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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꾸나… 내 방식대로 삶을 비행하는 거야[
가만한 당신] 딘 포터
등록 : 2015.06.05
빨랫줄 매고 암벽 오른 16살 소년, 불법 무릅쓰고 등반에 몰두
美 요세미티 국립공원 양대 거봉, 최초로 하루 만에 연속 등정
구조물서 뛰어내리는 베이스 점핑, 프리 솔로잉에 접목, 정착시켜
1972.4.14~2015.5.16 발바닥에 닿은 직경 10~20㎜ 밧줄이 그가 딛고 선 세계다. 안전끈도 낙하산도 없으니 벗어나면 죽음. 두려움은 긴장을 낳고 긴장은 근육을 굳힌다. 굳은 몸으로는 흔들리는 밧줄과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다. 지금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것이다. 딘 포터는 “죽음 이후는 없다”고 “내 식대로 살다가 내 식대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philosophyplacementvmu2012.wordpress.com에서.
그는 날고싶어 했다. 오래 날기 위해 점점 높이 올라갔고(클라이밍), 그러자니 더 가벼워져야 했다(프리 솔로잉).
부력을 아끼려면 정밀한 몸의 균형은 필수였다(하이라이닝). 윙수트 플라잉은 그의 꿈에 가장 근접한 익스트림 스포츠였다. 그의 마지막 꿈은 맨몸에 윙수트만으로 날아 낙하산 없이 착지하는 것이었다. 땅의 속박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그에게 비행은 자유였다.
어쩌면 그는 추락과 비행의 차이를 활강하는 육체의 방향각이 아니라 의지의 지향각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절벽에 부딪쳐 부서져버린 몸이 균형과 부력을 잃고 수직으로 내려꽂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비로소 날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음의 추락이 아닌, 마침내 삶의 비행. 다만 그 비행은 너무 짧았다.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뽑은 ‘올해의 모험가’ 딘 포터(Dean Potter)가 5월 16일 요세미티국립공원 윙수트 비행 도중 사고로 숨졌다. 향년 43세.
벼랑 끝이나 밧줄 위, 혹은 오버행을 이고 까마득한 수직 절벽을 기어오르는 유튜브 영상 속의 그는 자유롭고 신나 보인다. 하지만 그는 늘 두려워했고, 악몽도 자주 꾼다고 했다. 2003년 멕시코 스왈로스 케이브 베이스 점핑에서 젖은 낙하산이 엉켜 죽을뻔한 뒤 한동안 칩거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다시 뭔가를 시도할 의지를 거의 잃고 지냈다. 그 사고는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스스로 되묻게 했다. 2년 넘게 에너지 고갈 상태였다.” (익스트림스포츠 전문지 ‘outside’ 2011.6.5)
암벽 클라이머로 세계적 명성을 얻어가던 시기였다. 1998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하프돔 북서벽(415m, 난이도 5.12a로 요세미티 암벽 난이도 등급체계에서 ‘파이브텐(5.10)이상은 Extremely Severe로 분류된다)을 그는 로프와 안전 장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올랐다. 그 등반을 훗날 체다 라이트 같은 직업 등반가는 “빅월(big wall) 클라이밍의 패러다임을 바꾼 등반”이라 평했다. 하룻만에 요세미티의 양대 거봉인 엘 캐피탄(El Capitan)과 하프돔을 연속 등정한 것도 2002년 그가 최초로 해낸 일이었다. 2008년 뉴욕타임스는 “아마추어 암벽등반가라면 로프와 온갖 장비를 갖추고 2주 휴가를 내야 엄두를 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썼다. 2001년 엘 캐피탄의 914m 수직암벽 노스(Nose) 월을 최단시간인 3시간 24분만에 주파하기도 했다. 비교하긴 그렇지만, 58년 선구적 클라이머 워렌 하딩(Warren J Harding) 팀이 노스루트를 등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45일이었다. 2002년 칠레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암벽 역시 한 시즌에 두 차례 연속, 한 번은 새로운 루트로 프리 솔로잉한다. 그는 피츠로이에서 처음으로 “단숨에 안전(?)하게 산을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게 패러글라이딩이거나 베이스점핑이거나 윙수트 플라잉이었다. (Beyond the Edge, 2015.5.17)
슬럼프를 벗어난 뒤 그의 스타일은 더 거칠고 과감해졌다. 2006년 포터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엘 캐피탄의 또 다른 난봉 레티슨트 암벽(Reticent Wall)을 34시간 57분만에 주파했고, 션 리어리(Sean Leary)와는 엘 캐피탄 노스루트 정상을 세계기록인 2시간 36분 45초 만에 정복했다. 잡지 ‘플래닛마운틴’은 “그들이 (수직 절벽을) 뛰어 올라갔다(ran-up)이라 표현했다.
암벽 자유등반과 달리 인공 암장에서 속도와 기량을 겨루는 클라이밍을 스포츠클라이밍이라 한다. 로프와 카라비너 등 안전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오르는 건 볼더링이다. 볼더링은 위험하기 때문에 대개 고도 6m 이내의 암장(암벽)에서 바닥에 매트를 깔고 한다. 반면 프리솔로잉은 볼더링 방식으로 혼자 암벽을 오르는 방식이다. 수백m씩 되는 암벽을 맨몸으로 오르는 프리 솔로잉은 중간중간 로프에 매달려 쉬지 못하기 때문에 체력과 기술이 필수다. 중간에 미끄러지거나 균형을 잃으면 곧장 추락이다. 그래서 낙하산을 맨다. 미끄러지더라도 낙하산을 펼칠 수 있는 높이까지는 올라가서 미끄러져야 한다는 얘기다. 포터는 저 기록들을 대부분 프리솔로잉으로 이뤘다.
‘단숨에 안전하게 하산하기’는 로프 없이 암벽을 오른 이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베이스 점핑은 낙하산을 매고 고정 구조물에서 뛰어 내리는 스포츠다. 베이스(BASE)란 빌딩(Building), 탑(Antenna), 교각(Span), 절벽(Earth)의 머릿글자를 딴 말. 항공기를 이용하는 스카이 다이빙에 비해 고도가 낮은 대신 돌풍 등 바람에 취약하고 구조물 충돌과 착륙지점 확보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프리 베이스’를 처음 시도하고 정착시킨 것도 딘 포터였다. 프리솔로잉 도중의 베이스점핑은 대개 돌발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 몸이 미끄러지는 순간 매달리려는 본능에 맞서 본능적으로 암벽을 발로 걷어 차야 한다. 절벽으로부터 최대한 떨어져야 하고 순식간에 낙하산을 펼쳐야 한다. 몸의 균형도 그만큼 다급하게 확보해야 한다.
클라이머들은 균형감각을 기르기 위해 슬래클리닝(Slackling)이라 부르는 외줄타기를 한다. 80년대 초 베이스캠프에서 빈둥거리던 몇몇이 나무 둥치나 차량 범퍼를 밧줄로 이어 놀이처럼 시작한 슬래클리닝은 점차 고도를 높이며 벼랑이나 봉우리 높이까지 올라갔고, 80년대 중반 무렵 ‘하이라이닝(Highlining)’이라는 독립 종목을 만들어냈다.
포터가 하이라이닝을 시작한 건 1993년 무렵이다. 슬래클리닝의 구루(guru)로 통하는 척 터커(애칭 ‘Chongo’)가 그의 스승이었다. 터커는 2011년 아웃사이드 인터뷰에서 “포터는 첫 시도에서 12m 밧줄을 단숨에 건너더니 그 날 밧줄 위에서 돌아서는 기술까지 익혔다”고 말했다. 그는 “슬래클리닝이 클라이밍의 필수 훈련코스가 된 것도 딘이 자신의 클라이밍 기술의 정수가 슬래클리닝에 있다고 한 뒤부터”라고 말했다.
아드레날린 중독자였을 포터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도 하이라이닝이었다. 그럴 것이 그는, 하이라이닝의 생명줄인 테더링(tethering) 즉 안전 끈을 묶지 않고 줄 위에 서는 유일한 하이라이너였다. 끈 대신 그는 낙하산을 맸고, 추락하면 베이스 점핑을 했다. 2008년 3월 유타주 모하비의 헬로어링캐년(Hell-Roaring Canyon, 바닥 고도 275m 길이 55m) 하이라이닝 때도 그는 테더링을 마다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중간쯤 이르렀을 때 밧줄은 좌우로 약 60cm 상하로 약 30cm씩 흔들렸다”고 썼다. 2012년 4월 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리는 후베이성 언스 시 협곡에서 밧줄을 탈 때는 안전 끈도 낙하산도 없었다. 이를테면 프리솔로 하이라이닝이었는데 그는 훗날 “당시 내가 믿은 것은, 떨어질 것 같으면 다리나 손으로 밧줄을 붙잡는 방법뿐이었다”고 말했다.(12.4.26)
돈이나 명성보다 스릴 자체를 즐기는 익스트리머들은 아무렇게나 입고 잘 씻지도 않는다. 오지에서 지내는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목숨을 반쯤 내놓고 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법이나 관습보다 중력에 얽매인다. 긴장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명상 등 수련을 하는 이들도 많다. ‘더트백(DirtBag)’은 한 발을 세상 바깥에 두고 사는 그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돈벌이에 관심 없고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구애 받지 않아 히피와 흡사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분된다. 워싱턴포스트는 딘 포터를 ‘울트라 더트백’이라 불렀다. 수다스럽고 유쾌하다가도 계획이 서면 극도로 침잠하며 차가운 열정을 쏟아내는 그를 더트백들은 ‘Dark Wizard(어둠의 마법사)’라 불렀다.
그는 점핑이든 클라이밍이든 먼저 머리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세와 경로를 상상하면서 호흡 명상으로 평정심을 확보하기. 요가 교사였던 어머니의 가장 안정적인 호흡과 숨소리를 기억하는 그는 자신의 호흡을 거기 포개면서 한걸음 한걸음 벼랑 끝으로, 무념의 경지로 다가간다고 했다. 그는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죽음 이후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내 방식대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2009년 여름,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윙수트에 낙하산 하나 달랑 메고 아이거 북벽 딥 블루 씨(Deep blue sea) 루트의 해발 3,970m 벼랑(일명 엑스터시 보드) 에 섰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떨어진 돌이 바닥에 닿는 데 약 8초가 걸리는 그 높이(2,682m)에서, 그는 장장(!) 2분50초 동안 5.5km 를 날았다. 당시 윙수트 비행 최장 기록이었다. 2011년 11월 그는 아이거 서벽(수직고도 2,804m)에서 3분 20초 동안 7.5km를 날아 자신의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윙수트의 활공비는 2.5쯤 된다. 1m 하강하는 동안 2.5m를 수평 이동한다는 얘기다. 땅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강하는 각, 즉 활강각은 50.7도다. 그의 11년 활강각은 20.5도였다. ‘토니윙수트’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그는 “내가 사람보다 새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고 썼다.
딘 포터는 1972년 4월 14일 캔자스 주 포트 리븐워스의 군 병원에서 태어나 뉴햄프셔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뉴햄프셔고교에 다니던 16살 무렵 그는 독학으로 클라이밍을 시작한다. 조 잉글리시 힐(고도 380m)의 60m쯤 되는 화강암벽이 그의 첫 도전무대였다. 하니스(안전 벨트)는 당연히 없었고, 로프는 친구가 가져온 빨랫줄이었다. 그리고 암벽은 공군 기지 통제권역 내에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불법 클라이머였다.
91년 초 뉴햄프셔에서 그의 클라이밍 파트너였던 찰리 벤틀리라는 이는 2011년 ‘outside’ 인터뷰에서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내 레벨이 좀 높았는데 그 해 봄이 끝날 즈음에는 실력 차이가 없어지더니 가을 무렵 그는 5.13 등급(5.14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등급의 끝이다)의 암벽을 오르고 있더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실력이 늘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다.” 포터는 뉴햄프셔 대학 진학 후 조정 대표팀에 들지만 경쟁을 부추기는 코치의 등쌀에 진저리를 치고 3학기 만에 자퇴, 본격적으로 ‘더트백’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는 90년대 내내 밴에서 먹고 자면서 클라이머와 볼더들의 메카로 꼽히는 요세미티와 텍사스의 휴에고 탱크스, 콜로라도 에스테스, 유타 모하비 등지를 떠돈다. 가방 공장, 식당 등지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2009년 아이거 베이스점핑 파트너였던 짐 허스트를 만난 것도 거기서였다. 허스트는 “딘은 등반 친구들이 오면 블루베리 팬케이크에 베리를 산처럼 쌓아 줘서 주인에게 심하게 욕을 먹곤 했다”고 회고했다. 포터는 친구와 둘이서 소금 친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억했다.(outside, 2011.6.15)
90년대 말의 그는 세계적 클라이머가 돼 있었고, 굴지의 스포츠용품 업체들- 파타고니아, 블랙다이아몬드, 파이브탠-과 스폰서쉽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2006년 파란의 스캔들로 기억되는 유타주 아치즈 국립공원 프리솔로잉으로 그는 저 스폰서들을 잃고 만다. 무른 사암(沙岩)들의 풍화로 조성된 유타주 남부의 랜드마크들 중에서도 크기로나 모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델리키트 아치(Delicate Arch)를 프리솔로잉한 거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클라이머들조차 신성시하며 근접하지 않던 바위였다. 촬영팀의 밧줄에 긁힌듯한 자국이 발견됐다. 클라이머들의 성토가 이어졌고, 공원측도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딘은 “바람 불면 날아갈 초크 자국 외엔 남긴 흔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정황상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2002년 결혼한 클라이머이자 아내 스테프 데이비스의 스폰서 계약마저 끊겼다. 둘은 2010년 이혼했다.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하게 지키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사건 이후 아치즈 국립공원은 일체의 등반 행위를 공식적으로 금했다. 물론 더트백에게 법은 대수로운 게 아니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위(자연)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따지고 보면 요세미티를 비롯한 국립공원 베이스 점핑도 모두 불법이다. 점퍼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진 뒤 점핑을 한다. 어두워서 더 위험한 대신, 어둡기 때문에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 더 예민해질 수 있다고 딘 포터는 말했다.
“인간이 난다는 게 미친 생각이란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그게 가능해지려면 생각이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는 나아가야 한다.” 그는 동료 그레이엄 헌트(29)와 5월 16일 저녁 7시 30분, 요세미티 협곡의 고도 914m ‘태프트(Taft) 포인트’에 올랐다.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몸에는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은 채 매여 있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날자꾸나… 내 방식대로 삶을 비행하는 거야[가만한 당신] 딘 포터
등록 : 2015.06.05
빨랫줄 매고 암벽 오른 16살 소년, 불법 무릅쓰고 등반에 몰두
美 요세미티 국립공원 양대 거봉, 최초로 하루 만에 연속 등정
구조물서 뛰어내리는 베이스 점핑, 프리 솔로잉에 접목, 정착시켜
1972.4.14~2015.5.16 발바닥에 닿은 직경 10~20㎜ 밧줄이 그가 딛고 선 세계다. 안전끈도 낙하산도 없으니 벗어나면 죽음. 두려움은 긴장을 낳고 긴장은 근육을 굳힌다. 굳은 몸으로는 흔들리는 밧줄과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다. 지금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것이다. 딘 포터는 “죽음 이후는 없다”고 “내 식대로 살다가 내 식대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philosophyplacementvmu2012.wordpress.com에서.
그는 날고싶어 했다. 오래 날기 위해 점점 높이 올라갔고(클라이밍), 그러자니 더 가벼워져야 했다(프리 솔로잉).
부력을 아끼려면 정밀한 몸의 균형은 필수였다(하이라이닝). 윙수트 플라잉은 그의 꿈에 가장 근접한 익스트림 스포츠였다. 그의 마지막 꿈은 맨몸에 윙수트만으로 날아 낙하산 없이 착지하는 것이었다. 땅의 속박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그에게 비행은 자유였다.
어쩌면 그는 추락과 비행의 차이를 활강하는 육체의 방향각이 아니라 의지의 지향각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절벽에 부딪쳐 부서져버린 몸이 균형과 부력을 잃고 수직으로 내려꽂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비로소 날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음의 추락이 아닌, 마침내 삶의 비행. 다만 그 비행은 너무 짧았다.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뽑은 ‘올해의 모험가’ 딘 포터(Dean Potter)가 5월 16일 요세미티국립공원 윙수트 비행 도중 사고로 숨졌다. 향년 43세.
벼랑 끝이나 밧줄 위, 혹은 오버행을 이고 까마득한 수직 절벽을 기어오르는 유튜브 영상 속의 그는 자유롭고 신나 보인다. 하지만 그는 늘 두려워했고, 악몽도 자주 꾼다고 했다. 2003년 멕시코 스왈로스 케이브 베이스 점핑에서 젖은 낙하산이 엉켜 죽을뻔한 뒤 한동안 칩거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다시 뭔가를 시도할 의지를 거의 잃고 지냈다. 그 사고는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스스로 되묻게 했다. 2년 넘게 에너지 고갈 상태였다.” (익스트림스포츠 전문지 ‘outside’ 2011.6.5)
암벽 클라이머로 세계적 명성을 얻어가던 시기였다. 1998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하프돔 북서벽(415m, 난이도 5.12a로 요세미티 암벽 난이도 등급체계에서 ‘파이브텐(5.10)이상은 Extremely Severe로 분류된다)을 그는 로프와 안전 장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올랐다. 그 등반을 훗날 체다 라이트 같은 직업 등반가는 “빅월(big wall) 클라이밍의 패러다임을 바꾼 등반”이라 평했다. 하룻만에 요세미티의 양대 거봉인 엘 캐피탄(El Capitan)과 하프돔을 연속 등정한 것도 2002년 그가 최초로 해낸 일이었다. 2008년 뉴욕타임스는 “아마추어 암벽등반가라면 로프와 온갖 장비를 갖추고 2주 휴가를 내야 엄두를 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썼다. 2001년 엘 캐피탄의 914m 수직암벽 노스(Nose) 월을 최단시간인 3시간 24분만에 주파하기도 했다. 비교하긴 그렇지만, 58년 선구적 클라이머 워렌 하딩(Warren J Harding) 팀이 노스루트를 등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45일이었다. 2002년 칠레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암벽 역시 한 시즌에 두 차례 연속, 한 번은 새로운 루트로 프리 솔로잉한다. 그는 피츠로이에서 처음으로 “단숨에 안전(?)하게 산을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게 패러글라이딩이거나 베이스점핑이거나 윙수트 플라잉이었다. (Beyond the Edge, 2015.5.17)
슬럼프를 벗어난 뒤 그의 스타일은 더 거칠고 과감해졌다. 2006년 포터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엘 캐피탄의 또 다른 난봉 레티슨트 암벽(Reticent Wall)을 34시간 57분만에 주파했고, 션 리어리(Sean Leary)와는 엘 캐피탄 노스루트 정상을 세계기록인 2시간 36분 45초 만에 정복했다. 잡지 ‘플래닛마운틴’은 “그들이 (수직 절벽을) 뛰어 올라갔다(ran-up)이라 표현했다.
암벽 자유등반과 달리 인공 암장에서 속도와 기량을 겨루는 클라이밍을 스포츠클라이밍이라 한다. 로프와 카라비너 등 안전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오르는 건 볼더링이다. 볼더링은 위험하기 때문에 대개 고도 6m 이내의 암장(암벽)에서 바닥에 매트를 깔고 한다. 반면 프리솔로잉은 볼더링 방식으로 혼자 암벽을 오르는 방식이다. 수백m씩 되는 암벽을 맨몸으로 오르는 프리 솔로잉은 중간중간 로프에 매달려 쉬지 못하기 때문에 체력과 기술이 필수다. 중간에 미끄러지거나 균형을 잃으면 곧장 추락이다. 그래서 낙하산을 맨다. 미끄러지더라도 낙하산을 펼칠 수 있는 높이까지는 올라가서 미끄러져야 한다는 얘기다. 포터는 저 기록들을 대부분 프리솔로잉으로 이뤘다.
‘단숨에 안전하게 하산하기’는 로프 없이 암벽을 오른 이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베이스 점핑은 낙하산을 매고 고정 구조물에서 뛰어 내리는 스포츠다. 베이스(BASE)란 빌딩(Building), 탑(Antenna), 교각(Span), 절벽(Earth)의 머릿글자를 딴 말. 항공기를 이용하는 스카이 다이빙에 비해 고도가 낮은 대신 돌풍 등 바람에 취약하고 구조물 충돌과 착륙지점 확보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프리 베이스’를 처음 시도하고 정착시킨 것도 딘 포터였다. 프리솔로잉 도중의 베이스점핑은 대개 돌발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 몸이 미끄러지는 순간 매달리려는 본능에 맞서 본능적으로 암벽을 발로 걷어 차야 한다. 절벽으로부터 최대한 떨어져야 하고 순식간에 낙하산을 펼쳐야 한다. 몸의 균형도 그만큼 다급하게 확보해야 한다.
클라이머들은 균형감각을 기르기 위해 슬래클리닝(Slackling)이라 부르는 외줄타기를 한다. 80년대 초 베이스캠프에서 빈둥거리던 몇몇이 나무 둥치나 차량 범퍼를 밧줄로 이어 놀이처럼 시작한 슬래클리닝은 점차 고도를 높이며 벼랑이나 봉우리 높이까지 올라갔고, 80년대 중반 무렵 ‘하이라이닝(Highlining)’이라는 독립 종목을 만들어냈다.
포터가 하이라이닝을 시작한 건 1993년 무렵이다. 슬래클리닝의 구루(guru)로 통하는 척 터커(애칭 ‘Chongo’)가 그의 스승이었다. 터커는 2011년 아웃사이드 인터뷰에서 “포터는 첫 시도에서 12m 밧줄을 단숨에 건너더니 그 날 밧줄 위에서 돌아서는 기술까지 익혔다”고 말했다. 그는 “슬래클리닝이 클라이밍의 필수 훈련코스가 된 것도 딘이 자신의 클라이밍 기술의 정수가 슬래클리닝에 있다고 한 뒤부터”라고 말했다.
아드레날린 중독자였을 포터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도 하이라이닝이었다. 그럴 것이 그는, 하이라이닝의 생명줄인 테더링(tethering) 즉 안전 끈을 묶지 않고 줄 위에 서는 유일한 하이라이너였다. 끈 대신 그는 낙하산을 맸고, 추락하면 베이스 점핑을 했다. 2008년 3월 유타주 모하비의 헬로어링캐년(Hell-Roaring Canyon, 바닥 고도 275m 길이 55m) 하이라이닝 때도 그는 테더링을 마다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중간쯤 이르렀을 때 밧줄은 좌우로 약 60cm 상하로 약 30cm씩 흔들렸다”고 썼다. 2012년 4월 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리는 후베이성 언스 시 협곡에서 밧줄을 탈 때는 안전 끈도 낙하산도 없었다. 이를테면 프리솔로 하이라이닝이었는데 그는 훗날 “당시 내가 믿은 것은, 떨어질 것 같으면 다리나 손으로 밧줄을 붙잡는 방법뿐이었다”고 말했다.(12.4.26)
돈이나 명성보다 스릴 자체를 즐기는 익스트리머들은 아무렇게나 입고 잘 씻지도 않는다. 오지에서 지내는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목숨을 반쯤 내놓고 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법이나 관습보다 중력에 얽매인다. 긴장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명상 등 수련을 하는 이들도 많다. ‘더트백(DirtBag)’은 한 발을 세상 바깥에 두고 사는 그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돈벌이에 관심 없고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구애 받지 않아 히피와 흡사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분된다. 워싱턴포스트는 딘 포터를 ‘울트라 더트백’이라 불렀다. 수다스럽고 유쾌하다가도 계획이 서면 극도로 침잠하며 차가운 열정을 쏟아내는 그를 더트백들은 ‘Dark Wizard(어둠의 마법사)’라 불렀다.
그는 점핑이든 클라이밍이든 먼저 머리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세와 경로를 상상하면서 호흡 명상으로 평정심을 확보하기. 요가 교사였던 어머니의 가장 안정적인 호흡과 숨소리를 기억하는 그는 자신의 호흡을 거기 포개면서 한걸음 한걸음 벼랑 끝으로, 무념의 경지로 다가간다고 했다. 그는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죽음 이후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내 방식대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2009년 여름,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윙수트에 낙하산 하나 달랑 메고 아이거 북벽 딥 블루 씨(Deep blue sea) 루트의 해발 3,970m 벼랑(일명 엑스터시 보드) 에 섰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떨어진 돌이 바닥에 닿는 데 약 8초가 걸리는 그 높이(2,682m)에서, 그는 장장(!) 2분50초 동안 5.5km 를 날았다. 당시 윙수트 비행 최장 기록이었다. 2011년 11월 그는 아이거 서벽(수직고도 2,804m)에서 3분 20초 동안 7.5km를 날아 자신의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윙수트의 활공비는 2.5쯤 된다. 1m 하강하는 동안 2.5m를 수평 이동한다는 얘기다. 땅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강하는 각, 즉 활강각은 50.7도다. 그의 11년 활강각은 20.5도였다. ‘토니윙수트’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그는 “내가 사람보다 새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고 썼다.
딘 포터는 1972년 4월 14일 캔자스 주 포트 리븐워스의 군 병원에서 태어나 뉴햄프셔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뉴햄프셔고교에 다니던 16살 무렵 그는 독학으로 클라이밍을 시작한다. 조 잉글리시 힐(고도 380m)의 60m쯤 되는 화강암벽이 그의 첫 도전무대였다. 하니스(안전 벨트)는 당연히 없었고, 로프는 친구가 가져온 빨랫줄이었다. 그리고 암벽은 공군 기지 통제권역 내에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불법 클라이머였다.
91년 초 뉴햄프셔에서 그의 클라이밍 파트너였던 찰리 벤틀리라는 이는 2011년 ‘outside’ 인터뷰에서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내 레벨이 좀 높았는데 그 해 봄이 끝날 즈음에는 실력 차이가 없어지더니 가을 무렵 그는 5.13 등급(5.14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등급의 끝이다)의 암벽을 오르고 있더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실력이 늘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다.” 포터는 뉴햄프셔 대학 진학 후 조정 대표팀에 들지만 경쟁을 부추기는 코치의 등쌀에 진저리를 치고 3학기 만에 자퇴, 본격적으로 ‘더트백’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는 90년대 내내 밴에서 먹고 자면서 클라이머와 볼더들의 메카로 꼽히는 요세미티와 텍사스의 휴에고 탱크스, 콜로라도 에스테스, 유타 모하비 등지를 떠돈다. 가방 공장, 식당 등지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2009년 아이거 베이스점핑 파트너였던 짐 허스트를 만난 것도 거기서였다. 허스트는 “딘은 등반 친구들이 오면 블루베리 팬케이크에 베리를 산처럼 쌓아 줘서 주인에게 심하게 욕을 먹곤 했다”고 회고했다. 포터는 친구와 둘이서 소금 친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억했다.(outside, 2011.6.15)
90년대 말의 그는 세계적 클라이머가 돼 있었고, 굴지의 스포츠용품 업체들- 파타고니아, 블랙다이아몬드, 파이브탠-과 스폰서쉽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2006년 파란의 스캔들로 기억되는 유타주 아치즈 국립공원 프리솔로잉으로 그는 저 스폰서들을 잃고 만다. 무른 사암(沙岩)들의 풍화로 조성된 유타주 남부의 랜드마크들 중에서도 크기로나 모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델리키트 아치(Delicate Arch)를 프리솔로잉한 거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클라이머들조차 신성시하며 근접하지 않던 바위였다. 촬영팀의 밧줄에 긁힌듯한 자국이 발견됐다. 클라이머들의 성토가 이어졌고, 공원측도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딘은 “바람 불면 날아갈 초크 자국 외엔 남긴 흔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정황상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2002년 결혼한 클라이머이자 아내 스테프 데이비스의 스폰서 계약마저 끊겼다. 둘은 2010년 이혼했다.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하게 지키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사건 이후 아치즈 국립공원은 일체의 등반 행위를 공식적으로 금했다. 물론 더트백에게 법은 대수로운 게 아니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위(자연)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따지고 보면 요세미티를 비롯한 국립공원 베이스 점핑도 모두 불법이다. 점퍼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진 뒤 점핑을 한다. 어두워서 더 위험한 대신, 어둡기 때문에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 더 예민해질 수 있다고 딘 포터는 말했다.
“인간이 난다는 게 미친 생각이란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그게 가능해지려면 생각이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는 나아가야 한다.” 그는 동료 그레이엄 헌트(29)와 5월 16일 저녁 7시 30분, 요세미티 협곡의 고도 914m ‘태프트(Taft) 포인트’에 올랐다.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몸에는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은 채 매여 있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