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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월요일. - 영적인 겸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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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적인 겸손
부활 2주 월요일-2019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오늘 복음을 지금까지 수없이 읽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밤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니코데모가 밤에 찾아왔다는 것을 지금까지 지나쳐 본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아주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남몰래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기를 바란 거지요.
왜 그랬을까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이 체면이 서지 않아서?
유대교 지도자가 풋내기를 찾아가는 것이 역시 체면이 서지 않아서?
아니면 다른 바리사이들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시선이나 비판이 두려워서?
제 생각에 이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서 밤에 찾아온 것이고,
그러기에 니코데모는 아직 인간적이고 세속/육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니코데모는 우리가 복음에서 많이 봐온 다른 바리사이나
최고의회 의원과는 다른 그러니까 훌륭한 면모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겸손합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한참 풋내기인데 최고의회 의원이
예수님을 찾아온다는 것은 인간적인 지위를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스승삼아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겸손은 인간적인 덕에서 비롯된 겸손이 아닙니다.
신앙적이고 영적인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라고
프란치스코가 권고에서 얘기하듯 하느님 앞에 있는 자의 겸손이지요.
그래서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제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한 것이
하늘의 표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이 세상에서 지닌 위치 때문에
인정하려고 들지 않고 사도들의 활동을 막으려 하고 박해를 하는데
니코데모는 주님이 하느님에게서 온 분이라는 것을 표징을 통해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땅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늙어서도 위로부터의 지혜를 찾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덕으로 그리니까 겸손과 열망으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긴 하였지만 아직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아니고,
그래서 아직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지만 아직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했기에
그래서 그는 더욱 안타까워하고 늙어서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고파 애타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교리가 습득덕習得德과 주부덕注賦德을 얘기하듯
우리의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겸손과 열망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이 역사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니코데모가 참 부럽습니다.
세상의 허위와 허영이 없이 겸손하고,
늙어서도 하늘 열망, 구도 열망이 여전히 있으며,
그래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 결국 영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이니.
니코데모를 영적으로 잘 늙고 실패하지 않는
우리 인생의 모범으로 삼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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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으로서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다 지닌 탄탄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밤에” 그가 찾아온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중함이나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사실 ‘밤’의 의미는 무지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세상의 기초들이 모두 흔들린다.”(시 82,5)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밤은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춥시다.”(로마 13,12)
오늘 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요한복음>에서 “위”(아노텐: 위, 새로)란 단어는 다섯 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높은 데, 하늘 혹은 하느님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유대인인라고 해서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생활 개선이나 악습을 고치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한 전적인 새로운 변화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그 물로 깨끗해지고, 예수님의 숨이신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아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생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선사받은 생명이요, 변화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
그처럼,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오히려 변화의 영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 그렇게 변화되는 일, 그리하여 변화된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현존과 활동, 곧 그분의 사랑을 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영으로 새로워진 까닭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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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듭 태어나야 한다
무엇을 배우는 사람은 가능한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지도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효과 있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기초가 바로 섭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도 좋지만 성실하고 눈높이를 맞춰주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주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선생과 학생의 상호협력으로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듣고 실천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한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바탕을 둔 구원의 옛 질서와 가치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와 가치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열어 예수님 말씀을 들었으면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을뿐더러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삶의 자리인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은총을 알아듣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8)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인간 논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성령께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바람이 제 불고 싶은 데로 불듯이’(요한 3,8) 더 이상 틀에 박힌 삶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자유로움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매 순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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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다섯 살 때 집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버스를 탔고, 내렸는데 버스번호를 몰랐습니다. 돌아갈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집을 잃어버리면 파출소로 가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파출소에서 하루를 지냈고, 다음 날 아침에 아버님이 저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버님은 실종신고를 했고, 파출소에서는 저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파출소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저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병원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병명은 ‘유행성 출혈열’이었습니다. 40도가 넘는 고열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지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증언으로는 추기경님께서 기도하면서 파랗게 변했던 제 손끝이 빨갛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의사 선생님의 치료로 저는 보름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와 의사 선생님의 치료가 없었다면 저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삶의 고비마다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방향이 바뀐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누워서 지내야 했던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했던 소경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나병환자는 깨끗해 졌습니다. 듣지 못했던 귀머거리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악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돌을 들고 예수님께 “유다의 율법에는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할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희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소녀에게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소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에 있던 라자로는 다시 살아나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의 학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거듭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의 삶이 아닌 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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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4년 아놀드 스트롱맨 클래식에서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린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드루나스 사비카스로 약 524kg의 바벨을 들어 올린 것입니다. 50kg이 넘는 여성 10명을 들어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믿지 못할 일이 생겼습니다. 교통사고로 자동차 아래 깔린 아이를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경찰이 자동차를 들어 올려 아이를 구한 것입니다. 이 차의 무게는 어떻게 될까요? 자그마치 1,300kg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힘이 나온 것입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근육의 양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신의 힘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증명하기 힘든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실제로 정신의 힘이 대단한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일도 보이는 것,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속해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 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서 거부하곤 합니다. 어마어마한 힘이 주님에게서 나오는데, 그 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해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보다 믿어야 할 분이십니다. 그 믿음 안에서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이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찾아갔던 것이지요.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지만, 아직 그의 믿음은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니코데모를 이끄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세상에 태어나지만 하느님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신앙인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아무도 체험하지 못한 길입니다. 그래서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어야 할 분으로 모시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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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힘보다 강한 것은 세상에 드물다. 미소, 낙관주의와 희망의 세상. 상황이 어려울 때도 '당신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리치 디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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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
복음의 니코데모는 영성생활의 초보자같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 모습이 흡사 어둠에서 빛을 찾는 구도자처럼 생각됩니다. 니코데모에게 주신 다음 가르침이 우리의 영적 삶에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같다.”
바로 저는 어제 강론과, 함께 한 도반들을 통해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세례 받은 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들이, 성령의 바람, 사랑의 바람 따라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바로 바로 위로부터 태어 난, 영에서 태어 난 이들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난, 영에서 태어난 이들은 참으로 성령따라 사랑따라 자유롭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고정된 현실이 아니라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노력으로 새롭게 열어가야 하는 역동적 공동체적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강론시 저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로 사랑의 공동체, 평화, 희망이란 세 요소를 꼽았습니다. 바로 이 사랑의 교회 공동체 내에서, 평화를, 희망을 살아가는 이들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함을 저는 어제 새삼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땅에서 실현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어제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웃으며 제 노트북의 키보드를 교체해줌으로 강론을 쓸 수 있게 해 준 수도공동체의 원장이 바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수도공동체는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어제 사도행전의 모범적 공동체를 롤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모든 사랑의 교회공동체는 말그대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이 함께 봉헌하는 미사전례 은총이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한 부부와 한 분 형제, 한 분 자매, 모두 네분의 도반들, 세상 한 복판에서 성덕聖德의 삶을 살아가는 도반들입니다. 함께 식사후 이 네분들이 평소 존경하며 오랫동안 봉사해왔던 요셉의원의 선우경식 요셉 원장의 묘소를 찾아 기도했습니다. 바로 어제 4월16일은 세월호 사건 희생자들의 9주기 기일이자 선우경식 요셉원장의 15주기 기일이기도 했습니다.
네분의 도반들과 함께 묘지 참배 후에는 잠시 찻집에서 차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수도공동체에서 한달 이야기한 분량은 될 것입니다. 특기할 사항은 함께 했던 부부는 제가 혼인 주례한 제1호 부부로 오늘 4월17일은 결혼 24주년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얼마나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지 어제는 정말 성가정의 성인부부라 격찬했습니다. 자매님을 한없이 행복하게 한 형제의 멋진 고백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 부부는 매일매일이 결혼 기념일입니다.”
서로 떨어져 살아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사는 도반들 역시 사랑의 하느님 나라 교회 공동체 성원임을 새롭게 깨달은 날입니다. 결코 고립단절된 혼자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서로 하나로 깊이 연결, 결속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새삼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 공동체가 이뤄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신록 아름다운 계절에, 이분들 모두는 물론 “4.16 세월호” 유족들에게 선사하고 싶은 “꽃잎진 자리마다” 란 어제 쓴 글입니다.
“꽃졌다하여 슬퍼하지마라
화사한 봄
꽃잎 진 자리마다
꽃보다 더 예쁜
파스카 신록의 열매로
파스카 신록의 잎으로 새롭게 피어나는 구나
부활하는구나
끝은 새로운 시작이구나
꽃잎의 기쁨은 신록의 기쁨으로 이어지는구나”-2023.4.16
물과 성령의 세례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요셉수도공동체에 연결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감동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모두를 위한 고향집(home for all)” 같은 하느님의 나라 요셉 수도 공동체입니다.
한밤중 강론 쓰는 이 시간에도 어제 함께 했던 네 도반들은 물론이고 무수히 떠오르는 교회 하늘의 “파스카의 별”같은, 교회 꽃밭의 “파스카의 꽃”같은 참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들 한분한분에게 드리고 싶은 찬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교회)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예수님(교회)의 자랑이어라!”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나라 입장은 혼자 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입니다. 혼자는 하느님 나라 입장할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 형성된 사도행전의 교회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이미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베드로와 요한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풀려나자 마자 자기가 속한 든든한 배경의 하느님 나라 교회 공동체를 찾아가 있었던 자초지종의 사건들을 보고 합니다.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니 새삼 교회 공동체 기도의 위력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제자공동체처럼 함께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라면, 작든 크든 지상에서 실현된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니,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는 참으로 역동적인 기도와 성령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 지상에서 정중동靜中動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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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니코데모가 주님께 ‘저희는 당신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화의 속에서 드러내는 것은 니코데모가 주님을 알아본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나환자 촌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나환자촌의 삶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미사하고, 아침 준비합니다. 식사가 끝나면 그릇을 모아 설거지를 한 후 잠시 쉽니다. 그리고는 청소와 빨래를 합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더욱 분주합니다. 점심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점심 식후에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텃밭 관리와 음식 재료 준비, 그리고 저녁 메뉴를 정합니다. 말 그대로 삼시세끼입니다.
나환자분들은 저마다의 속도와 방법으로 식사하십니다. 식사가 끝나면 자신의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고 식당을 떠납니다.
그러데 어느 날,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친 한 환자분께서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고는 돌아서서 저와 다른 신부님을 향해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처음으로 저희에게 들려주는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동안에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느라 지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쁨과 고마움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와 자비 안에서 잉태됨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면 그 전에 깊은 사랑과 인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편한 것과 좋은 것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이 편해진 것은 맞는데
좋아진 것 같지는 않아….
세상은 계속해서 발전해왔습니다.
떠올려보세요.
핸드폰이 없던 시절.
컴퓨터가 없던 시절.
자동차가 없던 시절.
편해지긴 참으로 많이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좋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소음과 개인주의
매연과 발전으로 인한 사건 사고들….
편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은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편한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늘 좋은 영적 건강을 선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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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기꺼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거야>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늘 변하기 마련이야
무엇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얼마만큼 변할지
그리하여 어떻게 태어날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변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니
변하는 것을
애써 밀쳐내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다고
헛되이 장담하지 않으며
변하는 그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다만 바르게 변하는 거야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작은 죽음들과
뒤이은 작은 탄생들
작은 탄생들과
뒤이은 작은 죽음들
무엇을 위한 죽음이고
무엇을 위한 탄생인가
탐욕과 독선으로 서서히
살림에서 죽임으로의 변화
베풂과 포용으로 서서히
죽임에서 살림으로의 변화
두 가지 갈림길에서 늘
그분과 나를 생각하는 거야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과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있는 나
나를 새로 나게 하시는 분과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 나는 나
나를 영원히 품으실 분과
그분 품에 영원히 안길 나
그분과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늘 기꺼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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