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제7장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격과 성품을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의 백성은 팔복에서 주는 이 백성들을 향해, 그런 유의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에게 특이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들은 사회에 소금과 빛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를 부패작용에서 지키며 산산조각 나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것이며,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빛을 떠나서는 세상이 지독한 암흑 상태에 남아 있게 될 그런 빛으로 말입니다.
주는 그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곧 율법 박사들의 가르침과 대조하셨습니다. 주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또 기도와 금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자세한 교훈을 주심으로써 그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비판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루셨습니다.
주는 이 모든 원칙을 설정해 오고 있습니다.
주는 결국 너희가 이런 삶을 살며 그 삶을 나타내 주기 바란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 산상설교를 듣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
너희가 그저 듣기만 한다면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이 모든 묘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주님은 결국 '내 설교는 끝났다. 너희는 이제 곧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봐야 한다. 나는 어떻게 하려는가? 내 반응은 어떠한가?
팔짱을 끼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참 훌륭한 설교다. 하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산상설교는 실천해야 할 것인 것입니다.그런 다음 주는 계속해서, 시험할 것이 또 있는데 곧 열매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산상설교를 찬양은 하면서도 삶에서 그것을 나타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나무가 얼마나 멋지게 보이는가가 아니요 그 열매로 시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곧 환경에 의해 우리에게 적용된 시금석입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폭풍이 위협할 때 비가 내리고 홍수가 밀려와서 우리 삶의 집에 부딪칠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집이 서 있습니까?
우리가 이행하고 실천해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특히 13,14절을 검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는 스스로 묻고 대답하십니다. 주께서 권면하시는 삶의 특색은 '협착함"입니다. 그것은 폭이 좁고 한정된 삶이요, '좁은 길'입니다.
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 문이 좁습니다. 동시에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주의 실례는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문득 문 두 개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왼쪽에는 매우 넓고 광대한 문이 있고 큰 무리가 떼를 지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오른 편에는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좁은 길이 있습니다.
넓은 문을 통해서 그 문이 넓은 길로 인도되고 있는 것과 큰 무리가 그 길을 따라 파도처럼 달려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른편 문은 처음에만 좁을 뿐 아니라 길도 계속 좋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주님은 결국 '내가 말해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저 좁은 길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시어 이런 삶을 살도록 명령하십니다.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시작부터 좁고 협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길이 갑자기 좁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 자체, 곧 이 삶에 들어가는 입구부터 좁은 길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지혜와 육적 동기가 '좁은 문'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결국 비기독교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으며, 기독교를 협착한 생활로 생각해서는 아니 되며, 가장 매력적이요 신기하고도 자극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여러분이 많은 무리들 속에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 정직해서 그 자체가 좁은 입구, 좁은 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타협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예외적이며 유별난 사람들이 된 것을 자각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민감한 사람에게
첫째로 일어나는 것의 하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나 자신은 살아있는 영혼이요, 나는 나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짐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기독교인 된 사람은 먼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독립된 단위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 문은 한 번에 한 사람씩 통과시킬 뿐입니다.
이 문은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책임있는 존재임을 그에게 자각시킵니다. 나는 대중과 세상과 외부의 환락을 떠나야 할 뿐만이 아닙니다. 더욱 어렵고 더욱 협착하고 좁은 것은, 내가 바깥세상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요구하는 정신을 억제해야 하며, 악한 자를 대적해서는 아니 되며,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본능에 따라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저절로 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를 않게 됩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 옷가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입니다.
이런 명령을 본능으로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자기 백성이 되려면 타락한 것과 본능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등, 우리의 타락한 성품이 좋아하고 행하는 것들을 밖에 두고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안일한 구원의 위험성과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만사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시초부터 이것이 어렵게 되어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날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의 길도 떠나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점점 더 좁아집니다.
진정 이런 삶을 살기 원할진대 우리는 '자아'를 바깥에 남겨둬야 합니다. 자아는 옛 아담이요, 타락한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는 옛 아담은 밖에 남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려라'는 말씀은 그것을 문밖에 두고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옛사람은 뒤에 두고 떠나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옛사람을 밖에 남기지 않았으므로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사도의 권면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은 자아와 교만을 부끄러워합니다.
산상설교 처음부터 '심령이 가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에 마주칩니다. 이 세상에 탄생된 자연인 치고 심령이 가난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천성으로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만한 성품으로 태어났고, 세상은 출생 때부터 우리의 교만을 북돋기 위해 할 짓을 다합니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일입니다. 가난한 심령은 교만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우리를 멸시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며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자아는 이런 상황 가운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줄곧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 주님은 시작부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무슨 일이 생깁니까?
자기를 부인하고(이것이 항상 첫째로 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지니라'입니다. 우리 자아를 밖에 남겨두고, 문을 통과해 들어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생활의 시작은 협착입니다. 이 문을 좁고 협착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의 이 삶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삶은 지금까지 인류에 알려진 가장 숭고한 삶이요, 이 때문에 어렵고 좁고 협착합니다.
'그것을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물론입니다.
어떤 분야이든 최고 수준에 다다르면 일행의 숫자는 항상 적습니다. 범인은 누구나 따를 수 있지만 여러분이 비범한 인물이 되려는 순간, 고지에 도달하려는 순간, 같은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도 같습니다.
이 삶이 그토록 높고 놀라운 삶인고로 찾아 들어가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를 상세히 살펴보는 가운데 들은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묘사해 오신 바 기독교인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이 삶은 최상 최고의 삶이요, 완전히 절정인 삶인 것입니다.이 삶이 그처럼 어렵기 때문에 협착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그 문이 좁고 협착하다는 것은 그것이 항상 수반하기 때문이며, 참되게 살 때는 항상 박해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들은 항상 이렇게 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항상 핍박하였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신 까닭은 그분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혹하게 비판을 받거나 취급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게 평하는 말을 듣고 싶으며,
우리가 미움과 비판을 받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괴롭고 안달이 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좁은 길에 들어서면 그렇게 되리라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이 길은 협착하고 좋습니다. 그러므로 들어갈 때 고난과 박해에 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해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오해받을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어머니와 딸을,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놓을 검을 주러 왔노라 너희의 가장 큰 원수가 한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힘들고 어럽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정직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시작에만 좁을 뿐이 아닙니다. 계속 좁은 길입니다. 문만 좁을 뿐 아니라 길도 역시 좁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낙심되십니까? 누군가 '아, 이 삶이 그와 같다면 돌아가 볼까?'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에 대해 한 말씀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착각을 일으키지 맙시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에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적'하는 일은(엡 6:12) 이생에, 이 세상에 있는 한 계속됩니다. 생명의 길에는 미묘한 유혹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계하고 지키셔야 합니다. 항상 조심하셔야 할 것이며, 바울이 말씀한 대로 '자세히 주의하여'(엡 5:15)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시작도 그러하고 후에도 계속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