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嘉善大夫刑曹參判
贈諡義愍平康全公有亨之墓
配 贈貞敬夫人仁同張氏 合祔
[개관: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忠淸北道 槐山郡 沼壽面 沼岩里)에 자리한 전유형묘소에 있는 전유형묘갈(全有亨墓碣)이다. 1706년(숙종 32)에 제작된 이 묘갈의 묘갈문은 이재(李宰)가 지은것이며, 서자(書者)는 판독이 불가능하여 알수 없는 상태이다.
전유형(1566~1624)은 괴산(槐山)의 유생(儒生)으로 임진왜란 때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듬해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책략 10여조를 올려 선조의 칭찬을 받고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에 임명되었다. 1605년(선조 38)에 40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발탁되었으나 전란 중에 부모의 상을 의례(儀禮)에 맞게 치르지 못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기용되어 함흥판관(咸興判官), 광주목사(廣州牧使)와 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의술(醫術)에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데 참여했고, 「오장도(五臟圖)」를 그리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아 성철(成哲)등 37인과 함께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그 뒤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1742년(영조 18)에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묘갈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옮김.
----------------------------------------
도암집(陶菴集)
陶菴先生集卷三十八
墓表[一]
參判全公墓表
번역문
참판 전공 묘표〔參判全公墓表〕
임진년(1592, 선조25) 몹시 혼란스러운 때를 당하여 선묘(宣廟)께서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이 인재를 급히 구하면서 초조하고 고심하였는데, 전유형(田有亨) 공이 포의의 신분으로 초야에서 떨쳐 일어나서 위로 밝은 군주의 지우를 입었으니, 지금도 옛일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뜻이 계합하는 성대한 만남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애초부터 공은 식견과 사려가 심원하여 강개한 마음으로 시대를 걱정하였는데, 왜구가 아직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환난을 대비하는 경계를 미리 진언하였다. 조정에서는 한창 안일에 빠져 공의 진언을 귀담아 듣지 않다가 이듬해 난리가 일어나자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공은 중봉(重峰) 조헌(趙憲) 공과 함께 손을 잡고 통곡하며 격문(檄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마침 공이 부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또 적을 방어할 계책을 올리려고 생각했으나 결국 올리지는 못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 26), 충주(忠州) 의병장 박정란(朴廷蘭)이 행재소로 가서 상소를 올리고자 하면서 공에게 상소문을 대신 써줄 것을 부탁하니, 공이 이전에 써두었던 상소문을 보여 주자 박정란은 마침내 그것으로 바꾸어 올렸다. 성상께서 상소문을 보고 가상히 여겨 감탄하며 호서(湖西) 도신(道臣)에게 유지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필시 초야에 숨어 지내는 훌륭한 선비일 것이다. 내 장차 그를 기복출사(起復出仕)시킬 것이니 경은 극진한 예우로 서울로 전송하라.”
하였다. 공은 아직 부친을 장사 지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성상이 또 하교하기를,
“지금은 신하가 평상시의 도리를 지킬 때가 아니니,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 바로 효도하는 길이다.”
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도록 명하니, 공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사를 지낸 다음 대궐로 달려가 상례를 지킬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성상이 허락하지 않고 군자감 참봉에 제수하였는데 공이 또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성상이 특별히 불러서 마주하여 시무를 묻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내리되 공식(公食)에서 고기를 제외하였다.
성상이 말하기를,
“소반에 먹을 만한 채소가 있느니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천자도 필부와 벗하니, 나는 지금 그대와 벗일 뿐이다.”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물러나오니 밤은 사고(四鼓 사경(四更))를 지났다.
곧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발탁되었다. 사흘 뒤에 성상이 또 불러서 마주하여 조용히 묻기를,
“옛날 무너지고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한 신하 가운데서 누가 가장 으뜸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제갈량(諸葛亮)입니다.”
하였다. 성상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틀렸다. 사람을 알아봤다고 하자면, 마속(馬謖)은 용렬한 재주를 지녔는데도 제갈량이 그를 등용하였다. 병법을 잘 알았다고 하자면, 진창(陳倉)은 작은 성인데도 제갈량은 승리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가장 으뜸이란 말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요(堯) 임금의 밝음으로도 사흉(四凶)을 등용하였는데, 제갈량이 요 임금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병법을 몰랐다고 말한다면 신이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시 북쪽에는 조조(曹操)가 있고 남쪽에는 손권(孫權)이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비록 용병에 능했으나 협소한 익주(益州) 땅으로 어떻게 몇 년 사이에 수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창(陳倉)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일은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지 그의 재주가 모자랐던 탓이 아닙니다.”
하였다. 성상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전단(田單)은 즉묵(卽墨) 하나만 가지고 제(齊)나라의 70여 성을 수복하였는데, 그대는 익주를 작다고 하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즉묵은 비록 작은 곳이나 제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익주는 비록 큰 땅이나 한(漢)나라는 이미 망하였습니다. 망해가는 제나라를 회복하기는 쉽지만 이미 망한 한나라를 회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성상이 옳다고 여기고, 청안(淸安)의 공물을 견감하고 또 곡식을 옮겨 구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공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활과 화살,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이해 여름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또 기복출사하라고 명하였으니 당시 왜적의 경보가 다시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공이 장사를 지내고 다시 임지로 돌아간 다음 곧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조방(助防)의 임무가 중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은 끝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 상례를 마쳤다.
계묘년(1603, 선조36), 또 만언소를 올려 붕당(朋黨)의 폐해를 극론하고, 또 노추(奴酋 누르하치)가 조만간 침범할 것이니 응당 미리 대비할 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훗날 과연 하나하나 신기하게 징험되었다. 을사년(1605),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거상 중에 조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을 탄핵한 자가 있어 공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변론하였는데, 얼마 뒤에 특별히 서용되었다. 또 공을 저지하는 자가 있어 오랜 뒤에야 서용되었고, 얼마 뒤에 선묘가 승하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서는 낮은 벼슬을 전전하였는데, 내직으로는 성균관 전적, 예조ㆍ병조ㆍ형조 삼조(三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연서(延曙)ㆍ대동(大同) 찰방, 황주(黃州)ㆍ함흥(咸興)ㆍ안악(安岳)ㆍ안성(安城)ㆍ옹진(瓮津)ㆍ장연(長淵)ㆍ울산(蔚山)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황주를 다스린 것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정승의 추천 때문이었다. 치적이 제일 뛰어나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승지, 병조 참의,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가선대부에 올랐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아 전횡하였는데, 공이 자기 사위 신지익(申之益)을 대신시켜 상소를 올려 이이첨을 논핵하면서 괴리 영(槐里令)의 고사를 본받고자 하였다. 이이첨은 공이 사주했다고 말하면서 양사(兩司)로 하여금 합계하여 공을 반역자로 지목하고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게 하니,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은 결국 연좌되어 삭탈되었다. 이이첨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또 몰래 무뢰배를 보내어 공을 해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 때 공은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비변사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가을에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군량미가 고갈되었다고 문서를 보내어 임진년의 군량 산동미(山東米) 수만 섬을 요구하니, 공을 가도 문안사(椵島問安使)에 특별히 차임하였다. 공이 가도에 도착하여 문서를 올려 견감해 줄 것을 요청하니, 도독이 문서를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진(秦)나라 궁전의 뜰에서 통곡한 일과 가생(賈生 가의(賈誼))의 지극한 상소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
하고 결국 없던 일로 하였다. 공은 이어 순검사로서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의 성지(城池)를 순찰하고 조정에 돌아와 그 형편과 오랑캐를 방비할 상책(上策)ㆍ중책(中策)ㆍ하책(下策) 세 가지를 조목조목 아뢰었다.
갑자년(1624, 인조2), 이괄(李适)의 변란이 일어나자 흉도 이우(李佑) 등이 고(故) 정승 기자헌(奇自獻), 판서 유량(柳亮) 공 등 38명을 무고하였는데 공도 거기에 포함되어 함께 투옥되었다. 적이 갑작스레 쳐들어오자 대가(大駕)가 공주(公州)로 몽진하려고 했다. 판의금부사 김류(金瑬)가 투옥된 이들을 모두 죽여 내응(內應)하지 못하도록 청하였는데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공이 쟁론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은 마침내 정월 24일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모든 이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듬해 이귀 공이 공의 원통함을 아뢰어 곧 관작을 회복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은 키가 크고 머리털과 수염이 수려하였으며 외모가 헌걸차고 풍채가 빼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 책들을 두루 읽었으며 《주역》의 이치에 정밀하였다. 위로는 천문(天文)부터 아래로는 의약(醫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충효는 평소 함양한 것이었으니 남들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이 ‘충효’ 두 글자로 면려하였다. 선묘의 더없는 은혜를 입고서는 스스로 면려하는 글을 써서 문 위에 첩으로 붙여두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반성하여 말하기를,
“유형(有亨)이여, 유형이여. 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하였으니, 순국하겠다는 일념이 선혈처럼 빛났다.
혼조를 만나 낙척하여 불우하게 지내다가 성조(聖朝 인조)의 반정에 이르러 차츰 크게 쓰이고 있었는데 불행하게 뜻밖의 화에 걸려 원통함을 품고 지하에 묻혔다. 가령 수명이 연장되어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를 볼 수 있었다면 교만한 오랑캐의 창궐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원대한 포부가 만분의 일도 다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사방에 힘을 펼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또한 선왕의 밝은 지우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전씨(全氏)는 정선(旌善)에서 나왔다. 고려 말에 시중을 지낸 우화(遇和)가 있으며, 그 손자 빈(賓)이 본조의 간의대부를 지내고 공로가 있어 평강(平康)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그대로 본적으로 삼았다. 증조 휘 수산(壽山)은 104세까지 살아서 중종조에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고 품계가 올라 대호군이 되었다. 조부 휘 성로(誠老)는 현량과에 급제하고 조 정암(趙靜菴 조광조) 선생의 천거로 형조 정랑이 되었다. 부친 휘 인(絪)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종사랑 희철(希哲)의 따님으로 좌의정 허조(許稠)가 그 선조이다.
공의 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아들 익(𨦫)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딸은 참봉 신지익(申之益)에게 시집갔다. 재취 태원 안씨(太原安氏)는 부사 봉(鳳)의 딸로, 강(鋼), 감역 현(䥪) 두 아들을 두었다. 기수(起洙)ㆍ기렴(起濂)ㆍ중추부 도사 기한(起漢), 영안군(靈安君) 목(沐)과 현감 윤채(尹埰)에게 시집간 두 딸은 장남 익(𨦫)의 소생이다. 차남 강(鋼)은 외동딸을 두었는데 생원 장명(張溟)에게 시집갔다. 기연(起淵)ㆍ기징(起澄)ㆍ감찰 기제(起濟)ㆍ기문(起汶), 통덕랑 박안계(朴安繼)에 시집간 딸은 삼남 현(䥪)의 소생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자가 숙가(叔嘉)이고 호가 학송(鶴松)이니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에 태어났고 향년 59세이다. 괴산(槐山) 우암(牛巖)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이곳은 공이 살던 마을이다.
[주-D001] 참판 전공 묘표 : 저자가 전유형(全有亨, 1566~1624)을 위해 쓴 묘표이다.
[주-D002] 공식(公食) : 임금이 초빙한 신하에게 향응을 대접하는 것을 뜻한다.
[주-D003] 마속(馬謖) : 촉한(蜀漢)의 장수로, 제갈량과 절친한 마량(馬良)의 동생인데 제갈량에게 중용되었다.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祈山)을 공격할 적에 군량 보급로인 가정(街亭)의 수비를 자원하고 나섰다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무리한 작전을 편 나머지 크게 패하였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三國志 卷39 蜀書 馬謖傳》
[주-D004] 진창(陳倉) : 옹(壅)과 양(梁) 땅 사이의 요충(要衝)으로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공수(攻守)의 요지가 되었다.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제갈량이 수만 명의 군사로 진창을 포위하였으나 위나라의 장군 학소(郝昭)가 수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굳게 지켰기 때문에 20여 일 동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철군하였다. 《三國志 卷3 魏書 魏明帝》
[주-D005] 사흉(四凶) : 요순(堯舜) 시대에 있었던 악명 높은 네 부족의 수령들로서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말한다. 이들은 요(堯) 임금 말년에 나라의 중임을 맡고 잘 시행하지 못하므로, 순(舜) 임금이 정사를 보살피면서 공공을 유주(幽洲)에, 환도를 숭산(崇山)에, 삼묘를 삼위(三危)에 내쫓으며, 곤을 우산(羽山)에서 베었다. 《書經 舜典》
[주-D006] 전단(田單)은 …… 수복하였는데 : 전단은 연(燕)나라 장군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 즉묵(卽墨)에서 맞서 싸운 제나라 장군이다.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전단이 즉묵을 지켜내 연나라를 물리치고, 이 승세를 타고 삽시간에 빼앗겼던 제나라의 70여 성을 수복하여 거의 망해 가던 제나라를 재건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7] 괴리 영(槐里令)의 고사 : 임금이 물리쳐도 끝까지 버티고 간언한다는 일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괴리 영 주운(朱雲)이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를 참(斬)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제가 대노하여 주운을 죽이고자 하여 어사로 하여금 끌어 내리게 하니, 주운이 어전(御殿)의 난간을 붙잡고 버티고 서서 계속 간언하다가 난간이 부러져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D008] 진(秦)나라 …… 일 : 춘추 시대 오(吳)나라가 초(楚)나라를 침공하자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명을 받들고 진(秦)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진백(秦伯)이 곧바로 허락하지 않자 궁전의 뜰에 서서 7일 밤낮을 통곡한 끝에 마침내 구원병을 얻어내었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주-D009] 가생(賈生)의 지극한 상소 : 한(漢)나라 때 가의(賈誼)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文帝)에게 올린 〈치안책(治安策)〉을 가리킨다.
墓表[一]
參判全公墓表
원문
蓋當壬辰搶攘之際。 宣廟急才如渴。拊髀興思。全公有亨以布衣奮草萊。上結 明主之知。至今尙論者。謂契遇之盛。古亦罕有云。始公識慮沉遠。慷慨憂時。先倭寇未至。上萬言疏。預陳陰雨之戒。朝廷方恬嬉。聽之藐藐。翼年亂作。始服其先見。公與重峰趙公憲握手痛哭。草檄募義旅。會公丁父憂。公又思獻防禦之策。不果上。癸巳忠州義兵將朴廷蘭將赴 行在。欲上疏。要公代草。公示以前藁。朴遂以其疏替呈。上覽之嘉歎。降旨于湖西道臣曰。此必草野奇士之隱者。予將起復用之。卿其敦遣。公辭以父死未葬。又下敎曰此非臣子守常之時。勠力討賊。乃所以爲孝也。命給葬具。公感激涕泣。葬訖走闕下。懇乞守制。 上不許。除軍資監參奉。又疏辭。特賜對。問以時務。仍饋酒食。公食舍肉。 上曰盤中有素菜可食也。仍 下敎曰。天子友匹夫。予今與汝友耳。公惶恐退出。夜已四鼓矣。旋擢拜淸安縣監。越三日又賜對。從容問曰古之人臣。扶顚持危者。孰爲第一。對曰諸葛亮也。上曰汝言非也。謂之知人也則馬謖庸才而亮用之。謂之知兵也則陳倉小城而亮不勝。何爲第一。公曰以堯之明而用四凶。謂亮過於堯則不可。謂亮不知兵則臣有說焉。當是時。北有曹操。南有孫權。亮雖善用兵。益州褊小之地。安能收復於數年之間耶。至於陳倉之不克。以糧盡也。非才之罪也。 上曰不然。田單以一卽墨。復齊七十餘城。汝謂益州小乎。對曰卽墨雖小。齊猶在也。益州雖大。漢已亡也。復將亡之齊易。復已亡之漢難。 上然之。命蠲淸安貢賦。且移粟以救之。從公言也。賜弓箭臘藥。是夏丁母喪。又 命起復。時賊警復至。公過葬復還任。旋屢疏辭。該曹以助防任重不許。而公竟棄歸終制。癸卯又上萬言疏。盛論朋黨之弊。且言早晩奴酋入寇。宜預講備禦之圖。後果一一奇驗。乙巳魁庭試。除司僕寺主簿,司憲府監察。有以居喪不謹劾公者。公上疏自辨。尋特叙之。又有尼之者。久之乃叙。未幾 宣廟賓天。値昏朝。潦倒庶僚。內則成均館典籍。禮兵刑三曹郞。外則延曙大同察訪。黃州,咸興,安岳,安城,瓮津,長淵,蔚山。而其爲黃州則白沙漢陰相公擧之也。以治最陞通政。承旨,兵曹參議。廣州牧使。己未嘉善。時爾瞻柄國專恣。公代其婿申之益抗章論劾。願效槐里令故事。爾瞻謂公指嗾。令兩司合啓。目以反逆請拿鞫。光海不從。而公竟坐削奪。爾瞻甚恨公。又潛遣無賴欲害公不果。癸亥 仁祖反正。卽除公刑曹參判兼管籌司。秋都督毛文龍以軍資罄竭。移帖徵壬辰軍餉山東米十萬石。特差公椵島問安使。公至則呈文乞蠲減。都督讀之歎曰。秦庭痛哭。賈生至言。無以過此。卒以無事。公仍以巡檢使。審兩西城池。及還朝。條陳形便及防虜上中下三策。甲子适變。凶徒李佑等。誣告故相奇自獻,判書柳公亮等三十八人。公亦預焉。並繫獄。賊警猝急。 大駕將幸公州。判義禁金瑬請盡誅之。以杜內應。延平李公貴爭之不能得。公遂以正月廿四日被殺。人莫不寃之。翼年李公貴白公寃。卽 命復爵。公長身美鬚髥。狀貌奇偉。神采秀發。少博覽羣書。精於易理。上自乾象下至醫藥。靡不通曉。忠孝素所蓄積。與人言。必以是二字勉之。及蒙被 宣廟不世之恩。作自勉書。帖之門上。朝夕自省曰。有亨有亨。無忘 國恩。殉國一念。炯炯如血。遭罹不辰。落拓不遇。及至 聖朝改玉。駸駸大用。而不幸身嬰奇禍。抱寃泉壤。使假以年。得見丙子之難。驕虜猖獗。亦豈至此。惜乎。其大抱負。不能究其萬一也。然宣力四方。竭心國事。亦可謂不負 先王知遇之明也。全氏出旌善。麗末有侍中遇和。其孫賓仕我朝諫議大夫。有功食邑平康。因籍焉。曾祖諱壽山。壽百有四歲。 中宗朝參養老宴。陞階爲大護軍。祖諱誠老。賢良科。以趙靜菴先生薦爲刑曹正郞。考諱絪。進士隱德不仕。妣河陽許氏。從仕郞希哲之女。議政稠其先祖也。公配仁同張氏。一男𨦫進士。女適參奉申之益。再娶太原安氏。其考府使鳳。二男鋼,䥪監役。起洙,起濂,起漢中樞都事。二女靈安君沐,縣監尹埰長房出。二房一女歸生員張溟。起淵,起澄,起濟監察,起汶。女適通德郞朴安繼三房出。餘不能盡記。公字叔嘉號鶴松。生於 嘉靖丙寅。享年五十九。葬於槐山牛巖向午之原。卽公所居鄕云。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옮김.
--------------------
해석문 / 정홍자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행(行)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증시(贈諡) 의민(義愍) 평강(平康) 전공(全公) 유형(有亨)의 묘(墓)
임진년(선조 25, 1592년) 난리를 당하여 어지럽고 혼란하던 즈음에 선묘(宣廟)에서는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이 인재를 급히 구하였다. 이에 비분강개하여 전공(全公) 유형(有亨)이 평민의 신분으로 떨쳐 일어났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밝은 군주의 지혜를 모으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옛사람의 언행을 평하는 것을, 위아래의 뜻이 맞는 성대한 만남이라고 일컫는 것인데 예전에도 역시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애초부터 공은 식견과 사려가 심원하여 강개(慷慨)하게 시대를 걱정하였다. 앞서 왜구가 아직 쳐들어오지 않았을 때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미리 불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계를 진달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편안함과 즐거움에 젖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난리가 나자 비로소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공은 중봉(重峰) 조공(趙公) 헌(憲)과 더불어 손을 잡고 통곡하고 격문(檄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마침 공이 부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적을 방어할 계책을 생각해내 올렸으나 결국 위로 전달되지는 못하였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 충주(忠州) 의병장 박정란(朴廷蘭)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상소를 올리고자 하면서 공에게 상소문의 초안을 대신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공이 이전에 써 두었던 상소문을 보여 주자 박정란은 마침내 그것으로 바꾸어 상소를 올렸다. 상이 어람(御覽)하시고는 가상히 여기고 탄복하여 호서(湖西) 도신(道臣)에게 유지를 내려 이르기를, “이는 필시 초야에 묻혀 있는 기특한 선비일 것이다. 내 장차 그를 기복출사(起復出仕)할 것이니 경(卿)은 가서 돈유(敦諭)하라.” 하였다. 공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여 이르기를, “지금은 신자(臣子)가 평상시의 도리를 지켜야 할 때가 아니다.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 바로 효도하는 것이다.” 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 주도록 명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문 아래 엎드려 상제(喪制)를 지킬 수 있도록 간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군자감(軍資監) 참봉에 제수하였다. 공이 또 상소하여 사양하니 특별히 불러들여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시무(時務)를 물었다. 인하여 술과 음식을 내렸다. 공이 고기를 먹지 않자 상이 말하기를, “그릇 안에는 채소가 있으니 먹어도 되는 것들이다.”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천자도 필부와 벗을 하였다. 나는 지금 그대와 벗할 따름이다.”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물러나 나오니 밤이 이미 4고(四鼓)였다. 곧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발탁되었다. 사흘 뒤에 또 친히 불러 조용히 묻기를, “옛날의 신하로 국가를 위험에서 구해낸 자 가운데서 가장 으뜸인 자는 누구인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제갈량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잘못되었다. 사람을 알아본 것으로 말하면 마속(馬謖)은 용렬한 재주를 지녔을 뿐인데 제갈량이 그를 등용하였다. 병법을 아는 것으로 말하면 진창(陳倉)은 작은 성인데도 제갈량은 승리하지 못했으니 무엇이 으뜸이란 말인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요(堯) 임금의 밝음으로도 사흉(四凶)을 등용하였으니, 제갈량이 요 임금보다 낫다고는 할지언정 제갈량이 병법을 알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당시 북쪽에는 조조(曹操)가 있고 남쪽에는 손권(孫權)이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비록 용병을 잘하였으나 익주(益州)는 땅이 외지고 좁은데 어떻게 몇 년 사이에 나머지 땅을 수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군량이 넉넉지 않은 곳에 주둔하였다가 양식이 떨어진 것은 재주가 모자랐던 탓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전단(田單)은 즉묵(卽墨) 땅 하나만 가지고도 제(齊)나라의 70여 성을 수복하였다. 그대는 익주를 작다고 하는가?” 공이 대답하기를, “즉묵은 비록 작은 땅이나 제나라는 남아 있었습니다. 익주는 그에 비해 비록 크기는 하지만 한(漢)나라는 이미 망하였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제 나라를 부지(扶持)하기는 쉬우나, 이미 망한 한 나라를 수복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공의 의견을 그럴 법하게 여겨 청안현(淸安縣)에서 바칠 공물을 견감해 주었으며 포위된 적을 가엾게 여겨 곡식을 이송하여 그들을 구해 주었으니, 공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호전(號箭)과 엽약(獵藥)을 하사하였다. 이해 여름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또 기복출사(起復出仕)의 명이 내렸다. 당시 적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이르렀는데 공은 장사를 지내고 다시 임지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해조(該曹)에서 조방(助防)의 임무가 중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결국 돌아가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였다. 계묘년(선조 36, 1603년)에 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붕당(朋黨)의 폐해를 통렬히 논하였다. 또 노추(奴酋)가 조만간 도적떼가 되고 말 것이니 미리 대비하고 방어하는 계책을 강구할 것을 말하였는데 후에 과연 하나하나 신기하게도 들어맞았다.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하여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는데, 사헌부 감찰 중에 거상(居喪) 때에 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을 탄핵한 자가 있었다. 공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변론을 하여, 특별히 서용(敍用)되었다. --이하 몇 줄 해독 불능--
(又有尼之者。久之乃叙。未幾 宣廟賓天。値昏朝。潦倒庶僚。이 구절이 빠졌는데, [또 공을 저지하는 자가 있어 오랜 뒤에야 서용되었고, 얼마 뒤에 선묘가 승하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서는 낮은 벼슬을 전전하였는데, ] 뜻이다.)
안으로는 성균관 전적(典籍), 예조, 병조, 형조 등 삼조의 낭관(郎官)을 거쳤고, 밖으로는 대동찰방(大同察訪), 황주(黃州), 함흥(咸興), 안악(安岳), 안성(安城), 옹진(瓮津), 장연(長淵), 울산(蔚山)까지 다스렸다. 황주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다스렸던 곳으로 가장 잘 다스려졌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승지, 병조 참의,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기미년(광해군 11, 1619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는데 당시는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전횡(專橫)하고 있던 때였다. 공은 사위 신지익(申之益)을 대신하여 상소하여 이이첨을 논핵하고, 괴산 영(槐山令)에 제수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첨의 무리들이 공이 뒤에서 사주(使嗾)하였다고 지적하고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반역죄로 지목하고 체포하여 국문(鞠問)할 것을 청하였다. 광해(光海)가 들어주지 않았으나 공은 마침내 죄에 걸려들어 삭탈되었다. 이첨은 공을 심히 미워하여 몰래 무뢰배를 보내어 공을 해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계해년(인조 1,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공은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주사(籌司)를 겸직하게 되었다. 가을에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군량미가 떨어졌다고 하며 임진년에 갖다 쓴 산동미(山東米) 수만 석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공을 가도(椵島) 문안사(問安使)에 특별히 차임하였다. 공은 가도(椵島)에 이르러 문서를 보내 요구해 온 쌀을 견감(蠲減)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도독이 문서를 읽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임금에게 상소하여 천하에 통곡할 만한 것이 있다고 했던 가의(賈誼)의 말이 지극한 말이로다.” 하였다. 요구를 들어 줄 길이 없어 결국 일은 없던 것으로 되었다. 공은 곧 순검사(巡檢使)로서, 양서(兩西)의 성지(城池)를 순찰하고 조정에 돌아와 그 형편을 조목조목 아뢰고 오랑캐를 방어할 상책(上策), 중책(中策), 하책(下策), 세 가지를 진달하였다. 상이 좋게 여겨 받아들였다. 갑자년(인조 2, 1624년)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다. 흉악한 무리 이우(李佑) 등이 고(故) 상신(相臣) 기자헌(奇自獻), 판서 유공(柳公) 양(亮) 등 38명을 무고하였다. 공도 역시 이 가운데 포함되어 감옥에 갇혔다. 적이 급하게 쳐들어오자 대가(大駕)가 공주(公州)로 피신을 갔다. 판의금 김류(金瑬)가 감옥에 갇힌 이들이 이괄과 내통하였다 하여 모두 죽일 것을 청하였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공(李公) 귀(貴)가 만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은 마침내 1월 24일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당시에 사람들 치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을축년(인조 3, 1625년)에 연평 이공 귀(貴)가 공의 원통함을 아뢰어 신원(伸寃)되고 작위도 회복되었다. 공은 키가 크고 머리털이 아름답고 수염 모양이 특이하였으며 기상이 빼어나고 발랄하였다. 어려서 여러 책들을 널리 읽었는데 특히 역리(易理)에 정밀하였다. 위로는 건상(乾象)에서부터 아래로는 의약(醫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평소에 충효(忠孝)를 실천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때 반드시 이 두 글자로써 면려(勉勵)하였다. 선조(宣祖)의 크나큰 은혜를 입고서는 스스로 권면하는 글을 써서 문 위에 붙여 두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돌이켜 반성하여 말하기를, “유형(有亨)이여, 유형이여. 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하겠다는 한마음 밝히면 어려움을 당해도 이겨낼 수 있고 낙척(落拓)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니.” 하였다. 성조(聖朝)에 이르러 개혁을 단행함에 크게 쓰여졌으나 불행히도 기구한 무함을 받아 원한을 안고 지하에 묻혔으니, 가령 공이 몇 년을 더 살아 있어 병자년의 난리를 보았더라면 교만한 오랑캐들이 창궐(猖獗)하는 것을 어찌 그냥 보아 넘기기만 하였겠는가. 아아, 커다란 포부를 만에 하나도 써 보지 못한 것이 슬프도다. 그러나 사방을 애써 주선하며 국사를 보살핌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가히 선생이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전씨(全氏)는 정선(旌善)에서 배출되었다. 고려말에 시중(侍中)을 지낸 우화(遇和)가 있었는데 그 손자가 태종조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빈사(賓仕)를 하면서 공(功)이 있어서 평강(平康)을 식읍(食邑)으로 받게 된 데서 그곳에 적(籍)을 두게 된 것이다. 증조인 휘 수산(壽山)은 104세까지 살아서 중종조(中宗朝)에 양로연(養老宴)에 참여하고 품계가 올라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조부 휘 성(誠)은 현량과(賢良科)로 조정암(趙靜菴) 선생의 천거를 받아 형조 정랑이 되었다. 고(考) 휘 인(絪)은 음덕(蔭德)으로 진사가 되었는데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하양 허씨(河陽許氏)인데 종사랑(從仕郞) 희철(希哲)의 따님으로 의정(議政) 조(稠)가 그 선조(先祖)이다. 공의 배필은 인동 장씨(仁同張氏)인데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원문 몇 자 깨짐-- 은 생원이고 딸은 참봉 신지익(申之益)에게 시집갔다. 재취(再娶)는 태원 안씨(太原安氏)인데 부사(府使) 봉(鳳)의 따님으로 아들 둘을 낳았다. (이하 몇 행 문맥불통) 강습감역(鋼䥪監役) 기수(起洙), 기렴(起濂), 기한(起漢)은 중추도사(中樞都事)이다. 딸 둘은 영안군(靈安君) 이목(李沐), 현감 윤채(尹採)에게 각각 시집갔다. 장방(長房)은 나왔고 이방(二房)은 자식이 없다. 다만 딸 하나가 생원 장명(張溟)에게 시집갔다. 기연(起淵), 기징(起澄), 기순(起淳), 기제(起濟), 감찰 기문(起汶)이 있다. 딸은 통덕랑(通德郞) 박안계(朴安 繼)에게 시집갔다. 삼방(三房)은 나왔다. 공의 자(字)는 숙가(叔嘉)이고, 호는 학송(鶴松)이며, 병인년(명종 21, 1566년) 3월 4일에 몽촌(夢村)에서 태어났다. 향년 59세로 괴산(槐山)의 우암(牛岩)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공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配) 장씨(張氏)와 안씨(安氏)는 괴산의 왼쪽 북상면(北上面)에 있는, 군(郡)에서 15리 떨어진 몽촌(夢村)에 합장하였다. 우리 선자(先子) 학송(鶴松)의 증직(贈職)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성균관춘추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다. 증시(贈諡)는 의민(義愍) 사림(士林)이다. 괴산 화암서원(花岩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경연사 세자좌빈객 이재(李縡) 짓다.
판독문 / 정홍자
全有亨 墓碣 贈資憲大夫吏曹判書 行嘉喜大夫刑曹參判贈諡義愍 平康全公有亨之墓 盖當壬辰搶攘之際 宣廟急才如渴 拊髀與思 全公有亨 以布衣奮草萊 上結明主之知 至今尙論者 謂契遇之盛 古亦罕有云 始公識慮沉遠 慷慨憂時 先倭寇未至 上萬言䟽 預陳陰雨之戒 朝廷方恬嬉 聽之藐藐 翌年亂作 始服其先見 公與重峯趙公憲 握手痛哭 草檄募義旅 會公丁父憂 公又思獻防禦之策 不果上 癸巳忠州義兵將朴廷蘭 將赴行在欲上䟽要公代草 公示以前稿 朴逐以其疏替呈 上覽之嘉歎 降旨于湖西道臣曰 此必草野奇士之隱者 予將起復用之卿其敦遣 公辭以父死未葬 又下敎曰 此非臣子守常之時 戮力討賊乃所以爲孝也命給葬具 公感激涕泣葬詭走開下 懇乞守制上不許 除軍資監參奉 又疏辭特賜對問以時務 仍饋酒食公食舍肉上曰 盤中有素菜可食也 仍下敎曰 天子友匹夫予今與汝友耳 公惶恐退出夜己四皷矣 旋擢拜淸安縣監 越三日又賜對從容問曰 古之臣扶顚持危者孰爲第一對曰 諸葛亮也 上曰 汝言非也謂之知人也 則馬謖庸才而亮用之謂之知兵也 則陳倉小城而亮不勝何爲第一 公曰以堯之明而用四凶 謂亮過於堯則不可謂 亮不知兵則臣有說焉 當時北有曹操南有孫權 亮雖善用兵益州褊小之地安餘收復於數年之間耶至 陳於倉之不窀以糧盡也非才之也 上曰 不然田單以一即墨 復齊七十余城 汝謂益州小乎對曰即墨雖小齊猶在也益州雖大漢己亡也復將之濟易 復己亡之漢難 上然之命蠲淸安貢皿賊移栗以救之從公言也 賜號箭臘藥 是夏丁母喪又命起復時賊警復至公過葬復還任施屢䟽辭該曹以助防 任重不許而公竟棄歸終制 癸卯又上萬言䟽盛論朋黨之獘 且言早晩奴酋入寇 宜預講備禦之圖 後果一一奇驗 乙巳魁庭試除司僕寺主簿 司憲府監察有以居喪不謹劾公者 公上疎自辨尋特叙之 (又有尼之者久之乃叙末幾 宣廟賓天値昏朝潦倒) 內則成均館典籍禮兵刑三曹郞 外則延曙大同察訪 黃州咸興安岳安城瓮津長淵蔚山而其爲黃州則白沙漢陰相公擧之也 以治最陞通政丞旨兵曹參議廣州牧使己未嘉善時甬膽柄國專恣 公代其婿申之益抗章論劾願效槐里令故事爾瞻謂公指嗾令兩司合啓目以反逆淸拿鞠光海不從而公竟坐削奪爾膽甚恨公 又潜遣無賴欲害公不果 癸亥仁祖反正 即除公刑曹參判兼管籌司秋都督毛文龍 以軍資罄竭移帖徵 壬辰軍餉山東米數萬石 特差公椴鳥問安使 公至則呈文乞蠲滅都督讀之 歎曰秦庭痛哭賈生至言 無以遇此卒以無事 公仍以巡檢使審兩西城池及還朝條陳形便乃防虜上中下三策上嘉納之 甲子适變凶徒李佑等誣告故相奇自獻判書柳公亮等三十八人 公亦預焉 並繫獄賊警猝急大駕將幸公州判義禁金瑬請盡誅之以杜內應延平李公貴爭之不能得公遂 以正月二十四日被殺是時人莫不寃之 乙丑延平李公貴白公寃即命復爵公長身美髮髯狀貌奇偉神采秀發少博覽羣書精於易理上自乾象下至醫藥靡不通曉 忠孝素所蓄積與人言必以是二字勉之及蒙被 宣廟不世之恩作自勉書帖之門上朝夕自省曰 有亨有亨無忘國恩殉國一念炯炯如血遭罹不辰落拓不遇及至聖朝改玉駸駸大用而不幸身嬰奇禑抱寃泉壤使假以年 得見丙子之艱驕虜猖獗亦豈至此 惜乎其大抱負不能究其萬一也 然宣力四方 竭心國事亦可謂不負 先生知遇之明也 全氏出旌善 麗末有侍中遇和其孫賓仕太宗朝諫議大夫 有功食邑平康因籍焉 曾祖諱壽山壽百有四歲 中宗朝參養老宴陞階爲大護軍 祖諱誠老賢良科 以趙靜菴先生薦爲刑曹正郞 考諱絪進士蔭德不仕 妣河陽許氏從仕郞希哲之女 議政稠其先祖也 公配仁同張氏軾之女 生一男一女 生員 女適參奉申之益 再娶太原安氏 其考府使鳳 生二男 鋼䥪監役起洙起濂起漢中樞都事 二女靈安君李沐 縣監尹採 長房出二房無后 只一女歸生員張溟 起淵起澄起淳起濟監察起汶 女適通德郞朴安繼三房出 餘不能盡記 公字叔嘉 號鶴松 以丙寅三月初四日生於夢村 享年五九歲葬于槐山牛岩向午之原 即公所鄕云 配張氏安氏祔左槐山北上面距郡十五里名夢村也. 我先子鶴松公贈職曰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 提學成均館春秋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揔府都揔官贈諡曰義愍士林 配亨槐山花岩書院之所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經筵事世子在賓客 李縡撰.
※ 《국가문화유산연구원》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