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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Can People Be Deeply Spiritual and Emotionally Immature?
-An Interview with Jack Kornfield
어떻게 깊은 수행체험을 했다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미숙할 수 있을까?-잭 콘필드와 인터뷰
Over the last 40 years, Jack Kornfield has been a significant force in bringing Buddhist practices
to the United States.
지난 40년간 잭 콘필드는 불교수행을 미국에 알리는데 중요한 힘이 되어왔다.
In 1967, he graduated from Dartmouth College, joined the Peace Corps, and was assigned to service in
Thailand. Kornfield then trained as a Buddhist monk in the monasteries of Thailand, India, and Burma,
studying under many influential teachers.
1967년 다트머쓰 대학을 졸업하고 평화봉사단에 등록하여 태국에서 근무를 명받았다. 콘필드는 그 후 불교승려가
되어 영향력 있는 여러 스승 밑에서 태국, 인도, 버마에서 수행했다.
After returning to the United States, Kornfield earned a PhD in clinical psychology and, in 1975,
co-founded the Insight Meditation Society in Barre, Massachusetts.
미국에 돌아온 후 1975년에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그리고 매사추세츠 주 바르市에
통찰명상회(아이엠에스 위빠사나 센터로 알려짐)를 공동 창립했다.
In 1987, he became a founding teacher of the Spirit Rock Meditation Center in Woodacre, California,
where he currently lives. He is the best-selling author of many books, including The Wise Heart:
A Guide to the Universal Teachings of Buddhist Psychology, A Path with Heart: A Guide
Through the Perils and Promises of Spiritual Life, and After the Ecstasy, the Laundry:
How the Heart Grows Wise on the Spiritual Path.
1987년에 캘리포니아 우드에이크에 있는 스피릿록 명상센터의 창립자가 되어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그는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낸 저자이다. 지혜로운 마음: 불교 심리학의 보편적 가르침. 가슴으로 가는 길:
위험하지만 밝은 전망이 있는 정신적 삶을 위한 안내서. 깨달음 이후, 빨랫감: 영적인 길에서 지혜롭게 성장하기.
Over the years you’ve written a lot about bringing spiritual work together with psychological work.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spiritual practice and emotional development?
여러 해 동안 당신은 수행과 심리상담의 일을 함께 묶는 작업에 대한 글을 써오셨습니다.
수행과 정서적 발전과정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What’s most simple to say is that, for our hearts to be wise and free, we have to attend to
the mandala of our being—which includes body, emotions, mental states, and thought structure
—and their relations with one another.
가장 쉽게 이야기 해보자면, 우리의 마음이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존재의 만달라에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그건 몸과 감정, 정신 상태와 사고방식, 그리고 대인관계 모두를 포함하죠.
Certain meditation can bring tremendous benefits to us. But it’s also possible to use meditation as
a spiritual bypass, so that we can escape our difficulties by finding some peace and calm. But later on
—at work, with family, or in relationships—old patterns and ways that we get caught up in begin
to show themselves.
어떤 명상은 우리에게 굉장한 덕을 줍니다. 그러나 명상이 건너 뛰어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약간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자신이 당면한 어려움을 회피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혹은 인간관계에서 예전부터 사로잡혀 있던 패턴과 사고방식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I’m an “all of the above” kind of person. I have used meditative practices, psychotherapy,
sacred medicine, and the arts, all as dimensions of being more fully alive and being freer
in body, heart, and mind.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해본 사람이야. 나는 명상도 했고, 심리치료도 받았고, 신성한 경계로 이끄는 약도
먹은 적이 있고, 예술도 하는 사람이거든. 완전히 살아있기 위한, 몸과 가슴과 마음이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차원의 모든 것을 다 해본 사람이거든.
Part of the reason I’m asking this is to better understand the meaning of “spiritual work,”
because it’s interesting that it’s possible for people to be spiritually brilliant and yet lacking in
their emotional maturity.
제가 이런 것을 묻는 이유 중에 하나는 수행이란 걸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수행은 멋지게 잘하는 것 같아도 정서적인 성숙이란 면에서는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는 건 흥미롭거든요.
Human development is a mandala, and so we can develop certain aspects, and others don’t
come along; thus, you have Olympic-level athletes who are brilliant in awareness of their body,
but might be emotional idiots.
인간적 성숙이란 만달라입니다. 수행해서 어떤 것이 발전한다 해도 다른 것도 같이 따라가진 않아요.
그렇기에 당신이 몸을 다루는데서는 굉장히 각성이 되어 올림픽 선수 수준이 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백치상태가 될 수도 있어요.
Or you have Nobel-prize-winning physics professors who can’t find their shoes or their body.
So it turns out that to live a fully realized life—or a life of wisdom and compassion—
those qualities need to be directed to each of the major dimensions of our humanity—our body,
our feelings, our mental states, our relationships and history, and our connection with the world
around us. Spiritual teachers can be one-sided just the way an athlete or a physics professor can.
또한 당신이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 교수일지는 몰라도 자기 신발을 못 찾거나 몸을 돌보지 못 할 수도 있어요.
완전히 깨달은 삶을 산다는 것-그것은 지혜와 자비의 삶인데-그건 인간생활의 주요한 차원들-몸과 감정,
정신상태, 인간관계, 역사와 우리주변에 있는 세계와의 연결-에서 개발될 수 있도록 각 개인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자질들이죠.
Fortunately, what we’ve learned in the West over many decades now is that it’s possible for us
to heal deeply traumas of the past. It’s possible for us to embody and bring into our relationships
and our actions the same beautiful spirit that we might find in a deep, silent meditation, that those
become integrated.
다행한 것은 이제 서방세계에 있는 우리들이 수십 년 동안 배운 것이 깊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우리가 치유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깊은 명상에서 이거나, 침묵 명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똑 같은 아름다운 정신을 우리의
인간관계나 행동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수행과 생활이) 통합된다는 겁니다.
But let me go to a related topic. We can look at the current global situation and see that
no amount of science and technology is going to save us. No amount of computers and
worldwide Internet and nanotechnology and biotechnology, and all these amazingly great,
new capacities is going to stop continuing warfare, racism, tribalism, environmental destruction.
그에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 더 말하겠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적인 상황을 한 번 봅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 같진 않아요. 컴퓨터와 인터넷, 나노기술과 바이오테크,
그 모든 놀랄 만큼 위대하고 새로운 능력들이 전쟁이나 인종차별, 부족중심주의, 환경파괴를 막아주질
못할 것 같습니다.
Those spring from the human heart. And the outer technologies now have to be married to
inner development that is both a development of mind and a development of heart and a
development of the connection of our body to the body of the earth. We need to have a
transformation of human consciousness, inwardly, that’s the balance to or the support
for the amazing outer transformations.
이런 것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외부의 기술은 이제는 내적인 발전과 함께 가야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가슴의 발전과 우리 몸이 지구란 몸과의 연결을 발전시키는 것이죠. 우리는 인간 의식을
내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외부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와 균형을 맞추든지 혹은 그걸 지원해
줄 수 있게 될 겁니다.
You’ve been teaching meditation since the mid-1970s. What has changed in the last 40 years?
당신은 70년대 중반부터 명상을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Thirty or 40 years ago, there was a great resistance to using the tools of Western psychotherapy
and Western psychology. People at various ashrams or Zen centers or Buddhist centers and
so forth would say, “All you need to do is chant, or do the mantra, or sit in Zen meditation,
and it will take care of everything.” And other tools were considered to be unnecessary or
even kind of lower-level practices.
삼, 사 십년 전에는 서양의 심리치료와 심리학이란 도구를 사용하는 데 큰 저항이 있었죠. 여러 곳의 아쉬람이나
선센터, 불교명상 센터와 이런 종류에서 온 사람들이 말하곤 했죠. “여러분들이 할 일은 염불하거나 주문을 외거나,
앉아서 선을 하거나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걸 알아서 해줄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도구들은 필요 없거나 수준
낮은 것이라 치부되었죠.
Now, I could tell you the names of the therapists of half of the main Zen teachers and lamas around
the country, because they realized that in our modern, Western time, we need all the help we can get.
We need to marry these powerful spiritual disciplines with the wisdom and the understanding
of this particular culture. That wisdom and understanding includes tools for healing, tools
for trauma work, tools for emotional intelligence. And in the last 40 years, these have become
integrated much more actively across the spiritual teachings.
이제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심리치료사의 절반 가량이나 되는 참선지도자와 티베트불교 선생님들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현대 서구사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죠. 우리는 특수한 문화에서 생겨난 지혜와 이해의 강력한 수행전통과 결합시켜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지혜와 이해는 지유와 트라우마 작업과 감정 지성EQ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지난 40년간 이런 것들이
정신적 가르침 가운데로 활발하게 통합되었습니다.
In addition, we found that in Western culture there’s a common experience of self-judgment and
self-hatred that will arise for people when they’re doing spiritual practice—an unworthiness that
will arise. Often, a spiritual practice can be turned against ourselves, and we use it to judge
ourselves further or feel inadequate or not good enough. “I’m not doing it right. I’m not enlightened
enough.” When we asked the Dalai Lama about this in the 1980s, he was shocked. He’d never heard
the word self-hatred. That word does not exist in the Tibetan language. And after some pondering,
he said, “This is a mistake.”
덧붙인다면 우리 서양문화에서는 자기비판이나 자기혐오 같은 공통적인 경험이 있는데, 그런 것이 수행할 때
드러나면서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수행에서 가끔 반대로 가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심하게 비판한다든지 부적절하여 모자란다고 느끼게 됩니다. “난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어.
난 충분히 깨닫지 못했어.” 우리들이 1980년대에 달라이라마께 이런 문제를 질문했더니 깜작 놀라셨어요.
그는 자기혐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지요. 티베트 말에는 아예 그런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하시는 말씀이 “그건 오해입니다.”
What we have done is to incorporate a tremendous amount of compassion and loving-kindness
as the basis for the other dimensions of spiritual discipline.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많은 연민과 자애를 수행의 다른 측면을 위한 기초로써 받아드리는 겁니다.
Training in mindfulness and concentration have to be married to compassion and loving-kindness.
마음챙김과 집중을 훈련하는 것이 연민과 자애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And with that field of love, which it turns out is a form of mindfulness or awakening, people
begin to discover that they are loving-awareness itself, and that spiritual practice isn’t to
change or perfect oneself. Spiritual practice is about perfecting their love.
사랑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건 마음챙김이나 깨어남이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바로 <사랑-깨어남>이며, 수행이란 사람을 바꾸거나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임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Otherwise, spiritual practice can become just another grim duty that you have to perform.
You go on a diet and you go to the gym and you go to therapy, and you do all these kinds of
self-help trainings, trying to make yourself a better person. But in the deepest way,
spiritual practice is more mysterious. It opens us up to the mystery of human incarnation and
to our fundamental dignity and goodness and capacity for freedom and love that’s born
in every human being. It touches that. It rests on that realization. And this is a very different
vision of spiritual practice than one that is focused on some great future attainment
of enlightenment in some more idealistic way.
그렇지 않으면 수행이란 게 완수해야 하는 또 하나의 으스스한 의무가 될 수도 있어요. 다이어트하고 체육관에 가고,
무슨 치유하는데 가고, 이런 종류의 모든 자기개발 프로그램을 함으로써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면 수행이란 신비한 것입니다. 수행이란 우리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과
근본적인 존엄성과 자유와 사랑의 능력이란 신비에 마음을 열고 가닿을 수 있게 해줍니다. 수행이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기에 마주치게 해주는 거죠. 그건 깨달음에 달려있어요. 이건 어떤 수행자가 아주 이상적인
방법으로써 미래에 거창한 깨달음을 얻으리라고 집중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수행이죠.
What do you think about self-improvement as an idea? Doesn’t it get in the way of accepting
ourselves just as we are?
자기개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받아드리는
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닙니까?
There’s nothing wrong with self-improvement. Kids want to learn how to read. Adults want t
o learn how to speak another language or keep their body in shape or develop their capacities
to listen and connect more deeply.
자기개발이 잘못된 것은 없어요. 아이들은 읽는 법을 배워야 하고요. 어른들은 외국어를 말하는 법을 배우거나
몸 다루는 법을 배운다든지, 경청하는 능력과 더 깊이 연결되는 능력을 개발해야죠.
All of those are beautiful. They can be done in a positive and loving way, to enhance the life
that we have, to enhance our human incarnation.
이런 활동은 모두 아름다운 일이죠. 그런 것들은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긴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며 몸을 가진 인간의 삶을 말이죠.
Or they can be done in a striving way, with judgment and self-criticism, thinking, I’m not good
enough, and I have to make myself better and more enlightened and more and more—
whatever it is. And that undermines the very essence of them.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판단하거나 비판하면서 애를 쓰게 되니까요. 나는 모자라. 난 더 나아져야 하고,
더 깨달아야 하고, 무엇이든 더, 더 하게 되죠. 이런 게 우리의 본질을 허물어버리는 거죠.
We’re always growing as an organism, and it’s a beautiful thing. We can grow out of love.
We can grow out of care. We can grow out of wanting to flower. And then the self-improvement
becomes really an expression of our fundamental dignity and goodness, not trying to
become something that we’re not, but to express our beauty and our courage in this very life.
우리는 늘 하나의 유기체로서 성장해갑니다. 그건 아름다운 일이죠. 우리는 사랑을 키웁니다.
우리는 배려심도 키웁니다. 우리는 꽃피우고 싶다는 소원을 키웁니다. 그러면 자기개발이란 것이
자기가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근본적인 존엄함과 착한 성품의 진실된 표현이 됩니다.
그것은 이생에서 우리의 아름다움과 용기를 표현하는 것이죠.
So it has more to do with the spirit that you have while engaging with activities in your life,
rather than what the activities are themselves.
삶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는 것이 활동 그 자체보다도 정신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Yes. That’s critical. 예, 그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죠.
Mindfulness is having a moment these days. Part of the reason for this is that it’s promising
to make people more productive and happy as individuals. It doesn’t seem to have much
to do with enlightenment or ethics. Can you comment on that?
마음챙김이 요즘 뜨고 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든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든지 계율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무슨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I celebrate the spreading of mindfulness, just as I celebrate the spreading of yoga or
the spreading of all kinds of very good spiritual tools and disciplines. When I was a boy in the 1950s,
if you mentioned yoga, the only images were of Indian fakirs with a loincloth on and
their legs wrapped around their neck. Culturally, it was very strange. Now there’s a yoga studio
next to a Starbucks on every block.
나는 마인드풀니스가 퍼지고 있는데 대해서 축하드립니다. 요가가 퍼져나가고 또 정신적으로 아주 좋은
도구나 수련이 퍼져나가는 것을 축하하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내가 소년이었던 1950년대는 요가라 하면 허리에
두르는 옷을 입고 목에 두 다리를 꿰고 앉은 요가수행자의 이미지를 떠올렸죠. 문화적으로 매우 이상한 일이었죠.
지금은 매 블록마다 스타벅스 커피점 옆에 요가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Sometimes it’s just one to have a beautiful body or to meet an attractive partner. But it still helps.
It still begins to give people tools of attention and care for their bodies and brings a spiritual
dimension into their lives. This is also true for mindfulness. Mindfulness is being taught
in law schools, and I know a judge who’s using it as part of the instructions to the jury
so that they listen in a respectful and mindful way to all of the evidence before making
their decisions. It’s also being used successfully in thousands of school systems for social
and emotional learning.
아름다운 몸을 가지기 위해서거나 매력적인 짝을 만나기 위해서 요가센터에 가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것도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에 주의를 기울이고 돌보는 도구를 제공해주어 그들의 삶에
영적인 차원이 스며들게 해주죠. 마인드풀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인드풀니스는 로스쿨에서도 가르치고
있어요. 내가 아는 한 판사는 배심원들이 결론을 내기 전에 증인들의 진술을 존경심과 주의를 가지고
들으라는 지침을 주는 데도 마인드풀니스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사회적 정서적 학습을 위하여 수천 개의
학교제도에도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Out of this broad understanding of the value of attention to one’s inner states starts to grow
a more humane approach to medicine and a more humane approach to law. Or there starts to
grow in an individual an understanding that the mind and the heart can be awakened and
developed. And then certain people will take it much further.
자신의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의 가치가 널리 인정받음으로써 의술과 법제도에서도 더 인간적인
접근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마음과 가슴이 깨어나 발전될 수 있다는 공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진전시켜 가고 있습니다.
But what if mindfulness is used to do the sort of bypassing that you were talking about earlier,
by allowing us to focus on our inner selves rather than on underlying, systemic issues?
당신이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인드풀니스라는 것이 밑에 깔려있는 제도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적인 문제를 건너뛰게 할 위험을 없다고 보십니까?
Another way to ask this question is: Can you focus on personal development in a way that
ignores the need for justice and well-being of human beings? Anybody who is wise recognizes
that they go hand in hand. I’ve trained large numbers of activists, many of whom have been
burned out because they’ve been so angry, fighting, bitter, and frightened that they haven’t
been able to actually engage over the long term, because they let the troubles and the suffering
outside come into their own body and heart.
이 질문을 다르게 바꿔보죠. 사회적 정의와 인간의 복지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과연 개인이 자기의
정신적 발전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지혜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둘은 같이 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나는 많은 수의 활동가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화를 많이 내고, 싸우고, 독해지고,
놀라서 할 일을 능동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할 수 없을 만큼 탈진되었습니다. 외부의 문제와 고통이 내면으로
들어와 본인들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이죠.
In fact, when you learn how to regulate yourself and develop a deep compassion for yourself
and for the world, you realize that they can’t be separated; they’re really the same thing—then it
becomes possible, and even necessary, to engage in the world because you’re a part of it, and
you feel that. But you engage in a different way. It gives you the power to sustain that love and t
hat work for the benefit of all beings.
사실 자신을 조절하고 자신에게나 세계를 향한 깊은 자비를 개발하는 것을 배울 때 그 둘은 나눠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세계의 일부임을 느끼기에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또 필수적이기도 한 거죠. 그러나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이죠. 그것이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한 사랑과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을 주게 됩니다.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contemplation and social action is central to the work
that we do at the Garrison Institute. Can you say more about how looking inside leads to social
action out in the world?
명상과 사회적 행동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개리슨 연구소에서 하는 작업의 중심이 됩니다. 자신의 내면을 보
는 것이 어떻게 세계에 나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In Zen, they say there are only two things: you sit and you sweep the garden. And doesn’t matter
how big the garden is. That is, you learn to quiet the mind and open the heart and to remember i
n that stillness what really matters. Those are the values of the heart and who you are.
선에서는 다만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앉거나 마당을 쓸거나. 마당이 얼마나 넓으냐는 문제가
되지 않죠. 즉 다시 말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가슴을 여는 걸 배우면, 필요할 때 그 고요를 기억하는
것이죠. 그것이 가슴과 본래의 자신의 가치입니다.
You discover that who you are is loving-awareness itself, incarnated into this mystery. And
as you do, the sense of connection to life shows itself. You don’t even have to cultivate it. As you get
quiet, you feel it and you know it. And then you get up from your cushion and you sweep the garden. I
f people are hungry, you feed them. If people are sick and you have medicine, you offer it,
because they’re part of you.
당신은 자신의 본래모습이 <사랑-깨어있음>그 자체이며, 이런 신비를 간직한 존재라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에 대한 연대감이 스스로 우러나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걸 일부러 개발할
필요도 없어요. 고요해질수록 느끼게 되며, 알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좌복에서 일어나 마당을 쓸지요. 사
람들이 배고프면 먹여줍니다. 사람들이 아프면 약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당신의 한부분이거든요.
When you hurt your hand, if you’re slicing tomatoes in the kitchen and you accidentally cut yourself,
you don’t go, “Oh, that poor hand. I wonder if I should help it. Should I do something about it?”
It’s you. It’s part of you. It’s so deeply obvious that you wash it and you put a Band-Aid on it
or whatever. And as you quiet the mind and open the heart, you begin to realize that t
he world is yours, that you are the world. And so it becomes a spontaneous and beautiful
expression of your fundamental Buddha-nature, your fundamental goodness, that you tend the world.
부엌에서 토마토를 쓸다가 우연히 손을 다쳤다면 당신은 이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오, 불쌍한 내 손,
내 손을 도와줄 순 없을까.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손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죠. 그건 당신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바로 상처부위를 씻고 반창고를 붙일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가슴을 열면
세계가 바로 자신이며, 자신이 세계라는 걸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돌보려는 행동이
당신의 근본이 되는 불성, 근본적인 선한 성품이 자발적이고 아름다움 표현으로서 우러나오게 되는 거죠.
Without mindfulness or compassion training, it’s easy to get overwhelmed and think, Well,
all the problems of the world are too great, and I just have to get through the day and try
as best I can. Mindfulness makes it easier to step out of the sense of being overwhelmed.
You see with clarity. And you realize, I can respond in a wise way. I have some agency
and capacity. And I can add my piece. And by adding your drop into the river—
the river of justice or the river of mutual care or the river of caring for the environment—
it nurtures you, and it nurtures the world.
마인드풀니스나 자비심 훈련이 없다면 문제에 압도당해서 “아, 세상에 문제는 너무 많아. 오늘 간신히
하루를 떼우면 내 할 일은 다한 거야.”라고 생각할 겁니다. 마인드풀니스는 압도당하는 느낌에서
빠져나오게 해주죠. 당신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자신이 현명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나에게는 어떤 대행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내 것을 보탭니다. 당신의 물방울 하나를 강물에
보탭니다. 정의의 강, 상호 배려의 강, 환경보호의 강이죠. 그런 강들이 당신의 삶과 세상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You’ve mentioned “the mystery” a couple of times during this conversation. What do you mean?
당신은 이번 대화에서 ‘신비’라는 말을 서너 번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이죠?
One of the great gifts of a contemplative moment or practice is that as we quiet the mind and
soften the heart and look around, we see the mystery all around us, whether it’s of trees or
rainfall or the forms of the earth or our own human body.
선정이나 평소 수행의 순간에 주어지는 위대한 선물가운데 하나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슴이 부드러워져 주위를
둘러볼 때면 우리를 둘러싼 신비를 보게 됩니다. 그게 나무이든지 비라든지, 땅의 형태나 우리 인간의 몸이기도 하지요.
How did we get in here, this strange, bipedal form with a hole at one end, into which we
regularly stuff dead plants and animals and grind them up with bones that hang down, and
glug them down through the tube for energy, and poop them out the other end?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이렇게 이상하게 두 발로 걸으며 한 쪽에는 구멍이 나있어 정해진 시간에 에너지를
얻기 위해 죽은 식물이나 동물을 집어넣고 거기에 달려있는 뼈로 갈아서 관을 통해 꿀떡 삼키고 다른
구멍으로 똥을 배출하는 형태로 있게 되었는가?
We ambulate by falling in one direction and catching ourselves, and falling in the other direction
and catching ourselves. Where we have the capacity to make sounds by pushing air by our
vocal cords and shaping our mouths, and I can say “Golden Gate Bridge,” and you can picture that.
No one really knows exactly how that happens. They know how the sodium-potassium balance
changes in the auditory nerve and goes to the auditory centers of the brain. But beyond that,
that interdependence, the web in which we live is so mysterious. And it’s the same web that
spins the galaxies and turns our seasons.
한 쪽으로 쏠리고 나서 몸을 바로잡고 다시 한 쪽으로 기울고 다시 몸을 바로잡으면서 우리가 돌아다닐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성대로 공기를 밀어내며 입모양을 만듦으로써 소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금문교’라고 말을 하면 당신은 그걸 그릴 수 있죠. 아무도 그것이 어떻게 정확히 그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청각 신경에 나트륨-인산의 균형의 변화가 일어나서 뇌의 청각 센터로 간다고 하긴 합디다.
그것을 넘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상호연결 망은 너무나 신비한 겁니다. 그것은 은하계가 회전하며 계절이
순환하는 바로 그 관계의 망인 것이죠.
So, to meditate, in some way, is to be able to stop and listen to the dance or the music of life
with a sense of reverence and connectedness and awe. And from that, then tend your life and
tend this world beautifully.
그래서 이런 식으로 명상을 하면 우리는 동작을 멈추어 공경심과 연결감과 경이감을 가지고 생명의 춤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보고 우리의 세상을 아름답게
돌보게 됩니다.
And yet, some not-so-positive stuff also comes up when we meditate, such as grief and despair.
Is it important to focus on the positive stuff on a spiritual journey?
그래도 우리가 명상할 때 아직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어떤 것, 상실감과 절망 같은 것을 마주칩니다.
정신적 여정에서 긍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까?
No. A spiritual path opens you to the 10,000 joys and to the 10,000 sorrows. It cracks the heart
open to weep at the loss of species. It allows you to honorably feel the tears that you carry
from your own personal trauma or from the death and loss or tragedy around you personally
and more broadly.
아닙니다. 영적인 여정은 당신을 천 개의 기쁨과 천 개의 슬픔에 대해 열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당신의
가슴을 찢어 열리게 하여 생물의 종이 사라져가는 것을 슬퍼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 개인의
트라우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장하게 느끼게 만들 것이며,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개인적이거나 더 넓은
어떤 것의 죽음과 상실 혹은 비극을 공감하게 해줄 것입니다.
But we so become loyal to our suffering. And suffering, while it’s vast and can be tended with
great compassion, is not the end of the story. The end of the story is love and freedom.
And this is possible for you. We don’t do it by ignoring the suffering around us, but
by knowing that who we are and what this life is, is greater than that.��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 정직해져야죠. 우리들의 고통은 넓기에 큰 자비심으로 돌봐야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스토리의 끝은 사랑과 자유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가능한 일이죠.
우리는 여러분 주위에 있는 고통을 무시하면서 이런 일을 하진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삶이 무엇인지가 그보다 더 크다는 걸 앎으로써 이런 일을 해가고 있는 거죠.
Sam Mowe is the Communications Manager at the Garrison Institute in New York, a nonprofit
dedicated to exploring the intersection of contemplation and social action. Jack Kornfield will
be leading a retreat at the Garrison Institute on July 31–August 2.
질문자 샘 모위는 뉴욕에 있는 개리슨 연구소의 커뮤니케이션 매니져이다. 연구소는 명상과 사회적 행동의
접점을 찾는 작업을 하는 비영리단체이다.
잭 콘필드는 7월31일~8월2일 동안 개리슨 연구소에서 집중수행을 인도할 예정이다.V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