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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마쳤다.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서점을 그만두고는 〈자유신문〉·〈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심장마비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해 문단에 나온 뒤 〈남풍〉(신천지, 1947. 7)·〈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 〈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생전에 〈박인환 시선집〉(1955)이 나왔고, 이어 〈목마와 숙녀〉(1976) 등이 발행되었다. 죽기 1주일 전에 지었다는
〈세월이 가면〉은 뒤에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버지니아 울프-영국의 여류 소설가. 비평가.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결국 자살함
-페시미즘 (pessimism) : 비관주의, 염세주의 ↔ 낙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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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모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절망감과 애상감
시인 박인환의 고향 ‘인제’ [서울신문 2004-12-16 10:15]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중략)…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 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펑펑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날, 찻집에 앉아 애잔한 음악과 함께 낭송되던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는 대학가 감상적 낭만의 대명사였다.20∼30년전까지만 해도 찻집마다 단골메뉴로 들려주던 ‘목마와 숙녀’는 그렇게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허무와 절망, 시대적 불안과 애상을 노래한 전후의 대표적 모더니즘 작품인 ‘목마와 숙녀’는 애절한 한국인의 한(恨)풀이이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를 보듬은 31세 요절 시인 박인환(朴寅煥)은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을 인간의 비극으로 승화시켜 상처받은 시대적 감성을 달래주었다.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시인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금도 애송되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이후 서울로 유학해 서점을 경영하며 모더니즘 시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점을 통해 문단의 주요인사와 교분을 넓혔고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전쟁 이후 상실과 자조의 풍조가 지배적이었던 당대의 시풍을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등으로 담아내면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한때 외항선을 타기도 했던 박인환 시인은 당대 문인들 가운데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을만큼 지나칠 정도로 정장과 외투를 선호했다는 후일담이다. 시 쓰기에 몰두하던 박인환은 공교롭게도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 추모의 밤 행사때 술을 마시고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친구들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에 그가 평소에 좋아했지만 돈이 없어 마음껏 먹지 못한 조니워커를 쏟아 부어주며 그의 시 ‘목마와 숙녀’처럼 살다간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인환 시비
“…(전략)/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후략)”
그는 해방후 혼란의 소용돌이와 6·25 전란의 황폐 가운데서 70여편의 시를 남겨 한국현대시의 맹아를 키워 냈으며,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토착화에 기여하였고 문학사에 큰획을 그어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박인환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수십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88년 남북리 아미산공원에 시비를 건립했다가 이후 도로공사로 현재의 합강정 소공원에 이전·건립했다. 해마다 10월이면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박인환 문학제’도 열린다. 문학제는 추모 백일장과 문학상 시상식, 시낭송대회, 문인초청 세미나, 동화구연대회 등 다채롭게 개최된다.
인제군 문화재 담당 윤형준씨는 “생가터 복원을 위한 자료조사를 마치고 산촌박물관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2006년까지 생가터에 15억원을 들여 상징물과 동상, 시비 이전사업을 펼쳐 문학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후략).” 시인이 남긴 시 가운데 ‘세월이 가면’도 지금까지 세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애송되고 있다.
인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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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시세계에 대하여/ 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 교수 )
한국의 근대 시사 가운데서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1960년의 4.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덜 논의된 부분에 속한다. 그 이전의 시, 즉 20년대에 나온 시나 30년대에 나온 시들은 학계와 비평계 양쪽에서 거듭거듭 다루어졌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앤솔러지도 심심찮게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시인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 그리고 4.19 이후의 시들 역시,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20년대 혹은 30년대의 시와 다를 바 없다. 이 시기의 시들은 아직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비평계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아 왔다는 점, 그리고 신작시집이나 시선집의 형태로 일반 독자들에게 거듭거듭 소개되어왔다는 점으로 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친숙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해방에서 4.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과 김수영, 김 춘수, 신 동엽 등 몇몇 <스타 시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의 시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 의해서나 일반 대중에 의해서나 거의 외면되어 오다시피 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많은 시와 시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흘러 다니는 사태가 빚어지게 되었다. 왜 이 모양이 되고 말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 해방에서 4.19에 이르는 시기 자체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소 모호한 위치에 놓인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보수적인 학계의 시각에서 보면,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가깝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런가 하면, 비평계나 일반 독자층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멀기 때문에 동시대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또 너무 멀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 이 시대의 시는 놓여 있는 셈이다.
둘째,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이나 해방 이후에 등단했다 하더라도 예외적인 위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몇몇 시인들(여기에는 앞서 이름을 들었던 김 수영, 김 춘수, 신 동엽뿐 아니라 그 밖에도 몇 명이 더 추가되어야 마땅하다)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에 나온 시작품들은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을 결여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하필 그 시대에 재주 없는 사람들이 시단으로 많이 몰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 활동한 시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까닭에 우리말을 다루는 데는 지극히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체로 성년의 문턱으로 접어들거나 청년기를 끝내갈 무렵에 4.19의 대지진을 만나 심각한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바로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셋째, 아무리 위에서 말한 시기상의 모호성과 이 시대 시 자체의 매력 없음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역시 완전히 빼놓을 수는 없는 또 한 가지 원인으로서, 우리 시대 비평가들의 지나친 편식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이유란 학계와 일반 독자층을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만 비평계를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동시대적인 관심을 촉발하지 않더라도, 또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일단은 성실하게, 폭넓게 읽고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는 것이 비평가의 직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시기에 활동한 시인들 중 해방 전에 등단한 사람들과 김 수영, 김 춘수, 신 동엽 등 소수만을 주목하고 나머지는 내몰라라 방치해온 대다수 비평가들의 자세는 결코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나는 해방에서부터 4.19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시가 다른 시기의 우리 시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밖에 모아오지 못했으며, 그 결과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부유하는 사태가 현출되었음을 말하고 그렇게 된 이유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본 셈이거니와, 박 인환(1926-56)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예증해주는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그와 같은 판단이 가능하다.
첫째, 박 인환이 시작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거리]라는 작품을 {국제신보}에 발표하여 데뷔한 1946년 12월부터 [죽은 아포롱]을 발표한 1956년 3월까지에 걸쳐 있으며, [죽은 아포롱]이 발표된 지 3일 후에는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거니와, 이로써 볼 때 그의 시적 생애 전체가 해방에서 4.19까지에 이르는 시기 안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즉, 그는 이 시기를 떠나서는 전혀 논의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둘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지금껏 전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특히 일관된 프로그램에 근거하여 다수의 시인론을 기획, 청탁, 수록한 논문집 혹은 평론집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언급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고 순전히 그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자발적 관심에 기초하여 논문이나 평론이 씌어진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셋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이처럼 희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에 대한 가십 차원의 풍문은 대단히 풍부하고 또 화려한 편이다. 박 인환은 아마 이 점에 있어서는 1950년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1.2위를 다투는 존재일 것이다. 마리서사 시절의 낭만과 관련된 풍문들, 후반기 동인회를 둘러싼 얘기들, 환도 후 감상적 실존주의와 폐허의식의 물결에 휩싸인 명동을 누비고 다닌 이른바 명동백작 시절의 에피소드들, 박 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인 작품 [세월이 가면]에 얽힌 얘기들, 영화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얘기들, 그리고 그의 불행한 요절에 관련된 얘기들, 이런 풍문 차원의 얘기들이 그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정작 그의 시작품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인 것이다.
넷째, 그가 남긴 시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에는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내가 <전부>라 하지 않고 <대부분>이라한 것은, 예컨대 [木馬와 淑女] 같은 예외적 존재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木馬와 淑女]는 전문적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일반 독자들로부터는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은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존재이다. [木馬와 淑女]나 이진섭에 의해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세월이 가면] 정도를 제외하면, 박 인환의 시 가운데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다섯째, 박 인환이 이처럼 상당히 한정된 수준의 성과밖에 남기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일부로서 우리는 그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에 속하며 또한 청년기에 4.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가 일본어로 교육받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 있는 우리말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은 사실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가 청년기에 4.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세계를 침착하게,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애쓰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고 추상적인 울분과 센티멘털리즘으로 시종했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 역시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다섯 가지 항목을 잘 음미해보면, 박 인환이야말로 해방에서 4.19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우리 시의 전개과정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전형성에 도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앞으로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질 경우, 어쩌면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며, 그때에는 지금 내가 박인환에게 붙인 전형성의 패찰을 도로 떼어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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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金洙暎 1921∼1968],시인
▶ 작품 활동
-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
- 1949년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 모더니스트로 각광 받음.
- 1950년대 :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
대표작 : <헬리콥터>, <폭포>, <눈>등. 1959년 그간의
발표작을 모은 시집 <달나라의 장난> 간행 및 제1회 시협(詩協)상 수상
- 4.19혁명 :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푸른 하늘을> 등.
- 5.16 이후 :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 그 외 <시여,침을 뱉어라>등
- 사후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몇 권의 시선집과 산문집 발행.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 됨.
▶ 대표작
달나라의 장난 / 푸른 하늘을 / 풀 / 눈 / 사령(死靈) / 폭포(瀑布) / 꽃잎(ㅡ) / 꽃잎(二)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헬리콥터 / 그 방을 생각하며 / 敵 1 / 六法全書와 革命 / 敵 2
1950년대 말, 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 원고료, 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과 함께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세,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 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도시 소시민의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그때까지 한국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아들로태어난다. 김수영네 집안은 본디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부상(富商)들로 이루어진 중인들의 주거지인 관철동에 있었다. 무반(武班) 계급에 속한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철원. 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치고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인 "묘정(廟廷)의 노래"는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趙芝薰流)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北院)훈련소에 배치된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美八軍) 수송관의 통역,선린상고 영어 교사,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4월 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한결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 소설가 최인훈, 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있다. 4월 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또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시의 뉴프론티어")라고 선언한 바도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사랑과 평화,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광화국!/ 너는 나의 적이다/ 나는 오늘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 군사쿠테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스스로 혁명의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1968년 4월 13일, 김수영은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 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이병주,이 딜레탕트야"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 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 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갈색 옷을 입고 있던 김수영은 "퍽!"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밤 11시 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1969년 사후 1주기에 맞춰 그의 무덤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지는데, 이 시비에는"풀"이 육필(肉筆)로 새겨진다.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높이 평가를 받고 유명해진 시인이다. 그가 죽은 뒤 민음사에서는 1974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5년 산문집 "시여,침을 뱉어라",1976년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년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을 잇달아 펴낸다. 이후에도 지식산업사, 창작과비평사, 열음사, 미래사 같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시선집을 내놓았다.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시인이다. 그는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 시인이며 4월 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 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 비사(秘史) ▣
≪ 마리서사 그리고 김수영과 박인환 ≫
해방을 맞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뒷날 월북한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스무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한다. 얼마 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여는데,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던 헌 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船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게 정확한 것인지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인데,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김광균(金光均), 이봉구, 김기림(金起林), 오장환, 장만영(張萬榮), 정지용(鄭芝溶), 김광주 등 시인 소설가들, "신시론(新詩論)" 동인 김수영(金洙暎), 양병식(梁秉植), 김병욱(金秉旭), 김경린(金璟麟)등, 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동인들, 화가 최재덕, 길영주 등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이었다.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과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도시(都市)와 시민(市民)들의 합창(合唱)"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수영은 서구적인 것에 경도된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부치며 경멸하고, 박인환은 또 그대로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현실의 장벽을 향해 던지는 칼빛 언어, 자유의지
김수영은 '자유'의 시인이다. 그는 돌에서 피를 뽑아 낼 정도의 치열한 자유의지로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역사와 삶의 생채기를 온몸으로 껴안은 시인이다. 따라서 자유란 테마는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끈질긴 탐구의 대상을 이룬다. 이런 자유의 정신으로 벼려진 칼빛 언어에는 시적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김수영의 혹독한 자기 수련(修鍊)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코 현실의 장벽에 굴복하지 않는 도저한 자유의지는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로 그려지곤 한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바뀌어진 지평선'). 삶의 자유로운 비상을 억압하는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돌, 무엇을 치어 받으려고 그토록 가열하게 날아가는가. 세상에 배를 밀착하고 날아가는 강인한 정신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그가 말하는 자유란 현실의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어는 '초월(超越)'의 희열이 아니다. 현실의 아픔과 상처, 갈등과 고통 위를 온몸으로 밀며 나가는 기어넘기, 즉 '포월(匍越)'이자 그 생채기를 안고넘는 '포월(抱越)'의 산고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자유, 그 반역의 정신은 좌절의 쓴맛과 직결된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자유//―비애"('헬리콥터'). 헬리콥터는 곤고한 지상과 결별하며 이륙할 수 있는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이나, 종래에는 어딘가 착륙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비애가 병존한다. 이런 시적 모반의 정신이 극단에 이르면 그의 시는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며 혁명을 꿈꾼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반항의 정신이 돛을 올리는 순간이다. 4·19 혁명 직전에 발표한 '하……그림자가 없다'와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가 그 대표적인 시라 하겠다. 그의 이러한 문학 정신은 소위 말하는 '반시론(反詩論)'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전복을 꿈꾸는 모든 전위 문학은 긍정이 아닌 부정의 정신을 근간으로 해야만 한다는 그의 헌걸찬 주장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여! 일상의 안일과 나태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그대들이여! 지금 어떤 모반의 전략을 꿈꾸고 있는가? 도대체 꿈꿀 수 있기는 한가? 류신(문학평론가)
김수영론
1. 해방 이전의 모더니즘 시는 비록 일제에 의해 추진된 것이긴 해도 도시화에 따른 식민지 擬似文明과 밀접한 상관 관계에 놓인다.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 합리주의 정신과 그 정신이 낳은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초래한 문명사의 한 단계로서의 모더니티, 즉 부르주아 모더니티에 대한 철저한 거부 및 부정적 열정과 ‘근대생활’의 일상성이 지니고 있는 천박함과 진부함을 비난하는 미적 모더니티에 대한 탐구가 모더니즘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부인하는 갱신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한국 모더니즘 시의 대세를 이루어 온 듯이 보이는 김기림·김광균 등에서 ‘後半紀’ 동인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대개 한국 문학의 전통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로 이루어져 왔으며, 기능주의나 우연성의 미학이라는 바탕 위에서 실험적인 편향으로 나아가게 됨으로써 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정신에서 멀어져, 세속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되 예술의 영원성, 심원성, 고매성을 缺失하는 세속 추수주의 경향을 보여 왔다. 李箱이나 ‘삼사문학’에서 조향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예외는 아니다. 이에 비해 정지용에서 윤동주를 거쳐 김현승, 김수영에게로 이어지는 흐름은 그러한 세속화 경향을 거부하는 反俗정신을 바탕으로 역사와 시대에, 그리고 現實想에 민감했던 서구 모더니즘의 본령을 배워낸 한국 모더니즘의 한 특수상을 이룬다.
초기의 김수영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래 김수영은 박인환에 대해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나1) 한편으론 그의 모더니즘을 불신하고 있었다. 이 사화집에 실린 두편의 시 ―’그만둘까 하다가 겨우 두 편을 그것도 히야까시적인 내용의 작품을 히야까시쪼로 내준’―-중의 하나인 「孔子의 生活難」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가 김경린·박인환류의 모더니즘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事物의 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孔子의 生活難」 전문
다소 난해의 포즈를 지닌 이 작품은 「아메리칸 타임誌」와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싣기 위해 ‘급작스럽게 粗製濫造한 히야까시 같은 작품’이어서 자신의 마음의 목록으로부터 깨끗이 지워버린 것2)이라 시인 스스로가 말하고 있으나 초기의 그의 시작태도와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의 발화 대상은 예술가 그룹의 圈內에 한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직 ‘동무’, 즉 ‘너’를 향한 것이다.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作亂을 치고 있다. 즉 꽃과 열매를 가진 것처럼 생각된 문화와 그 향수층(교양주의자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본질에 대한 탐구 대신 국수를 마카로니라고 부르는 作亂만을 일삼는다. 그 동무들은 나로 하여금 행동양식을 결심하게 한다. 그 동무들은 다름 아닌 ‘마리서사’의 동무들이며 이 작품은 철저히 그들을 염두에 두고 그것만을 의식하고 씌어진 것3)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사물을 ‘바로 보겠다’는 의지를 천명한다. 사물의 생리, 수량, 한도, 우매성과 명석성을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논어』의 ‘朝楣夕死可矣’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훗날의 김수영의 구도적 자세가 벌써 그 싹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로 본다는 것은 도식적이고 관습적인 대상 인식을 깨뜨리고 그 나름으로 본다. 즉 상식에 대한 반란성4)을 가리킨다. 그는 모더니즘을 하나의 문학적 조류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한 정신의 태도로 받아들인다. 사실 ‘바로 본다’는 것은 모든 예술행위의 의 근본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동무들의 포즈는 하나의 ‘코스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보기’가 아니며 한 마디로 가짜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작품을 ‘나’가 ‘너’가 주도하는 사화집에 내어준다. 이것이 곧 ‘히야까시적인 내용의 작품을 히야까시쪼로 내준 것’의 참의미이며, 따라서 이 작품은 김수영의 자긍심 회복 선언일 뿐이다.5)
이 시에서 孔子란 예술가의 양심을 지닌 채 세상의 허위를 꿰뚫어 보는 자,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의미하며 국수와 본질상 하나인 것을 바로 보지 못한 채 그저 ‘마카로니’의 그럴 듯한 외피(코스츔)만 걸치고 기계적 自動化에 안주하는 사이비 모더니티를 비난하고 있는 이 시는 그러한 모더니즘에 안주하고 있는 ‘동무’들, 즉 사물의 생리조차 바로 보지 못한 가짜들인 ‘너’에 대해 ‘바로 보기’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허위를 바로 본다는 것은 허무를 낳을 뿐이며 그 허무는 필경 죽음을 요구한다. 적어도 세속적 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 사물의 생리를 바로 본 예술가의 양심이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시기의 김수영의 시작동기는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적 관심의 실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미지스트로서의 문화적 감성의 표현으로 구현된다.6)
2. 부박한 당대 모더니즘의 교양주의와 ‘기교’에 반발하면서 윤리적 실존의 문제에 고심했던 김수영에 의해 한국의 모더니즘은 새로운 차원의 변증법적인 자기 지양이 이루어진다. 김수영은 비록 당대 모더니즘에 동행하기는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그로부터의 은밀한 탈출의 욕망을 지녔던 것으로, 한국 모더니즘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발표한 「공자의 생활난」에서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事物의 數量과 限度와/事物의 愚昧와 事物의 明晳性을’ 바로 보겠다는,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는 비장한 시적 발언에서 이후 일관된 그의 시적 태도의 바탕을 본 바 있다. 이는 그가 모더니즘을 한갓 기교나 재치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하나의 정신으로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보다 본질적인 모더니즘의 실천을 가능케 했다는 데 시사적 의미가 있다.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事物의 明晳性을 바로 보겠다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근대적 정신의 기축으로서의 분석주의적 태도와 주체 중심적인 대상 관조주의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7)이다. 전쟁 동안의 끔찍한 그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더욱 더 뼈저린 자기반성적 윤리적 태도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포로로서의 정신적 外傷은 그의 시적 자긍심과 자의식을 여지없이 망가뜨렸다. 전후 시기 일정기간 그는 과잉된 자의식의 폐쇄적 세계에 칩거케 하기도 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한 치열한 자의식과의 투쟁은 5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생활세계 전반으로의 시적 대상성의 지평 확대 노력을 보여준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역사의식으로서의 자기의식의 심화를 부단히 추구하는 자세를 보여주어 이후 그의 시의 비약적인 발전의 예후를 확실히 보여주기에 이른다. 『평화에의 증언』의 작품 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 올 때마다 나는 疲困과 倦怠에 지쳐서 허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友情이며 現代의 情緖며 그런것들이 後日의 나의 노-트에 담겨져 詩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詩는 너무나 不遇한 메타포어의 斷片들에 不過하다. 우리에게 정말 그리운 건 平和이고 온世界의 하늘과 港口마다 平和의 나팔소리가 빛나올 날을 가슴조리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오늘과 來日을 위하여 詩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구어 줄것인가.8)
김수영은 현실에 대한 갈증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그는 소시민의 무기력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을 통해 파악되는 현실을 그리고자 애쓴다. 물론 「병풍」같은 시에서는 이미지스트 정지용의 경우처럼 어떤 대상에 무관심한 병풍을 통해 변화해가는 현대사회 인간의 모습을 비교적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절제된 시선으로 일상적인 삶의 굴레에서 겪는 관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모더니스트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그러나 김수영은 현대성의 발견이라는 모더니즘의 세계에만 안주하지 않는다. ‘온世界의 하늘과 港口마다 平和의 나팔소리가 빛나올 날’을 기다리는 그에게 단순히 ‘現代의 情緖’만을 노래한다는 것은 ‘不遇한 메타포어의 斷片에 不過’할 뿐이다.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目標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주검보다도 嚴肅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玲瓏하게
나는 오늘부터 地理敎師모양으로 壁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老衰한 宣敎師모양으로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만한 정도의 强靭性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目標는 劇場 議會 機械의 齒車 船舶의 索具 等을 詛呪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간 자죽우에 서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都會의 詐欺師뿐이 아니겠느냐
―「玲瓏한 目標」 부분
묶여있는 삶의 한계 너머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 김수영의 시는 출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 안주란 있을 수 없다. 그는 ‘地理敎師모양으로 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의 ‘거리’로 나선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보려는 시각,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모더니즘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그 거리엔 온통 ‘개’와 ‘사기사’들 뿐이지만 ‘영롱한 목표’를 가진 시인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는다.그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 움직이는 삶의 현장을 ‘흘겨보지 않’고 ‘默然히 默然히/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9)이라고 말한다.
전쟁과 포로수용소 체험으로 인해 훼손된 자의식으로부터 서서히 회복한 시인은 이제 비슷한 시기의 「눈」과 더불어 곧은 소리로써 불의와 부조리가 팽배해 있는 속물주의의 현실에 대해 외치는 준열한 사색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瀑布는 곧은 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向하여 떨어진다는 意味도 없이
季節과 晝夜를 가리지 않고
高邁한 精神처럼 쉴사이 없이 떨어진다.
金盞花도 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醉할 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懶怠와 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幅도 없이
떨어진다.
―「瀑布」 전문
「풍뎅이」, 「거미」, 「헬리콥터」, 「꽃」 등에서 전후의 실존적 내면풍경을 투사시키며 훼손된 자의식의 복구에 주력했던 이 시인이 마침내 곧은 소리의 연대를 폭포처럼 갈망하는 시인으로서의 기개와 대 현실 자세의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어내고 있는 위의 시에서 우리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듣게 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그의 외침에 화답이나 하듯이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한다.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가지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아우성을 대변하는 시인들--박봉우, 신동엽이 그들이다.10)
이미 모더니즘의 비판적 계승으로서의 참여시는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3.전후의 모더니스트 시인들이 대부분 해방기에 보여주던 현실대응의 역동성을 상실하고 정통 리얼리즘 문인들의 대거 월북에 따른 리얼리즘 문학의 내적 소멸이라는 공백 속에서 현실인식이 결여된 내적 세계 속으로의 침잠을 통해 고통스런 집단적 체험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개인적이고 고립적·폐쇄적인 세계 속에서 도피적인 꿈꾸기를 지향함으로써 탈현실적 언어의 양상들을 보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참여가 부르주아적 심리주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50년대를 통해 김수영의 시는 전후의 시대상황이 시인에게 부과한 이러한 현실의 외부성과 단절성을 철저히 폐쇄된 자아의 내면의식 속에 수용하여 자신의 사회적 실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일관한 모습을 보여준다.11)
이는 그의 치열한 실존적 사유의 경험에서 기인하며,그것을 통해 현실의 모순과 부르주아적 타락의 현실 비판이라는 의미적 실천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현승의 평가처럼 그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영상적 수법에 능한 시인이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잇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靈魂과 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 전문
이 시의 중심이미지는 눈과 기침과 가래침이다. 물론 그것은 작자의 해석이 가해진 관념적인 사물이다. 마지막 연에서의 '눈'과 '가래침'의 이미지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현실에의 분노와 순결한 동경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토속적 언어의 우리를 과감히 박차고 나와 지식인들이 늘상 사용하는 문화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여기서 문화어란 한국사회의 과학화와 지적 성장에 따라 관념어와 기술어가 뒤섞인 언어12)로 우리 일상용어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언어를 지칭한다. 김수영은 아직 이 문화어에 대한 훈련이 부족한 국민들로 하여금 문화어를 보다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할 수가 있다.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각도의 발견’이라고 인식한 김수영은 누구보다도 모더니즘의 본질에 접근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는 시대정신이라 할 모더니즘의 본질적 정신에 충실했던 시인으로서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火焰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육체로써--추구할 것이지 시가--기술면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다’13)라고 뚜렷이 인식한 진정한 의미의 모더니스트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언제나 ‘시는 영원히 낡은 것’이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염무웅의 평가처럼 우리의 모더니즘은 새로운 인식과 실천이 빈약한 상태에서 서구적 현대 문예이론의 학습을 통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어떤 예술적 세련에 의해서도 상쇄될 수 없는 자기상실을 낳았으며, 김수영은 바로 모더니즘의 내용없는 형식주의에 건강한 사회의식을 결합시키고자 한 인물이었으며, 모더니즘을 철저히 실천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을 완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을 터 놓은 시인이었다.14)
주
1)김수영이 1945년 『예술부락』에 발표한 「廟庭의 노래」가 당시 ‘茉莉書肆’에 드나들던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묵살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박인환으로부터도 ‘낡았다’는 평을 들었던 것 같고 김수영은 이를 수모로 여김. 황동규 편, 『김수영전집·2 散文』(민음사,1981), 227면.
2)황동규 편, 앞의 책, 228면.
3)정재찬, 「김수영론-허무주의와 그 극복」, 『1960년대 문학연구』(예하,1993,173면.
4)김현,「자유와 꿈」,황동규 편,『김수영의 문학』,민음사,1983,106면
5)정재찬, 앞의 글, 175∼176면.
6)같이 수록된 「아메리카 타임誌」와 더불어 해방 후 물밀듯이 밀려든 미국 GI문화의 한 자락인 동시에 현대자본주의 문화의 축소판이며 변화하는 현실의 가장 진보적인 국면에 설 수 있도록 해 주는 지적 매체라 할 미국잡지에의 접근을 노래한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47) 등에서 볼 때 그것(서구문화)은 가까이 하고 싶으면서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박윤우, 「전후 현대시의 상황과 김수영 문학의 논리」, 『한국전후문학의 형성과 전개』(태학사,1993),143면.
7)한형구,「1950년대의 한국시」,『1950년대 문학 연구』(예하,1991),95면.
8)김종문 외, 『평화에의 증언』(삼중당, 1957), 111면.
9)김수영, 「여름뜰」, 『전집1-시집』(민음사,1981), 90-91면.
10)윤여탁, 「1950년대 한국 시단의 형성과 참여시의 잉태」, 『한국전후문학의 형성과 전개』(태학사,1993), 131면.
11)박윤우, 앞의 글, 147면.
12)김현승, [김수영의 시사적 위치와 업적], 황동규 편, 앞의 책, 67면.
13)김수영, 「모더니티의 문제」, 『퓨리턴의 초상』(민음사, 1976), 122면.
14)염무웅, 「김수영론」, 『김수영의 문학』(민음사, 183), 139-165면.
시대를 넘어 자라나는 '거대한 뿌리'(한겨레6/3) / 최재봉
오는 16일은 시인 김수영(1921~68)이 세상을 뜬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1968년 6월15일 문단의 지인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술을 마신 김수영은 자정 가까운 시각에 서울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 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졌다가 다음날 오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절창인 `풀'을 쓴 뒤로부터 불과 보름여 만의 일이었다.
김수영은 모더니즘에서 현실 참여 쪽으로 나아온 시인이다. 아니 ,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김수영의 모더니즘은 처음부터 현실에 뿌리박은 것이었고, 그의 참여시는 끝끝내 모더니즘적 기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가령, 대표적인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초기시 `공자의 생활난'에서 그가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이라 말했을 때, 거기에는 이미 현실에 대한 첨예한 관심과 참여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뿌리'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같은 후기시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모더니즘적 틀에 담아 노래한 시들로 볼 수 있다.
시인으로서 김수영의 출발은 물론 모더니즘이었다. 그러나, 생활에 대한 관심과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분노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지향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술만 먹으면 이승만과 자유당을 욕하고 인민군 노래도 목청껏 부르던 그가 4·19에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들은 직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 자'를 필두로 그는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 `가다오 나가다오'와 같은 `4·19 시'들을 정열적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열화와 같은 혁명의 시편들 끝에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써야 했던 시인의 심사는 착잡한 것이었으리라.
다시 그러나, 현실의 4·19는 좌절했어도 김수영에게는 그것이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횃불로 남아 있었다. 특히 그는 4·19를 계기로 해서 전통과 민중에 대한 재발견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대표시 중 하나인 `거대한 뿌리'에서 그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단언할 때, 그것은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서시')는 구절 과 함께 이전의 모더니즘에 대한 나름의 반성으로 읽힌다. 그것은 또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의 민중 찬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수영은 시인 못지 않게 평론가로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특히 이어령씨를 상대로 한 이른바 순수·참여 논쟁에서 그가 내놓은 전위문학론과 온몸의 시학은 그 빛나는 시적 직관으로 하여 두고두고 인용되는 것들이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지식인 의 사회 참여');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의 급작스러운 사고사는 사후의 명성으로 보상받았다. 70 년대 들어 일기 시작한 김수영 붐은 그의 전집과 평전이 간행되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된 80년대 초에 절정에 이른다. 모더니즘과 참여시의 양 계파가 각각 김수영의 적자를 자임하며 다투는 기이한 현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그 열기는 다소 식어들었다. 참여시 쪽에서는 노동시를 비롯한 민중시의 구호주의 내지는 내용지상주의가 득세를 했고, 다른 쪽에서는 해체시로 대표되는 형식(파괴)지상주의가 첨단으로 치달아 갔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행해지는 지금이 야말로 김수영을 올바르게 재평가할 기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의 30주기에 즈음해 문학 계간지 여름호들은 다투어 특집 논문을 싣고 그의 문학적 유산을 돌이키고 있다. <세계의 문학>은 김상환씨의 논문 `김수영의 역사 존재론―교량술로서의 작시에 대하여'를, <실천문학>은 유중하씨의 `달나라에 내리는 눈'을, 그리고 <문학과 의식>은 최동호씨의 `김수영의 시적 변증법과 전통의 뿌리'를 각각 실었다. 이 가운데 김상환씨의 글은 김수영과 그의 시가 전근대와 근대, 주지주의와 감성주의, 근대와 탈근대를 잇는 다리와도 같았다는 주장으로 눈길을 끈다.
최재봉 기자
다채로운 레파토리 - 유종호
김수영처럼 노래하는 소재가 광범위한 시인도 드물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소재를 붙잡아다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노래한다. 시집『달나라의 장난』 속에 수록되어 있는 40편을 보더라도 그 레파토리는 굉장히 다채롭다. 「달밤」「눈」과 같은 소박한 심경토로가 있는가 하면 「자」「봄밤」「예지」「광야」와 같은 우아한 반속적 에피그람이 세계가 있다. 「달나라의 장난」「생활」과 같은 자조적인 생활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헬리콥터」「백의」등 寓意의 세계가 있다.
「자장가」「체소밭 가에서」와 같은 동심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엉뚱하게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국립도서관」「아버지의 사진」과 같은 세계가 있다. 이렇게 분류를 하다 보면 한량이 없다.
그 다채로운 레파토리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굳이 한정해 본다면 도시인의 생활의 페이소스다. 그는 결코 슬픈 표정을 내세우려 하지는 않지만 또 감상-----여기서의 감상이란 부여된 상황에 대한 과도한 감정적 반응이란 의미로 쓴다-----은 본래 타기하는 터이지만 시편 곳곳에는 의외로 허탈한 페이소스가 빈번히 흐르고 있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달나라의 장난」
그러나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구태여 달과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모독당한 과거일까
약탈된 소유권일까
그대들 어린 학도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연령의 넘지못할 차이일까...... -----「국립도서관」
이러한 생활인의 페이소스 곁에 공존하고 있는 것은 퓨리턴한-----어떤 경우엔 동심적이기까지 하다-----反俗정신이다. 이 반속정신은 우아한 에피그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화의 전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조적 분노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예리한 사회비판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작품 소재이 레파토리가 다채로운 것처럼 그의 언어구사도 다채롭다. 대체로 시인이 시어는 그의 작품세계에 따라서 한정되고 이에 따라 '입버릇'이 생기기 마련인데 수영에게는 그러한 자체 한정이 없다. 저널리즘이 언어가 흔히 광범위하게 동원되지만 그의 반속정신은 이러한 언어에서 속기(俗氣)를 말끔히 씻어낸다.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동맥」
너무나 많은 나침반이여
밤이 산등성이를 넘어내리는 새벽이면
모기의 피처럼
시인이 쏟고 죽을 오욕의 역사 -----「광야」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봄밤」
이러한 기발한 이미지가 직유 그리고 화술의 묘기 바로 옆에는 다음 구절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회화체의 구절이 묘기를 발산하고 있다.
언어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리배」
그는 '자연이 하라는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대로 느끼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섹스의 待望(대망)을 노래한 「사치」속에 적어 놓지만 일견 무방법의 방법 같은 그의 시학이 비밀은 이 구절 속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영의 시에 완벽에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가 이렇게 '자연'에 붓을 의탁하는 데서 오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이 일종의 루우즈한 시풍은 '하.......그림자가 없다'의 마지막 스탠자가 나타내고 있듯이 독특한 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는 수영의 시는 가끔 가다가 매력적인 멜로디가 있는 얼마간 지루한 음악과 같다. 그러나 설령 여타의 부분이 아무리 지루한 것이라 할지라도 간간히 삽입되어 있는 매력적인 멜로디는 그것을 상살(相殺)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수영의 문학』30~32쪽 , 유종호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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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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