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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暴炎)
천 승 세
둥가래가 앙상한 틔종 황소는 추욱 늘어진 왼쪽 불알통올 요란하게 혼들며 멈춰 섰다.
나는 탈구지에서 내렸다.
“산등성이만 넘으면 해안이지유. 가뭄에다 흉어까지 겹쳐 팍팍 혈뀨. 심심찮은 술집이 한 군데 있긴 허지반서두…….”
농부는 더위에 지쳐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달구지는 다시 덜그덕대며 버얼겊 황토 농로 위를 굴러갔다.
나는 따분한 기분으로 논길올 걷고 있었다. 기껏 반뼘 정도로 논바닥올 채운 시답잖은 물줄이 파란 이끼거품올 토하면서, 버글버글 꿇었다.
그 물 위로 사지를 뻗고 뜬 개구리들이 한심스럽게 눈꺼풀올 껌벅대고 있었다.
나는 그 한심스럽게 늘어진 개구리들만큼 지쳐 있었다. 작정하고 나선 역행도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요행수라고 할 수 있는 은행 수위직올 스스로 팽개쳐버리고 훌쩍 떠나와버린 것이었다.
나는 나의 이번 취직에 있어 제일 시급하고 중요한 그 ‘두 사람’올 서류 마감일인 어제까지 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소위 재정보증인이라는 거였다. 문중 팔촌댁까지롤 두루 찾아다니며 파리처럼 손바닥올 비벼봤지만 그자들의 말씀들은 당연했다.
“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세상이 하도 어수선해서…… 그런 고로 섭섭하지만 서로 모른 체해버리는 게 제일 편한 일일진대…… 나를 욕해 다오! 내가 인정없고 의리없는 사람이니라.”
그자들은 한결같이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아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이 감당할 수 없는 ‘아픔’ 때문에 훌쩍 떠밀려온 것이었다.
산등성이를 넘자 해안이 펼쳐겼다. 올망졸망한 섬들 사이를 빠지며 마올 앞까지 물머리를 틀은 바닷물은 마을올 지나면서 말발굽 모양의 짧고 볼품없는 해안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 썰물 때여서 하얗게 드러난 물골들이 갈래갈래 지렁이처럼 기어가고 있었으며 시커먼 개펄 위로는 네 척의 중선이 기우뚱 누워 있었다.
십여 채의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그 중간쯤에 달구지를 끌던 농부가 일러준 심심찮은 술집은 앉아 있었다.
화장기가 다소 있는, 유독 손이 투박한 주모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해대고 있었고 주모의 건너편 자리에 웬 삼십대의 사내가 막걸리 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짙은 색안경올 쓰고 있었으며 의복은 남루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삼십대의 사내는 술잔을 홀짝거릴 때마다 횹사 안주처럼 깊은 한숨올 하아 하고 내뱉고 있었다.
나는 그 사내의 하아―하고 내뱉는 깊고 긴 한숨이 숨통을 조이는 땡볕처럼 뜨거워서 싫었다.
“……그래 뭘 드실려구유 막걸리유 쐬주유우ㅡ.”
주모는 내 앞에서 아까보다 더한 하품을 내쏟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주모의 눈길은 올망졸망한 섬들 사이를 번가르다가 먼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소주를 줘요― 안주는 뭐 있소?”
“저 아자씨 시방 잡수구 있구먼유. 운저리 지진 거지유 원칸 지독헌 흉어철이라 괴기가 뭐 있어야쥬.”
주모는 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훌쩍 돌아갔다. 주모의 치마귀에서 역한 갯냄새가 풍겼다.
주모의 우람한 팔뚝이 도마를 쳐내렸다. 그 소리에 섞여 사내의 한숨 소리가 또 길게 샜다.
나는 아까 주모의 눈길이 홅고 갔던 그 섬들과 먼 연초록 바다를 내다보면서 나를 이 황막한 곳에까지 떠다밀어준 그 아픔에 대해 새삼스럽게 숙고하고 있었다.
지금쯤 그 거만무쌍하던 인사계 직원은 나의 서류들을 휴지통에다 처박고 있을 것이다.
“헛차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말야. 아니 그래 친척도 없소? 재산세 물고 있는 사람이면 보증을 설 수 있는데 그래, 보중인 못 세워 일자리를 놓칠 셈이오?”
서류마감을 이틀이나 연기해줬던 인사계의 그 직원은 이틀 후에도 풀이 죽어 들어서는 나를 보고 찝쩝 쓴 입맛을 다셔댔다.
“선생님! 평생 보은하겠습니다. 저의 보증인이 돼주십쇼! 이렇게 물러서기는 너무나 원통하군요!”
그때, 이 같은 나의 하소는 구김없는 목메임이었고, 무모할 정도의 진실에 끈이 닿아 있었올 것이었다.
“미쳤어? 내가 미쳤어?”
절대의 아픔올 가지고 나를 위로해주었던 그 인사계 직원은 대뜸 새하얗게 눈을 흘기면서 내뱉은 것이었다.
나는 이내 미친 듯이 그야말로 하늘을 날고 있듯 허황하게 웃어버렸다. 웃음의 끝이 목젖에 걸렸올 때 질긴 눈물이 무척 쓰라린 것이라고 느꼈었다.
갯벌은 펄펄 끓고 있었다. 미진한 바람결이 이따금 스칠 때마다 저 끓고 있는 갯벌이 뿜어올리고 있올 성싶은 끈끈한 열기가 몰려왔다. 나의 머릿속으로는 자욱한 공해의 하놀을 이고 널린 서을의 무수한 아픔들과 그 아픔들이 아침 인사처럼 예사롭게 혹은 끈질기게 끓고 있올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왔다.
주모는 졸고 있었다. 짙은 색안경을 쓴 사내는 턱을 괸 채 멀거니 앞올 내다보고 있었다.
“안주 다 됐으면 술을 주시오.”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어버리며 탕 하고 낡은 밥상을 쳤다.
“깜박 멋지게 시들었네거…….”
주모는 땀줄이 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주모가 놓고간 이름도 알 수 없는 멀렁한 소주를 한잔 따라 마시고 나서 안주국을 몇 술 떴다. 운저리라는 고기는 그 큰 아가리를 떠억 벌리고 하얗게 익은 눈망울을 치뜨고 있었다.
나는 부지중에 긴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색안경을 쓴 사내의 한숨이 또 한 번 샜다.
그 사내는 가끔 나를 바라다보는 모양이었다, 올망졸망한 섬들과 꾸불거리는 물골과 시커먼 개펄올 담은 그의 짙은 색안경이 나의 얼굴을 향해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
헐어빠진 발문이 들썩하더니 캡을 쓴 삼십대의 청년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나와 그리고 짙은 색안경을 쓴 그 삼십대의 사내에 비해 다소 말쑥한 신사복 차림이었다.
“덥군! 후휴―지독하게 덥군요”
그는 한 차례 수선을 피우더니 나와 색안경올 쓴 사내와의 중간쯤에 놓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다소 사람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편이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은 횐창에 비해 검은창이 훨씬 많은, 그래서 과히 잔악스럽게 보이는 눈은 아니었다.
나의 얼굴에서 시선올 돌린 그는 색안경을 쓴 사내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머무는 듯싶었다. 그의 시선은 색안경을 쓴 사내의 얼굴에서부터 발등까지를 서서히 홅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주모에게 말했다.
“술 좀 주시오. 그리고 말요. 계명리라는 곳이 이 근방이지요?”
주모는 졸린 눈올 껌벅대며 대답했다.
“여기두 계명리지만 진짜 마을은 바로 저 등성이 너머지유.”
캡올 쓴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푸우ㅡ한숨을 내뿜었다. 그가 술상올 받았올 때 어부들인 성싶은 사람들 한 떼가 발을 들치고 들어왔다.
그들은 막걸리 두어 사발씩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또 바람처럼 우루루 몰려 나가버 렸다.
술집 안에는 나와 캡을 쓴 사내와 그리고 짙은 색안경을 쓴 사내 세 사람뿐이었다. 공교로운 것은 세 사람이 다들 말이 없다는 것과 가끔씩 청승맞은 한숨들을 내뿜는다는 것, 그리고 똑같이 더위에 지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보아 나머지 두 사람도 아마 나만큼은 따분해 있고, 또 나처럼 범상한 아픔들을 짓씹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안도감올 확인하고 있었다.
주모는 무척 심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논바닥 속의 개구리들처럼 한심스럽게 눈꺼풀을 껌벅이고 있었다. 그녀의 두툼한 목덜미에서 더위를 이기는 기진한 맥박이 발근발근 뛰놀고 있었다.
하얀 물골들이 갈래갈래 흩어진 가지들을 모으고 있었다. 물골올 넘치는 바닷물이 점점 개펄올 먹어가며 번졌다. 들물이 시작된 바다 위로 폭양의 진한 햇살올 날개 위에 실은 기진한 갈매기 한 마리가 떠돌았다.
이때 별안간 내뱉는 주모의 푸념은 퍽이나 반가운 것이었다. 기실 나의 소원은 한시라도 바삐 이처럼 눅눅한 아픔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해수욕장도 아닌, 거기다 흉어기마저 겹친 이런 볼품없는 어촌으로 떠밀려온 것도 호젓하게 울어버리든가, 아니면 술이라도 곤죽이 되도록 처마시고 실컷 욕이라도 쏟아놓고 싶은 그런 평범한 마음에서였다. 나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실컷 술올 마시며 이 세상의 모든 아픔들에 대해 지치도록 욕설을 퍼붓고 싶었던 것이었다.
“거참 요상스럽네유잉. 말씨들이 서울 양반들인 모양인데 워티께 그렇게두 얼굴들을 가르지유? 우리 고장 사람들 같으면 혼자서는 심심해서 술 못 마셔유 주거니 받거니 생판 모른 사람허구두 사심들을 트구, 거참 귀경꺼리 한번 되게 오지네유.”
주모는 말을 마치고 두툼한 아래턱을 통째 떨며 후후―웃었다.
세 사람들은 어지간히 취해 있던 터라 주모의 이 한 마디에서 쉽게 혼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사실 나와 캡올 쓴 사내와 짙은 색안경을 쓴 사내는 이 황량한 해변올 지키는 지친 정물들이었다. 그리고 간간이 내뱉는 한숨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들은 어차피 근소한 차이의 아픔들올 앓고 있는 처지들이라고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캡을 쓴 사내가 벗어든 캡으로 부채질올 해대면서 말했다.
“이거 시골 아주머니 앞에서 되게 초가 됐는데 말요. 우리 아예 술자리를 합합시다.”
그는 성큼 일어서서 짙은 색안경을 쓴 사내 앞으로 걸어갔다. 사내는 엷게 웃고 있었다. 나는 캡을 쓴 사내 옆에 가 앉았다.
몇 잔의 술이 돌고 난 뒤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아픔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근데 쌍놈의 바닷가가 뭐 이렇게 푹썩 곯았어? 바람기도 하나 없고 복날 개 삶듯 하는구먼. 근데 형씨들은 이런 보잘것없는 곳에 뭣하러들 온 거요?”
캡을 쓴 사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리며 물었다. 색안경올 쓴 사내는 예의 엷은 웃음기를 홀리며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고 나는 캡을 쓴 사내의 말끝올 재빨리 가로채어 평범한 나의 아픔을 취기에 실려보냈다.
“아 글쎄 말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험악합니다. 재정보증인을 못 구해 일자리를 팽개쳐버렸지요. 문중을 싹싹 홅어내리면서 사정을 했지만 허탕을 쳤죠. 이거 어디 살겠습니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입니까?”
나는 다소 바보스러울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그것 참 조옷 같네! 그건 너무했는데 너무했어. 만약 말요. 형씨네가 잘 살고 있는 형편이라면 사돈네 팔촌도 서로 보증인으로 나섰올 꺼요. 근데 문제는 형씨네가 기막히게 못 산다는 거기에 있는 거지. 이봐요 이봐, 자아 술이나 듭시다 술을…….”
캡을 쓴 사내는 절친했던 친구 사이나 된 것처럼 나의 앙상한 등덜미를 거세게 두들기며 술을 따랐다. 두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범상한 나의 아픔에 대해 진지하게 슬퍼해주고 있었다.
“어색해할 게 조금도 없는 거요 사실 말이지 절대적인 슬픔이라는 게 따로 없는 거죠. 그런 거예요. 바로 그런 겁니다. 형씨가 당한 것처럼 무조건 캄캄한 것이 바로 절대의 슬픔이요 분노란 말입니다. 그저 캄캄한 거지요, 캄캄하다보면 벼랑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다시는 사람 구실 제대로 못 해보고 떨어져버리는 것이지요. 형씨는 그까짓 게 뭐 고민거리라도 되는 것이냐고 되게 어색한 모양인데 말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최대의 슬픔이라니깐 그래요. 슬픔이라는 것이 덩어리가 큰 것은 아닙니다. 그까짓 것은 오히려 관용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밑에서부터 야금야금 썩어들어가는 것은 못 참게 돼 있습니다. 이거 내가 되게 취했습니다. 이거…….”
참으로 오래간만에 그 짙은 색안경을 쓴 사내는 흥분했다. 캡을 쓴 사내도 훈김 같은 열기가 꿇는 모양이었다.
“맞았어! 당신 말이 옳은 거야 나도 매일 그런 것과 대면해요. 당신 말대로 캄캄한 것, 그리고 밑에서부터 야금야금 썩어들어가는 것, 그래서 결국은 캄캄한 벼랑 밑으로 떨어지고 못 참아 죄를 짓고·…… 그런데 말요. 재미있는 것은 모든 죄라는 것이 아주 적절하게 사람들의 선한 본질 앞에 놓여 있거든요. 그리고 덩어리가 큰 죄들은 당연한 선행으로 둔갑되는 거조 자아 술이나 듭시다.”
색안경을 쓴 사내는 캡을 쓴 사내의 말에 다소 불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가꿈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형씨는 말끝마다 죄 죄 하는데 말입니다. 죄라는 것이 이거 영물입니다. 슬픔과 죄악은 엄연히 다릅니다. 내 말은 슬픔 그 자체가 왜 죄가 되느냐 이겁니다. 못 참아 울어도 죄가 되고 악을 써도 죄가 되고, 종래는 선한 본질을 울게 한 원인들은 기발하게 구속해서 풀려나고 맙니다. 요컨대 원인을 죄인으로 잡아들이자는 그런 말입니다.”
술집 안은 별안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모의 부질없는 한 마디의 푸념은 지극히 따분한 채로 그들 나름의 아픔들을 씹고 있던 기진한 손님들을 별안간 거세게 움직여논 것이었다.
“허참 딱하네. 누가 뭐랬나? 내 말이 바로 당신 말이지 뭘 그래. 죄라는 것이 두 집 못 내고 죽은 바둑 대마 같다면야 누가 뭐래? 모르긴 몰라도 뭔가 아리숭숭하니깐 그렇지. 배고파 십 원짜리 떡 한 개를 훔친 놈이 죄인이냐 아니면 아사 직전의 광경 앞에서 떡을 팔아야만 되겠다는 놈이 죄인이냐 근데 이거 되게 시시하고 유치하군.”
졸고 있는 주모의 콧구멍 앞에서 파리들은 늘축한 콧물올 빨고 있었다. 나는 개펄올 덮어가는 바닷물과 이젠 사뭇 멀리 물 위로 떠버린 작은 섬들올 내다보고 있었다. 물골 위로 미끄러지는 뜰망 배 위로 조그만 돛폭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캠을 쓴 사내는 색안경을 쓴 사내 앞에서 턱올 괴며 물었다.
“형씨는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따분합니까?”
색안경을 쓴 사내는 술잔을 비우며 핫핫 하고 웃어제꼈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렇소 되게 따분해보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나는 아직까지는 한가한 편이군. 사실 말이지 나는 한가하지 못합니다. 좀 치열해보여야 할 텐데 말입니다. 형씨도 지금 따분합니까?"
“물론이지요. 나는 따분한 게 내 직업입니다. 이 더운 날, 이 흉악망측한 계명리를 산보할 정도로 따분한 놈이요 근심이 있어보이는데, 가령 이분처럼 재정보등인에 관한 슬픔 같은 아주 상식적인 것 뭐 그런 건 없소?”
색안경을 쓴 사내는 기진한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말씀 못 하게 따분합니다. 사실은 며칠 전에 소위 그 캄캄한 것올 경험했습니다. 나는 운전수요. 서른 다섯 먹도록 장가 한 번 못 들었소. 그런데 자알 나가다가 시시한 연애를 한 번 했소 차장 아가씨와. 그런데 소장놈이 내 애인올 덮쳐버렸어요.”
“야 그 새끼 형편없는 새끼구먼. 야 그 새끼 그거…….”
“바른대로 말하면 나는 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겁니다. 소장놈과 대판 다투고는 사표를 던졌어요. 이미 그 애도 미치게 싫어졌었고― 막판 배차증을 받자 핸들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빽미러로 뭔가 잽히더군요. 보니까 그 애하고 소장놈하고 겋어욥디다. 캄캄하더군…….”
“야 그 썅년놈들 그거. 이봐 형씨! 이거야 미칠 일 아닌가 말야? 안 그래?”
캡올 쓴 사내는 나의 어깻죽지를 우악스럽게 흔들며 열띤 동감올 묻고 있었다.
“버스 여덟 대로 시외 황토길이나 굴리는 회사에서야 소장이면 왕이죠, 왕. 나는 시동올 걸어 넣었지요 그 애하고 소장놈은 혼연스럽게 내 차 앞을 지나가고 있었소. 그때 캄캄하더군. 또 한 번 캄캄하더군.”
색안경올 쓴 사내는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더러운 땀줄을 손등으로 씻어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잠올 깬 주모의 입에서 서투른 ‘처녀 뱃사공’이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색안경을 쓴 사내의 어투에서 그가 어쩌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말하자면 세상 살아가기가 무척一피곤하고 역겨운 비상식의 상식인일 거라는―나처럼 대학 몰도 먹어봤을 것이고, 제딴으로는 의협심에 불타며, 그래서 생존의 아슬아슬한 실다리를 건너다 우직한 정직과 진실에게 몸올 던져버린 그런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었다.
캡올 쓴 사내는 한동안 말올 잃고 있었다. 그는 슬잔올 비우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도대체 한심스러운 사람들끼리만 모였군. 하긴 그렇지. 따분하지 않고서야 이런 용광로 같은 술집 속에서 술로다 불을 지르고 있겠어? 그런데 말이요. 형씨는 왜 색안경올 쓰고 있는 거요? 답답해보이는데.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는 눈으로 얘기를 해야지.”
“더워서 그렇소”
“색안경을 벗는 게 더 시원하지 않겠소?”
“몸뚱이가 더운 게 아니거든…… 사실상의 폭염은 머리골 속에서 끓고 있는 거요 머리골 속이 캄캄한 것들로 꽉 차 보시오 무수한 죄악들을 숨긴 혼연스러운 세상을 제 색대로 봐주다가는 필경 미치고 말 것 같소…… 한풀 가리우고 대신 내가 당하고 마는 거지.”
색안경올 쓴 사내는 고개를 들고 밀물이 시작된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바닷물은 갈대숲 속에까지 찰랑대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는 가오만 형씨 그러다가 사람을 죽일 것 같군.”
캡을 쓴 사내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형씨는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습니까?”
색안경올 쓴 사내는 오히려 반문하고 있었다.
“오우 천만에…… 나는 사람올 죽일 수 없는 형편 속에서 살고 있소…… 그러나 내가 형씨라면 그 캄캄했던 순간에 적절하고도 당연하게 미쳐 날뛰었올 것입니다. 모르지…… 내가 그자들을 죽일 수 있었을는지.”
나는 두 사람의 대화와 그 열띤 모습들을 바라보며 퍽은 다행스러운 사실 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이 따분한 곳으로 떠밀려오면서부터 다짐했던 소위 실컷 술에 취해 욕심을 퍼붓고 미쳐보자는 실속없는 기대를 이들은 절절하게 연기하고 있었고, 나는 이들의 긴박한 자유들에 대해 열심히 동조하고 있는 처지, 그것이었다.
이런 시시하고 지루한 장소에서, 또한 이처럼 일상의 조그만 아픔의 조각들올 모으며 미칠 수 있는 따분한 사람들끼리 용케도 조우했던 것이며, 나는 이들과의 조우에서 아픔의 습막히는 절정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말을 잃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 그 틈새로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사람이 사람올 죽일 수 있는 처지는 잘 모르겠으나 말입니다, 사람 하나가 당연한 질서 속에서 죽어가기란 너무나 쉽더군요. 아파트에 불이 났었죠. 소위 시범아파트라는 건물 오충에서 말입니다. 불길에 밀려 부부가 뒤켠 창틀에 나란히 매어달렸었습니다. 그날은 무척 추운 밤이었조. 살려달라고 악을 쓰더군요 경찰관과 방범대원들이 수은등 아래를 뛰어나디며 요란스럽게 호르라기를 불어댔습니다. 방범대원들과 아파트 사무실에서 월급올 타 먹고 사는 경비원들은 무턱대고 그들올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내리라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의미없이 수은등 밑을 질주하며 이내 사라졌다간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나곤 했습니다. 잠깐 사이였죠. 여인이 그야말로 낙화처럼 떨어져내렸습니다. 지쳐 손올 놔버린 것이었겠죠. 여인은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즉사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그 경비원들과 경찰관과 방범대원들이 창틀에 매달린 사람들올 살리고 싶지 않아 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괜히 수선을 피우며 널름대는 불꽃올 무서워하고 있었던 거지요. 허겁지겁 뛰어다님으로써 월급의 몫을 행사해본 것이며 그들은 가능한한 수시로 몸을 감추면서 자신들의 무모한 정의감을 죽인 거지요. 내가 모포를 들고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을 때 주민들의 비명이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남자도 떨어져 죽은 것이었습니다. 소방차는 그리고도 약 일분은 뒤에 나타났었죠. 그때가 새벽 두시 반이었습니다.”
캠을 쓴 사내는 탁자 위를 텅텅 쳐대면서 분노하고 있었다.
“야 그 새끼들! 그런 새끼들이 어디 있어? 그런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해! 그런 놈들은 말야!”
나는 뭔가 역한 구토증올 느끼며 단숨에 술잔올 비웠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위대한 규제는 그 집의 칠순이 넘은 장모를 실화혐의로 구속했어요. 경찰관이나 방범대원이나 경비원들에게는 털끝만큼도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죽음의 허무함을 그들 앞에 실연해보인 것뿐이며 그들은 사멸의 무모함올 실감했올 것입니다. 죄라는 것처럼 은폐하기 쉬운 물건은 없더군. 그것처럼 아연한 타당성올 가지고 있는 것도 없올 것이고…….”
캡올 쓴 사내는 뜻밖에도 풀이 죽어 내뱉었다.
“……그걸 이제야 아셨군…… 그러니 형씨 같은 사람올 위해 누가 재정보증올 서겠어?”
색안경올 쓴 사내는 두 번째로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서 무척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행운의 절정올 누리는 자를 위해 억울한 눈물이 있고 간교한 합리주의를 위해 우직한 죄가 필요한 겁니다.”
캡을 쓴 사내는 껄껄 웃었다.
“시를 읊고 있군 형씨는, 나두 대학물을 사 년간 꼬박 먹었지. 당신의 그 처량한 시구를 이해할˙ 수 있올 것 같소 차라리 유행가 가사라면 너나없이 부를 수도 있겠으나…….”
캡올 쓴 사내는 취기가 도는 눈을 가늘게 떠 흥건한 밀물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다는 여인의 욕망처럼 서서히 부풀고 있었다. 출어하는 중선의 돛폭이 눈이 시리도록 땡볕올 밀어내고 있었다.
캡올 쓴 사내는 서서히 등올 돌랐다.
“기다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지. 저 범선들의 돛폭올 보시오. 억세게도 질기잖어? 흉악한 흉어철인데도 풍어철처럼 배가 부르군.”
그는 술잔을 비우고 나서 무심히 색안경을 쓴 사내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무너져버리는 것도 있소.”
색안경의 사내는 시선을 바닥에 던진 채 그의 말을 맞받았다.
“물론…….”
캡을 쓴 사내는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은 여전히 색안경의 사내 얼굴에다 못박고 있었다.
“도대체 응당한 것이 자라나기가 힘들단 말이오 자리를 잡을 만하면 서서 히 무너져버리거든.”
색안경올 쓴 사내는 거세게 도리질올 해대고 있었다.
한참 후에 캠올 쓴 사내는 아직도 도리질을 해대고 있는 그를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당신 참 좋은 사람이야.”
“…….”
캠올 쓴 사내는 다소 엉뚱하게 다시 감탄하는 것이었다.
“형씨 같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죄는 짓지 못할 것 같군.”
색안경올 쓴 사내는 잠시 캡올 쓴 사내의 진지한 얼굴올 바라보는 듯 싶었다.
“과찬이시군. 나는 모르겠거니와 적어도 두 분만큼은 정말 죄를 짓고 살 수 있올 것 같지는 않소.”
캡을 쓴 사내는 푸우 한숨올 내뱉고 있었다. 색안경의 사내도 하아 하고 깊은 한숨올 내쉬었다.
나는 별안간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일꾼의 튼튼한 종아리처럼 나의 혼미했던 정신올 서서히 일으켜 세워주고 있었다.
만조의 바다는 잔잔하게 출렁대고 있었다. 개펄 위에 기우뚱 누웠던 중선들은 이젠 먼바다 위를 흐르고 있올 것이었다.
“아까 계명리를 묻던데 혹시 그곳에 볼일이라도 있었나요?”
색안경올 쓴 사내는 바다를 향한 채 넋을 빼고 앉아 있는 주모를 향해 빈 술주전자를 흔들며 캡올 쓴 사내에게 물었다.
“……아, 그거…… 그 볼일이라는 게 무척 따분하고 괴로워 죽겠소. 하여튼 적절한 곳에서 우리들의 실망들은 자라고 있소.”
캠올 쓴 사내는 대쪽을 깎아 만든 볼품없는 젓가락을 간격올 두고 부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형씨는 장차 어떻게 할 셈이오? 여기서 돌아가거든 말이오.”
나는 선뜻 대답올 할 수 없었다. 사실 막연하고 몽롱한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던 이 해안의 돌연한 평온은 어떻든 짧은 시간 안에서 끝나고 말 것이었다.
“어떻든 또 떠밀려가겠죠. 그 현기중 나는 서울로 말입니다.”
나는 시려오는 시선을 먼바다 쪽으로 띄우고 있었다. 서울올 떠나올 때보다 더 지루한 권태가 내 몸뚱이를 싸안기 시작했다.
캡을 쓴 사내는 다소 어색하게 말올 잇고 있었다.
“이거 무척 건방진 소리 같지만 말요. 떠밀리는 그 자리를 무서웁게 생각하시오. 그리고 특별한 슬픔들을 기억할려고 애쓰지 마시길…… 이거 여러 번 건방을 떠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골목들올 가득히 채우고 있는 것은 철저한 생존의 상실들뿐입니다. 세상이 상식을 원할 때는 그것올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소. 진실이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것올 귀하게 생각한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적어도 수모의 자리에선 한 치라도 섣불리 떠밀릴 수는 없는 겁니다. 지루한 숨바꼭질의 술래가 되는 거지요. 이게 다 취기라는 건방진 물건입니다만 나는 나대로 무척 더운 사람입니다. 저 형씨의 말처럼 사실상의 폭염은 골통 속에서 끓고 있는 거지요. 어거 결사적으로 건방을 떠는데 이게 다 취기라는 물건이지요. 네에 ―---.
캡올 쓴 사내는 연신 ‘취기라는 건방진 물건’올 외어대고 있었으나 그가 그렇게 실컷 취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무척 진지한 눈빛으로 나에게 하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캡을 쓴 사내는 색안경을 쓴 사내를 향해 말을 했다.
“형씨,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색안경올 쓴 사내는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말이지 나는 돌아갈 곳도 없고 또 가야 할 곳도 없소.”
“아니 그런 걸 물었던 게 아니고 우리는 사실상 옳은 말들을 많이 해버렸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아 그거…… 우연치고는 퍽 실감있었죠. 이 삭막한 곳에서…….”
색안경올 쓴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별안간 오싹 몸서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강렬한 두 줄기의 헤드라이트가 소장과 ‘그 애’를 담은 채 집광되고 있었다. 부르릉대는 엔진 소리가 더운 날의 눅눅한 천둥처럼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의 실망이요…… 아 만조군! 바다가 다 찼어.”
캡을 쓴 사내는 등돌아 바다를 내다보며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있었다. 거울판처럼 잔잔한 해면 위로 반원올 그리는 물새떼가 물에 닿을 듯 낮게 날고 있었다.
“무척 실망올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나야말로 사력올 다해 실망을 이기고 있소.”
캡을 쓴 사내는 처음으로 약간 언성을 높여 내뱉었다.
“혼자만 불행한 체하지 마시오 나도 저 재정보증인 형씨도 당신만큼은 불행한 입장이오!”
“아 그렇지? 맞아 그랬어. 우리 세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따분한 기분들이었어…… 또 뭐라고 했었죠?”
색안경을 쓴 사내는 등돌아 앉아 있는 캡올 쓴 사내의 어깻죽지를 툭툭 쳤다.
“본질적으로 죄를 짓고는 못 살 사람이라고 했소¸”
캡을 쓴 사내는 말을 마치면서 껄껄 웃었다. 색안경올 쓴 사람도 나도 크게 따라 웃고 있었다.
색안경올 쓴 사내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대고 나서 좀 큰소리로 말했다.
“아 덥군. 미치게 덥군!”
나는 그를 따라 노곤한 기지개를 켜대면서 별로 가깝지 않은 친구의 전화번호처럼 서서히 잊혀져가는 나의 아픔에 대해 땟물 절인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곤한 잠 속에 떨어진 주모의 비틀린 입술에서 늘축한 침줄이 흐르고 있었다. 색안경올 쓴 사내는 천천히 발문께로 결어나갔다. 다리가 저려오는지 그는 한동안 학처럼 한쪽 다리로 서 있었다.
그가 발문을 들치고 밖으로 나갔을 때 캡올 쓴 사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는 거요, 형씨.”
“잠깐 소변 좀 보고 오겠소.”
색안경올 쓴 사내의 굼은 둥이 해안선올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등어리는 곧 발문 밖으로 사라졌다.
“저 친구 무척 좋아보이지 않아요? 밤새도록 말발을 쳐도 싫증 안 날 사람인데 왜 저런 사람들이 그처럼 캄캄하고 따분해야만 할까요?”
나는 허망하게 뇌까리고 있었다.
“글쎄말입니다. 장 막는 중포처럼 어떤 모서리에든 꼭 끼여 살아야 할 사람인데요.”
캡을 쓴 사내는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그 위에다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볼 수 없도록 명함만한 크기의 종이쪽을 손바닥 안에다 감추고 그 위로 검정 색연필올 달리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요?”
“수수께끼 하나를 내겠소. 좀 돌연한 문제요.”
그는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손바닥 안의 것올 나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누구 같소?”
그것은 명함판의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의 인물은 검정 색연필로 그려 넣은 짙은 색안경올 쓰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은 바로 저 친구 아닙니까?”
캡올 쓴 사내는 긴 한숨올 푸우 내뱉고 나서 목소리를 떨었다.
“맞아요 살인혐의로 지명수배된 사람이지요¨ 이름은 남대천.”
나는 쓸쓸하고 망연하게 캡올 쓴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경찰관?”
그는 푸욱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소장놈이 죽었죠. 차장애는 중태이고. 차로 깔아버린 거예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틀린 캡올 바로 잡아 푸욱 눌러쓰고 주모께로 걸어갔다. 그는 주모를 혼들어 깨우고 있었다.
“얼마요?”
“좀 올랐는데유. 이천 원이유.”
주모는 머리통을 흔들며 잠을 쫓고 있었다.
캡올 쓴 사내는 계산올 끝내고 나서 천천히 발문께로 걸음올 옮기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처절하게 웃고 있었다.
“형씨! 그가 사람올 죽였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나는 그의 등올 향해 간절하게 풀었다.
“어쩌면 모르고 있올 겁니다. 그는 별안간 캄캄해졌올 거고, 그래서 일올 저지르고 곧장 도망갔으니까.”
캡을 쓴 사내는 천천히 발문을 걷어올리고 있었다.
“형씨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그를 잡겠소?”
나는 불현듯 취기에 끓고 있었다.
“시체를 원죄로 잡아들일 수는 없지 않소.”
그는 발문올 걷어올린 채 등올 돌리고 있었다.
“원죄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말요¸ 그냥 놔줘버리면 어떨까요? 소장놈이 죽었다는 걸 모르는 이상 애당초 살의는 없올 수도 그가 맨주먹이었다면 아마 따끔한 상처 한 개도 못 입혀줬올 텐데요…….”
그는 발문올 내리고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형씨, 계명리가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소…… 지금 내가 캄캄해진단 말요.”
그는 등을 누인 채 눈올 감고 있었다.
색안경올 쓴 사내가 꿇는 땡볕올 손바닥으로 가리고 발문올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1974년
2016년 12월 2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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