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진연후
세상의 모든 길은 누군가의 한 걸음에서 시작되어 시간이 채워지며 다져지는 줄만 알았다. 이사 온 지 6년 반 만에 도시를 둘러싼 산책로를 알게 되었다. 신도시의 힐링 공간으로 휴먼 링을 만든다고 홍보가 꽤 있었지만 그 길이 이 도시의 가치를 높여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적이 없기에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잠만 자고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일을 보고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나는 깜깜한 길을 걸을 이유도, 걷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운동 부족이 심각한 내게 지인이 좋은 산책로를 옆에 두고 왜 이용을 하지 않느냐고 한다. 어느새 도시 계획 설계대로 안쪽으로는 아파트가 쑥쑥 올라가고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던 바깥쪽으로는 조금씩 초록이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시골은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는 말처럼 길이 마을을 품고 있었다. 마을과 마을은 꼬부랑꼬부랑 구부러진 그 길로 연결되고, 사이사이로 불쑥 산이 나타났다가 슬그머니 들이 펼쳐지기고 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품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까지는 고개를 두 개 넘어야 했다. 한 고개, 두 고개, 양 옆으로는 논과 밭이 있었다. 한겨울이면 5, 6학년 동네 오빠들이 논둑방 밑에서 불을 피워놓고 저학년이던 우리들에게 손을 쪼이게 해주었다. 40분 이상 걸리는 등굣길 중간에 손발을 녹일 수 있게 해주는 오빠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불을 완전히 끄는 일도 오빠들 몫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엄청 큰 오빠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겨우 13살이었다니.) 가을이면 하굣길에 밭에서 무를 뽑아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당시엔 ‘서리’라는 이름으로 용납되던 일이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차마 그건 받아먹지 못했던 것 같다. 이로 껍질을 벗겨 먹는 법도 좀 어려워 보였고.
매주 월요일이면 깃발을 든 6학년 오빠들을 따라 줄을 맞춰 등교를 하던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때(1970년대 후반)는 단결이나 협동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시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처럼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사람 길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촉박한 등굣길보다 하굣길이 더 좋았다. 학교 가는 길에 미처 보지 못한 길 위의 변화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훨씬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친구들과 여럿이 누가 한 고개까지 먼저 가나 달리기 시합도 하고, 가위 바위 보로 가방 들어주기도 하며, 해가 언제까지나 우리 머리 위에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5, 6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된 난이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난이네 집은 학교와 우리 동네 중간에 위치했다. 고학년이 되어 늦게 끝나기도 했지만 둘은 학교에서 무슨 일인가를 같이 하고는 해가 살짝 기울어질 쯤 교문을 나와서도 급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이야기 이어가기 놀이를 했고 난이네 동네를 지나치면 거의 우리 동네가 가까워지는 한 고개까지 와서는 다시 내가 난이를 데려다주겠다고 두 고개까지 가고 그러기를 두어 번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곧 해도 넘어갈 듯 겁을 줄 때쯤에야 허둥지둥 고개 마루에서 손을 흔들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다른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집에서 점점 더 멀리 나가있게 되면서 그 길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있었다. 1988년 시골 농토가 경지 정리가 되어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지니 구부러진 길은 단숨에 펴지고 고갯마루는 모두 무너졌다. 키 큰 나무 뒤 혹은 밭고랑 밑에 숨어 있다가 놀래키는 남자애들도 없고, 바람을 막아주어 불을 지필 수 있는 둑방도 없어졌다. 감추어둔 추억을 영 찾을 수 없어진 뻥 뚫린 길, 누군가의 한 발에서 시작되지 않고 어느 날 단숨에 ‘짠’ 하고 나타난 그 길이 나는 몹시 서운했다.
구부러진 길에는 나눔과 온기가 있다. 산길도 좋고 들길도 좋지만 무엇보다 구부러진 길이 좋다. 그 길에서 꿈을 꾸었다. 구체적이지 않은, 막연한 그러므로 꿈일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기대가 있는 가끔 욕심 다툼 경쟁도 있는, 그러나 그것마저 빛나던 순수의 시간들로 채워진 그 길을 생각하면 따듯해진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중략)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이준관,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려면 조금 천천히 가야 한다. 구부러진 길은 천천히 함께 가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구부러진 길을 걸으면서 나눈 서로의 마음은 달콤한 말풍선이 되어 떠돌다 생활에 허기가 질 때 귓가에 맴돈다.
굴러가는 곳과 걸어가는 곳이 나란히 이웃한 휴먼 링에는 반가운 토끼풀 강아지풀 계란꽃 쌀밥나무 모두 있었다. 아직 시간이 쌓이지 않은 내 이야기만 없을 뿐. 굽은 나무와 곧은 나무가 어울려 제법 그늘도 드리우고, 중간중간 연결된 공원에는 쉴 수 있는 공간에 다양한 운동기구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어폰을 꽂고 걷기에 열중인 사람들, 강아지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여유가 느껴진다. 익숙한 꽃나무라도 만난다거나 낯선 것에 이끌려 눈길 주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도 만나게 될까?
한국산문 2021년 1월호
한국산문작가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