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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첫 번째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주님께서 산 위에 올라 앉아서 자기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치신 팔복의 두 번째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상태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할 수만 있으면 슬픔과 고통을 피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슬픔과 고통 대신에 기쁨과 안락함을 추구합니다. 즐겁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고통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돈과 시간과 역량을 다 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 세계와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면, 이 예수님의 말씀이 분명 맞는 면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잘 인식하는 것이 더 건강하고 더 뛰어난 것임을 자연 세계가 보여줍니다. 곧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통을 잘 느끼는 생물들이 그만큼 지능지수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고통에 대하여 둔감한 동물들보다 고통에 대하여 예민한 동물이 그 만큼 아이큐가 높습니다. 지능이 높은 동물들은 단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처 때문에만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정서적인 면에서 외롭고 단절감을 느끼면 지능이 높은 동물은 풀이 죽고 슬픔을 느낍니다. 동료가 죽거나 새끼가 죽거나 할 때에 지능이 높은 동물인 개, 고양이, 코끼리, 돌고래, 범고래, 침팬지 등은 슬퍼하며 울며 죽은 새끼를 떠나 보내기를 힘들어 합니다. 더욱이 인간은 더 많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있습니다. 외로움, 단절감, 절망감,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상실감, 자기 성취에 대한 좌절감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서 신앙적인 면에서 당하는 좌절감에서 오는 슬픔도 있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바가 크면 그 만큼 그 동물이나 사람이 더 성숙하고 더 온전한 부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인격의 진보와 성숙이 고통의 경험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련의 광야를 통과한 사람만이 내면의 힘과 자유를 얻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 내면이 단단하며 기쁨이 내면이 충만한 가운데 감옥 밖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줄기차게 힘을 내도록 격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가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고통과 슬픔과 맞서 싸우면서 이겨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견고한 인격과 신앙은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수없이 애통하면서 얻게 된 기쁨과 굳건함과 자유함에서 나온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주께서 오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가르치신 이 말씀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이 은혜와 신앙의 덕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모든 애통함이 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스러운 심령 상태, 복스러운 내면 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들이 의미가 별로 없는 것일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연민의 슬픔입니다.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가 너무나 불쌍하게 보여서 울고 슬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난 때문에, 외모 때문에,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해서, 못난 자신이 한심해서, 자기를 비하하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오는 마음의 고통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은 그냥 계속 놔두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심하면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스러운 심령 상태인 애통이 아닙니다.
심지어 도덕적 실패 때문에 겪는 슬픔도 복스러운 슬픔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오랫동안 곁에 모시고 섬겼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은 삼십 량에 예수님의 대적에게 팔아넘기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래놓고는 마음에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다가 결국 목을 메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책과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과 애통은 복스러운 애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복스러운 심령 상태인 ‘애통하는 심령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삶의 깊은 고통과 시련 가운데 자기의 무력함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울면서 은혜를 구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인물 중에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서 작은 이한테 온갖 멸시를 받아서 설움이 마음에 가득한 중에 하나님 앞에 나와 한없이 울면서 서원합니다. 이 사무엘 선지자의 모친 한나의 심령이 바로 복스러운 애통의 마음입니다.
또 다윗처럼 사울 왕에게 쫓겨서 광야와 수풀과 동굴과 황무한 사막 요새를 떠돌면서 매일 매순간이 두렵고 떨려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광야의 들개와 타조처럼, 광야의 올빼미와 황무지의 부엉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지켜달라고, 자기 생명을 주의 손에 의탁한다고 밤새 울며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복스러운 애통입니다. 자기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자각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에게 은혜와 도우심을 청하면서 애통하며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또한 복스러운 심령 상태는 자기의 죄를 자각하고 자신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슬픔으로 우는 마음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고 먼 타국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잃은 뒤에 돼지 치는 사람에게 고용되어 돼지 치는 일을 하다가 너무 굶주려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훔쳐 먹다가 혼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너무 비참한 중에 생각해보니, 고향에 계신 자기 아버지 집에는 잠깐 사랑방에 머무는 객도 풍족하게 대접을 받고 종들의 쌀독도 항상 넉넉한데 자기는 이렇게 먼 타국에서 주려 죽는 신세가 된 것이 너무 한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곁의 머슴으로라도 살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그는 자존심도 다 내려놓습니다. 아프고 힘든 다리를 끌고 자기 고향 집으로 향한 먼 길을 떠납니다. 슬프고 애처롭고 죄스럽고 얼굴을 절대 들 수 없지만,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고 내쫓아도 당연히 받아들일 일이지만, 그래도 그리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못난 자식 불효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그는 지쳐 쓰러지고 절뚝이면서 고향 땅으로 울면서 돌아갑니다. 돌아가면서 그 탕자가 가진 마음의 상태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복스러운 애통의 마음인 것입니다. 탕자처럼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애통자는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는 타지에서 기생집에 팔아넘겨 없어진 황금 가락지 대신에 아버지께서 주시는 아들로서 상속자의 가락지를 다시 끼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처럼 자기의 잘못과 죄를 인하여 주님 앞에 나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범했을 때 주님께서 대제사장 안뜰에서 돌이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선을 맞닥뜨린 순간 베드로는 바로 얼마 전 그 밤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른 말씀,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양심이 그의 마음을 번갯불처럼 후려 쳤습니다. 베드로는 몇 시간 전에 자기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옥에도, 죽으시는 데도 함께 가겠다고 큰 소리쳤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대문을 박차고 나가 어두운 예루살렘 한 골목 구석에서 통렬하게 울면서 자기의 못남, 자기의 연약함을 뉘우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에 찔려서 밖에서 울었지만 끝내 그의 영혼의 파멸을 원하는 마귀에게 자신을 넘겨 자살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를 온전히 따르지 못한 자기의 못남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울고 제자 공동체 안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망했고, 베드로는 다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크고 신실한 사랑을 배반하고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에 보내어 화살을 맞아 죽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뻔뻔하게 아무 일 없는 듯이 밧세바를 궁에 데려와 아내로 삼고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그토록 깊은 성령 안에서 교제를 나누었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아마도 다윗 본인조차 목욕하는 밧세바를 궁궐 옥상에서 바라보기전까지도 감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란 잠깐이라도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면 이렇게 강렬하고 집요하고 무섭게 파고들어와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한 가지 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당 부분 훼손되었습니다. 친밀하고 견고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막히고 약해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기를 이삼년 지났습니다. 그와 밧세바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 예쁜 짓을 하던 어느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한 다윗에게 와서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으며 이로 인하여 원수 마귀에게 훼방거리를 주었노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번개 맞은 듯했습니다. 그는 그의 영혼은 그 때 거의 죽은 듯했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서야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를 찌른 것과 같은 대역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하나님 앞에 울기 시작합니다. 이삼년 동안 죄 속에서 외견적으로 행복했던 모든 나날들이 다 죄악의 나날이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칠일을 금식하며 자기의 죄악들을 철저히 회개합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깨어지고 상한 심령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내리시기로 한 징계의 거친 채찍질은 그의 생애를 오랫동안 짓누르며 그가 계속 애통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성화의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오르게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죄를 자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 모든 죄를 하나도 어떻게 처리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죄처럼 강력한 것이 없습니다. 죄는 뿌리가 깊고 그 생명력은 절대로 쉽게 죽지 않고 잡초처럼 인생의 기근이나 장마 때나 상관없이 우리 영혼과 삶을 지배하려고 돋아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부분을 보면, 주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도 바울조차도 자기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바는 하지 못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바는 하게 되는 내면의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으로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18,19,21, 24)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선과 악의 싸움을 매일 경험하면서, 자기 힘으로는 죄의 힘을 이겨낼 능력이 없음을 절감하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와 마귀와 싸워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승리자 예수님을 힘입어서 이러한 연약함을 이길 수 있음을 알고 그의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의 싸움이 지상의 순례의 여정 내내 종종 이어지기 때문에, 승리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의 영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비록 죄와의 끈질긴 싸움으로 인하여 내면 세계에 갈등과 괴로움과 슬픔이 늘 있지만, 우리를 돕는 자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함으로 돕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29 말씀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3,26)
그래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 때문에 슬퍼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거룩하게 해주시는 은혜를 갈망하는 애통은 주님 나라 들어가는 그 날까지 거룩한 성도의 지상 순례의 나날에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는 성령께서 그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줌으로써 그는 죄를 하나씩 떨쳐내고 의롭고 순결하고 진실하고 선한 열매를 점점 더 많이 맺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자는 자기 죄 때문으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복스러운 성도는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며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시편 119:136 말씀에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라고 하였고, 시편 119:139 말씀에 이르기를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라고 하였고, 다윗은 동일한 시편 158절에서도 이르기를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당시 동족들의 불성실한 신앙 생활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이중적이고 나태한 신앙 태도를 접하면서,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이 상하시고 애타하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속이 상하고 슬퍼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구원 사역을 펼치시는 중에 당시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심히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애통하며 우신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한 예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우신 모습이 누가복음 19:41 이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41~44)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차 올라가셨을 때에 감람산 산 중턱쯤에서 내려오시다가 성읍을 보시면서 말씀하셨거나 성읍의 동편 문 중 하나를 들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장차 그 성읍이 로마 제국의 군대에게 에워싸여 완전히 초토화되고 그 성안에 있던 삼백만 명이 결국 굶어죽고 전염병에 죽고 칼에 죽게 되었던 주후 70년에 일어난 재난을 미리 아시고서 슬픔에 겨워 울면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당할 무서운 재난을 주님은 가슴 아파서 이렇게 눈물 흘리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서 9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을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들을 심판하시려 할 때에 먼저 성전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읍과 유다 성읍들을 다니면서 불법과 우상 숭배를 자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 때에 서기관 천사 한 사람은 성중에 돌아다니면서 표를 그리는데 이마에 “타우”라는 히브리 끝 알파벳 표를 받은 자들은 천사들의 심판의 칼날을 피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표를 받는 자에 대하여 에스겔 9:4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여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즉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형벌에서 면제되는 의인들은 당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 중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우상 숭배와 술법과 초혼술과 주문 외는 것, 태양 숭배, 산당 등을 다니는 혼합 종교, 길흉을 점치는 모든 행위 등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통렬하게 우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개인 경건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느끼는 거리낌과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악함과 거역함을 인하여 울면서 기도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 혼자만 경건하면 된다는 생각 가지고 자기의 경건에만 자족하며, 다른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든지 살든지, 망하든지 흥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끌려다니다가 잠깐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가를 대신 진 틈을 이용하여 멈춰 뒤돌아서서 자기 뒤를 울면서 따라 오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누가복음 23:29,30)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약 40년 후부터 거칠게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일어날 반란 때문에 로마 군대가 달려와서 예루살렘의 어린아이들까지 다 짓밟아 죽이는 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장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장래와 우리 자녀들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하여 그냥 살살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생각하건대, 앞으로 우리 자녀들의 시대는 평탄한 대로를 걷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의 창일한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이 심히 어려운 시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흐릿하게 가지면 안됩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우리 자녀들을 세상에 내보내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당부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살리기 위하여, 지키기 위하여 많이 울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많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나아가 복스러운 애통은 곤경에 빠진 이를 보면서 함께 울고 그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고난을 겪은 자입니다. 깊은 나락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상처를 받았고 그 상쳐를 주님 품안에서 치유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고난과 슬픔의 고통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이들이 고난을 겪을 때, 슬픈 일을 겪고 아파할 때에 그를 깊이 이해하고 함께 아파합니다. 함께 울어줍니다. 성숙한 사람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는 이를 보면, 그를 위하여 깊이 울면서 기도해줍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기를 대신 간청하며 그의 회복과 치유와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해줍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35:13,14 말씀에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며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같이 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그의 주변의 신하나 친구들이 병들었을 때에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금식하며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종종 우셨습니다. 그 중에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의 무덤에 가서 살려내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울면서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도 함께 우심으로써,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이처럼 다른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며 함께 우는 자의 눈물은 복스러운 눈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어떤 복을 누리는 것일까요?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엣거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원문 그대로 하면, 이 단어 ‘위로하다’는 ‘파라칼레오’로서 ‘곁에 서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탄원하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에서 보혜사 성령의 직무인 “보혜사”(파라클레이토스)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찾아와 곁에 함께 서 계시면서 그를 붙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을 경험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위로가 있습니다. 무거운 죄 짐을 내면에 지고 끙끙대다가 양심의 가책과 말씀의 책망을 통하여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 용서를 청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가 그 심령을 사로잡습니다. 자기가 자기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무서운 형벌을 받고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를 믿음으로 은혜로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믿어지는 복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마음에 찾아와 위로해주십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갖다 부은 한 죄인 여인이 그러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울며 눈물로 그 발을 닦으며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누가복음 7:49,50) 말씀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통렬한 회개의 눈물 직후에 즉각적인 위로를 얻었으니 일어나 돌아갈 때에 기쁨과 자유로움 가운데 충만했습니다. 이처럼 애통하는 자는 애통함으로 인하여 즉각적인 위로를 받습니다.
또한 계속적인 위로도 있습니다. 자기 속에 죄의 기질이 강력함을 알고, 자기 안의 죄의 본성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자기를 쳐서 주님께 복종하며 성령께 도우심을 청하며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늘 탄식하며 웁니다. 그러할 때마다 성령께서 그 심령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힘을 내라.” “죄에 지지 말라. 앞서간 선배들도 동일한 싸움을 싸웠으니 용기를 내라”고 속에서 탄식함으로 격려해주십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성령님은 지속적으로 위로하며 격려해줍니다.
또한 궁극적이고 영원한 위로도 있습니다. 그것은 애통하는 자가 저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는 것입니다. 저 천국은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우리를 시험하는 자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더 이상 이별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 대한 요한계시록 21:4 말씀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할렐루야. 이 천국의 위로는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위로가 충분치 않을 수 있지만, 우리의 위로가 완전해지는 날이 있음을 바라보고 이 지상에서의 고난 중에도 복스러운 애통자로 살아갑시다.
성경을 보면 슬픔과 기쁨이 깊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고난과 영광이 깊이 연관된 것과 같습니다. 시편 126:5,6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어둠이 있어야 새벽 빛이 아름답고, 폭우와 구름이 있어야 햇살이 아름답고, 인생의 고난이 깊고 커야 그 인생이 더 아름답고 보람있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그 복스러움에 우리를 동참하도록 부르시기 위하여 팔복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닮습니다. 천국 백성의 표지를 드러납니다. 이처럼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고결한 마음을 닮아갑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심히 가까이 합니다. 고난의 슬픔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서 많이 깨어진 심령이었던 다윗을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합한 자라고 여기고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슬픔은 다윗에게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로 인하여 많이 웁시다. 자기 안에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을 발견하고 이와 싸우도록 분투하십시오. 그러나 이길 수 없어서 괴로워 울게 될 때 주님은 그 순간 우리를 한 단계 더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만져주실 때에 우리 심령에 빛이 비추어지면서, 우리는 한 단계 더 자유로와질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눈물 골짜기를 우리가 지나가게 될 터인데 그러나 그 순례길에 고통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시편 84:6 말씀에서 노래하기를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헤매 지쳐 울 때에 우리 곁에 위로의 샘들을 예비해주셔서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쓰러져 울면서 자기 아들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통곡하며 울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녀에게 눈을 열어 가까운 샘물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평생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다윗처럼 깨어진 심령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십시오. 슬픔의 사람 우리 구주처럼 늘 아버지 앞에서 자주 우십시오. 그 애통이 우리를 살리고 힘을 얻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이들을 살리며 격려하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숙한 일꾼으로 쓰임받게 해줄 것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