도 상관없습니다. 거짓으로 아프다고 하니까, '에이' 하면서 좀 놔두다가 감방으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감방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날 보고 놀랍디다. 내가 무사히 돌아와서 놀라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풀려났는데, 그 후에는 헌병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사뭇 달라요. 취직을 하라는 거예요. 아마도 나를 살려서 이용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해로우니 죽여 버릴지 자기들끼리 의논하다가 살려 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 것 같아요. 그래서 취직을 하려 했는데 때마침 ‘노구교 사건’(1937년 중국과 일본 군대가 노구교에서 충돌한 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됨)이 터졌어요. 그 사건 때문에 헌병대장이 현지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나도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온 뒤 가지 않아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지요.
* 수행과 경계
쉰여섯 살에 불법 공부를 시작하다
만주의 헌병대에서 살아나긴 했지만, 백봉은 여전히 종교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백봉은 일정한 직업 없이 지냈다. 물론 주위에선 취업을 종용했지만 그의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고, 해방 후에도 격동하는 현대사의 조류에 휩쓸려 모진 시련과 좌절을 겪었던 그는 이러한 시련과 좌절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쉰여섯 살 이전까지 그의 종교관은 앞서 말했듯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 절에 가게 된 일화는 당시 불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준다. 어느 날, 절에 다니면서 참선 공부를 하던 친구 신원경(申圓鏡) 선생이 백봉에게 절에 가자고 권유했다. 그때 백봉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네, 그럼 술은 내가 사지."
"뭐라고, 술?"
신 선생이 어이없어 하며 화를 냈다.
‘거 참, 이상한 인간이다. 내가 돈을 내서 사겠다는데 어째서 성을 내지?’
백봉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왜 화를 내느냐고 물었다.
"아니, 절이 무슨 술 마시는 곳인 줄 압니까?"
신 선생이 물었다.
"경치 좋은 데 절이 있지 않은가? 그런 곳에 가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서 마시는가?“
"어허.“
신 선생은 기가 막혀 했다. 하지만 백봉도 기가 막혔다. 신 선생은 신 선생대로 백봉은 백봉대로 기가 막힌 판국이었다.
신 선생은 절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불교 공부에 관해 알려 주었다. 참선이나 화두 등에 관한 얘기와 견성을 하면 엄청난 경지에 오른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백봉은 불교 공부나 견성(見性)은 되는 사람이나 되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선생은 백봉에게 불법을 공부하도록 계속해서 권유했다.
"이 세상에서 공부를 하지 않고 마음을 바로 갖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럼 공부를 하면 지옥에 안 떨어집니까?“
신 선생의 말에 백봉이 물었다.
"지옥이 붙을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지옥에 떨어집니까?“
이 말을 들은 백봉은 굉장히 놀랐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옥이 붙는다, 안 붙는다’라니! 평생 이렇다 할 나쁜 짓은 하지 않았고 일제에 항거하고 육영사업도 했지만, 부모님에게 효도도 하지 못했고 처가에도 잘하지 못했으며, 또 술을 너무나 좋아하고 평소에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았던 백봉은 자기가 지옥에 들어가는 데 꼭 어울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이 공부를 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백봉은 남의 말을 쉽게 믿어 버리는 단순한 성격이었다. 후에 그는 '내가 어리석었기에 오늘의 존재가 있는 것이지 똑똑했다면 오늘의 존재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바로 이 '어리석음' 때문에 공부를 하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견성 같은 것 말고 요술이나 가르쳐 주십쇼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백봉은 도반들과 함께 관악산에 있는 절로 향했다. 절에 도착한 일행은 주지 스님을 만나 인사를 했다. 주지에게 삼배를 하는 도반들 사이에서 절을 할 줄 모르는 백봉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억지로 절을 마친 백봉은 주지에게 엉뚱한 부탁을 했다. 모두들 어려워하는 견성을 자신 역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놓은 엉뚱한 제안이었다.
"견성 같은 것 말고 요술이나 가르쳐 주십쇼. 돈 나와라 하면 돈이 나오고, 누가 미우면 때려줄 수도 있는 요술 말입니다.“
주지 스님은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견성을 합니다. 요술을 배울 힘으로 좋은 걸 배워야지 나쁜 것을 배우면 되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주지는 그를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라니를 외우면 견성할 수 있으니 한 번 외워 보라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백봉은 집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외우기 시작해서 밤까지 부지런히 외웠다. 그렇게 사흘을 외웠다. 견성이 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그 절의 주지를 다시 찾아가 물었다.
"내가 사흘 동안 다라니를 열심히 외웠는데,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아, 견성한다고 해서 열심히 외웠습니다.“
”아니, 일평생을 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라고들 하는데, 사흘 동안 다라니를 외웠다고 해서 견성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난 하면 철저히 합니다.“
주지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면 화두를 가지라고 하면서 무(無)자 화두를 주었다.
무(無)자 화두를 들다
이렇게 해서 백봉은 화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한 달 반 정도는 화두가 잡히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화두를 잡았다가도 자꾸 놓쳐 버렸다. 그는 고난과 좌절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되새기면서 반드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 공부를 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를 새롭게 다지자, 그 후로 화두가 슬며시 잡히기 시작하면서 별별 환상이 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환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좋은 환상이 아니었다. 구렁이를 생각하면 머리가 열두개씩 달린 구렁이가 나타나기도 했고, 돼지가 나타나서 물려고 달려들었으며, 머리가 여럿 달린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나쁜 것이 수없이 나타났다. 망상에서 비롯된 무서운 환상이었다. 공부하다가 미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봉은 이러한 환상이 다 헛것이며 비과학적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환상이 나타났다가도 이내 사라졌다. 나중에는 절이 나타나고 스님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급기야 태양과 달 같은 광명이 나타나기도 했다. 밖에 있는 소나무 잎 하나하나가 선명히 보였다. 오히려 대낮에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것도 망상이라고 여겼으며, 망상이긴 하지만 좋은 경계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인천에 살았는데, 늘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고 돌아갔다. 술을 워낙 좋아한 그는 매일같이 술 마시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술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을 결코 놓치 않았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도 광명이 나타나자 그는 옆 사람에게 물었다.
"자네, 저 광명이 보이는가?“
"아니, 무슨 광명?“
옆 사람이 대답했다.
백봉은 자신이 환한 광명을 보았다면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광명이 마음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차츰차츰 깨달아 들어간 것이었다.
육조의 환상을 토해 내다
그러나 중간에 그는 화두 공부를 집어치우려고 했다. 화두 공부를 하는 중에 몸이 너무나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았다. 혹시 몸에 어떤 이상이라도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으나,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화두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두가 딱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화두를 버리려고 마음먹었지만 화두는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화두를 버리려는 그 마음이 화두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화두를 갖게 되었다. '내가 팔자가 나쁘니 이 공부를 해야겠는데, 화두가 떨어지질 않으니 그대로 갖고 있자. 또 도반들이 화두를 깨면 굉장하다고들 하니 죽으나 사나 갖고 있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백봉은 처음엔 무(無)자 화두가 육조스님에게서 나왔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두를 계속 참구하다 보니 육조의 환상이 나타났다. 백봉은 육조의 멱살을 잡고 지근지근 씹어서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육조의 환상이 '날 살려다오.' 하면서 아우성쳤다. 백봉은 그 환상을 향해 어째서 무(無)라고 말했는지 답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무(無)자 화두가 육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조주선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육조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낀 백봉은 육조의 환상을 배 속에서 토해냈다. 밖으로 나온 육조의 환상이 사라지면서 한마디 던졌다.
"기추, 그 양반 되게 무섭네."
백봉은 다시 조주를 머리부터 지근지근 씹어 배 속에 넣고는 화두를 참구했다.
어느 날 그는 밤새도록 참선을 하다가 문득 아침을 알리는 고동소리를 들었다.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방 안이 환해졌다. 백봉은 '이거 또 망상이 일어나는구나. 그렇지만 이 망상은 좋은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옆을 보니 하얀 옷을 입고 갓을 쓴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망상은 이상하구나. 좀 두고 봐야겠다.’
당시 그의 앞에는 그림이 한 장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 앉아 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그림과 저 하늘의 달은 원리가 하나다. 그런데 기추, 네가 분별이 많기 때문에 그 원리가 하나인 줄 모를 따름이다."
이 말을 들은 백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 달이 떠 있었다. 그 시각은 달이 보이지 않는 때라는 사실을 백봉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사라졌다. 백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이니 결국은 망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보름간의 정진
이 경계를 체험하고 난 며칠 후 백봉은 도반들과 다시 암자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공부하겠다는 도반들만 남녀 합쳐서 아홉 명이 모여 보름간 정진하기로 했다. 며칠 전에 기이한 경계를 체험한 백봉의 심경은 이미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변화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백봉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이 들뜸은 썩 좋은 느낌이었다. 절에 가자 들뜬 마음은 더욱 심해졌다. 밥을 먹으려 해도 밥맛이 없었고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들뜬 마음이 마치 내 보물을 내가 어디다 간직해 놓고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봉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도반들은 서로 의논을 해서 암암리에 그를 돌봐 주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백봉은 이제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신 선생이 백봉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백봉은 묵묵히 따라 나갔다. 이상하게도 말조차 하기가 싫었다. 도반들이 자길 돌보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돌봄이 고마웠지만, 이상하게도 말은 하기 싫었다. 두 사람은 오륙백 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로 내려갔다. 평소에 말이 많은 신 선생도 그날따라 말이 없었다. 백봉은 내심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걸음을 걷는데도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마을을 걷다가 백봉은 어느 나무 아래에 앉자고 말했다. 신 선생도 아무 말 없이 따라 앉았다. 백봉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점점 더 커졌다. 뭔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백봉은 절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신 선생도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절로 돌아갔다.
절에서는 매일 모여서 예불을 했다. 도반들은 견성성도(見性成道)를 기원하는 원(願)을 세우면서 예불을 드렸다. 간절한 염원 때문에 도반들은 전부 눈물을 흘리면서 예불을 했다. 그러나 백봉은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젊은 시절 청년운동과 대중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백봉은 대중과 함께 생활을 할 때는 대중에게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하루가 지난 뒤 예불을 드릴 때는 눈물이 나올락 말락 하다가 다시 쏙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목탁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목탁 소리가 ‘딱딱딱’ 하면서 단음절로 들려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둘로 나뉘어 들리는 것이었다. 백봉은 옆의 신 선생에게 물었다.
"자네, 목탁 소리가 몇 개로 들리나?"
"목탁 소리가 하나로 들리지 몇 개로 들리겠소?"
백봉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자기 귀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옆을 바라보니 신장(神將)이 보였다. 신장은 백봉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마치 탱화의 그림처럼 멋진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었다. 백봉은 ‘요즘 같으면 총을 차고 양복을 입고 있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옆의 도반에게 다시 물었다.
"자네, 여기 신장이 보이지 않나?"
"신장이라니, 무슨 신장이 있다고 그래요. 아무 것도 없는데."
아무래도 백봉의 눈에만 신장이 비치는 모양이었다. 백봉은 자기가 귀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눈까지 고장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 공부를 해서 견성을 하면 굉장하다고들 하더니, 귀 병신 되고 눈 병신 됐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눈물도 조금 나오다가 말았다. 결국 사람들과 한 방에서 참선과 예불을 하는 데 거북함을 느낀 백봉은 되도록 방에 있지 않고 밖에서 참선을 했다. 당시는 겨울이었으므로 눈이 많이 와 쌓여 있었다. 그런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온 백봉은 아무 바위에나 앉으면 그대로 화두 참구로 들어갔다. 그는 공부의 방법이나 체계에 관해 제대로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지만, 한번 앉으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앉은 채로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고 밤을 꼬박 샐 때도 있었다.
* 깨달음
방광(放光)을 함
암자에 온 지 며칠이 지난 1963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백봉은 몸에서 열이 나자 도반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 바위 위에 앉아서 참선을 했다. 하늘에서는 커다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깊은 삼매에 들어간 그의 몸에 눈이 수북히 쌓였다. 하지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내리는 눈은 닿자마자 녹아 버렸다. 몸의 열기 때문인 듯했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새벽 네 시쯤, 당시 암자에서 사오 리 떨어진 마을의 동네 사람들이 사랑방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암자 있는 곳에서 화광(火光)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광명이 솟는 곳에 금광이나 금불상 같은 것이 있다는 속설을 떠올리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암자로 올라갔다. 빛이 비치는 곳을 찾아가니, 어떤 사람이 코만 빠끔히 내놓은 채 바위 위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온몸이 얼어 있고 숨소리만 가늘게 들렸다. 사람들은 얼음장 같은 그 사람을 안아서 방 안으로 데려갔다. 신 선생이 나와서 그의 언 몸을 주물러 녹였다. 그즈음 백봉의 행동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던 신 선생은 백봉의 기색을 살핀 뒤 평소 보고 있던 선사(禪師)의 어록(語錄)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아무 데나 펼쳐 보여 주었다.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
마조(馬祖) 대사의 말씀이 나왔다. 이 구절을 본 백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 것 같았지만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신 선생은 백봉의 안색을 살피면서 다음 장을 넘겼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역시 마조대사가 황매(黃梅)선사에게 한 말이 나왔다. 이 구절을 본 백봉은 깜짝 놀라면서 벌떡 일어섰다. 훗날 자신의 표현대로 '덜컥 걸려 들었던' 것이다. 멍멍한 기분이었다. 몸에서 방광(放光)을 하자, 도반들은 그가 대오(大悟)한 걸 알아차리고 일어나서 세 번씩 절을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습으로만 비칠 뿐이었다. 방 안에 난 창문을 통해 산이 보였는데,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암자 아랫마을에서 땡그렁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를 들은 백봉은 깨달음의 심경을 이렇게 읊었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 안이 분명허이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忽聞鐘聲何處來
寥寥長天是吾家
一口呑盡三千界
水水山山各自明
깨닫고 나니 온 허공이 ‘나’
이 「종성(鍾聲)」이라는 시에 대해 백봉이 직접 설법한 내용을 들어 보자.
그때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어요. 멍멍한 상태였는데, 도반들이 모두 내게 세 번씩 절을 했대요. 당시엔 난 몰랐거든. 나중에 들으니 그런 것 같아요. 그때 방 남쪽으로 창이 하나 있었는데, 창을 통해 바라보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변했다면 또 망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 마침 마을에서 예배당 종소리가 들렸는데, 그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忽聞鐘聲何處來)‘라고 했습니다. 물론 예배당 종소리인 줄 알았지요. 그러나 예배당이 예배당만이 아니거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가령 예배당 같은 건물)이 본래의 지혜에서 나와 갈린 것으로 그 당처(當處)는 하나예요. 쓰는(用) 데엔 유정과 무정이 영 달라요. 아, 돌멩이와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종소리 나는 곳은 한 군데 아니겠어요? 우리가 예배당 종이다 뭐다 구별해서 그렇지 당처는 하나예요. 그 소리가 바로 나한테서 오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바로 온 누리가 '나'이고, 내가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벌어지는구나. 그러니 나와 부처님의 당처는 하나구나.‘ 이런 것이 느껴져요(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부처님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불교 공부를 해도 공부를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소리가 온 곳을 안다면, 예배당 자체가 내 몸 아닙니까? 온 허공이 '나'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 안이 분명허이(寥寥長天是吾家)’라고 했어요. 내 집이 어딘가? 허공 전체가 내 집이에요. 처음엔 '내 집(吾家)‘ 대신 '내 몸(吾身)’이라고 하려 했어요. 하지만 몸이라 하든 집이라 하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一口呑盡三天界)‘라고 했는데, 그때 내 심경이 이랬습니다. 산하대지가 전부 내 성품 속에서, 내 뱃속에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했어요. 이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물론 이 몸뚱이(肉身)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지만 '허공이 곧 나'이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없는데 산하대지가 있어요? 내가 없는데 부처님이 있어요? 그러므로 부처님과 나는 동근(同根)이란 말예요. 이 '나'는 파순이 되려고 하면 당장 파순이 되고, 부처가 되려고 하면 당장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려면 당장 중생이 돼요. 그 뿐인가, 지옥에 가려면 지옥에 가고 극락에 가려면 극락에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크냐 이 말입니다. 사실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지요. 작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허공을 싸고도 남고 큰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바늘귀에 들어가고도 남아요. 이걸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정말 굉장한 겁니다. 바로 이 주인공인 '나'를 슬며시 알아차렸단 말이에요.
‘아, 그렇구나.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구나. 마음대로 하는구나. 이런 재주를 내가 갖고 있구나. 게다가 나고 죽는 것도 없구나. 단지 나고 죽는 것을 나투어서 쓸 따름이구나.’
또 이런 사실도 저절로 알게 돼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건 굉장한 건데. 참말로 절이라는 데가 술만 먹는 곳이 아니구나. 그리고 산하대지를 비롯한 우주의 숱한 천체가 결국 이걸 벗어나지 못했구나. 이걸 벗어나면 의지할 곳이 없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절대(絶對)에 속한 거예요. 자신이 딱 생겼습니다. 이렇게 느끼고서 바라보니, 자기 인연에 따라서, 자기 멋에 따라서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스스로가 밝았어요(水水山山各自明). 그래서 이 시를 지은 겁니다.
하지만 육신에 들어앉아서는 이런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시 내 심경은 허공이 곧 몸이었어요. 욕계, 색계, 무색계, 천당, 지옥이 다 허공 속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키우려면, 키우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육신을 내버려야 해요. 사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허공과 한가지입니다. 이 허공이 '나'라는 느낌이 들면 확 달라집니다. 우리가 중생놀이를 하는 것도 무정물인 육신 때문에 중생놀이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려 할 때도 이 육신을 방하착(放下着)해야 부처가 되는 거예요.
* 열반
무엇이 최초의 구절인가?
1985년 여름 철야정진(徹夜精進) 기간이었다. 선원에서는 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씩 일주일에 걸쳐 철야를 하면서 정진을 한다. 그해에도 선원에 상주하던 제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오는 도반들 맞을 준비에 바빴다. 백봉은 자신이 지은 「여하시최초구(如何是最初句, 무엇이 최초의 구절인가?)」라는 시를 하얀 천 위에 썼다.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이에 오니
허수아비 땅 밟을 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여기에서 묻지 마라 지견풀이 가지고는
이삼이라 여섯이요 삼삼이라 아홉인 걸
無邊虛空一句來
案山踏地大圓鏡
於此莫問知見解
二三六而三三九
그러고는 제자들을 시켜 이 시를 긴 대나무 장대 위에 걸고는 선원 입구에 세워 놓게 했다. 철야정진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지난 철야정진 기간에는 하지 않던 일이었다. 철야정진을 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그동안 오지 않던 백봉의 초기 도반들과 제자들도 많았다. 일주일의 용맹정진 기간 중 백봉은 유난히도 도솔천에 간다는 말을 많이 했으며, 쇠약한 육신을 이끌고도 더욱 더 열성을 다해 설법을 해 나갔다. 평소 단정하던 흰머리도 그대로 길게 길렀다. 법문 도중 백봉의 열반을 짐작한 어느 제자는 울면서 열반에 들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백봉은 조용히 서서 허허로이 웃을 뿐이었다.
철야 마지막 날엔 일찍이 없었던 유마탑 조성 기념행사가 있었다. 이 유마탑은 선원 앞 밭을 제자들이 개간하면서 나온 돌멩이를 모아 쌓은 탑으로 번듯한 모양새의 탑이 아니었다. 탑 조성에 대한 설계도 새로 하고 조성기금도 마련하자는 얘기도 있었으나 백봉은 제자들이 동선(動禪)하면서 쌓은 돌탑이 더욱 값지다면서 한사코 돌무더기 탑을 고집했다. 백봉은 철야를 다 마치지 못하고 떠나는 제자들도 전과는 달리 각별히 배웅했다. 일주일의 기간이 도반들의 용맹정진으로 지나갔다.
마지막 설법
1985년 8월 2일 아침, 백봉은 철야정진 해제식(解制式)을 끝내는 마지막 설법을 했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간 뒤 잠시 앉아 있다가 조용히 쓰러졌다. 제자들은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병원에선 회생 불가능이라고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의식이 전혀 없는 백봉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중생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백봉은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든 날로부터 장례를 치르는 날까지 사흘간 비가 몹시 쏟아졌지만, 장례를 치르는 날에는 거짓말처럼 날씨가 활짝 개었다. 장지는 백봉이 평소 말하던 선원 앞 지정된 장소에 마련됐다.
지난 몇 달간 백봉은 이번 8월에는 내가 이 산을 막 뛰어다닐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열반에 들기 이삼일 전에는 이 몸이 귀찮으니 이젠 내버려야겠다고 말했다. 또 마지막 철야정진을 앞두고는 「여하시최초구」를 제자들을 시켜 장대에 걸게 했다. 왜 그랬을까? 긴 장대에 꽃힌 이 깃발은 만장(輓章)이 되어서 백봉을 보내고 있었다.
출처 :보림선원 서울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 初志 김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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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려운시대에 도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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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정진을 한 결과 득도를 하셨난 봅니다.
화심거사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