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큰하다’, 뭐랄까, 대놓고 달지는 않고 은근하게 단맛이 난다는 뜻, 숨겨진 단맛임에는 틀림없으나 여지없이 단맛일 때, 나는 달큰하다고 표현한다. 내 어휘사전은 이렇다. 혹시나 영어로는 달큰하다를 뭐라고 하는지 찾아보니 be sweet이다. 그저 달콤하다는 뜻이겠다. 원어민이 아니라 이것 말고 다른 어떤 어휘가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어로 찾아보았다. 중국어로 달다는 甜티엔이다. 달큰하다는 甜丝丝티엔쓰쓰라고 알려준다. 丝쓰란 단어는 '실'이란 뜻이다. 그래서 뭔가 가느다란 것을 표현할 때 덧붙여 사용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구태여 짜 맞춰 보자면, 단맛이 가느다란 실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분석하면 될까. 그러니까 대놓고 단맛은 아니란 뜻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그나마 우리말에 가까운 세심한 글자 조합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근하다, 숨겨졌다, 이 느낌에 방점을 찍고 싶다. 숨겨진 듯싶지만 여지없이 단맛일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치 보물찾기처럼 희열이 느껴진달까, 이 느낌을 꼭 적시하고 싶은 것이다.
한 3년 주말농사꾼이었다. 상추며 여러 잎채소를 수확하고 감자까지 캐고 나면 땅을 다시 한 번 고른다. 겨울 김장을 할 채소를 심기 위해서다. 배추와 무를 심는다. 주말농사를 하면서 무의 씨가 보석 같은 줄을 알았다. 완연한 녹색도 아닌 것이 형광 페인트를 칠해 놓은 듯 반짝반짝 거리는데, 마치 보석을 잘게 부숴 놓은 듯하였다. 씨앗을 보고 더욱 무가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해 직접 심은 무와 배추로 김장을 담가서 어느 때보다 오랜 세월 두고 먹었다.
중국에는 과일이나 채소나 그 종류가 갖가지다. 땅이 넓으니 당연하다. 토양과 기후가 다양하니까 말이다. 무 종류만도 길쭉한 무, 잘뚝한 무, 하얀 무, 녹색 무, 빨간 무, 자색 무 등 가지각색.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국에서 조선무만한 맛을 찾지 못했다. 풍요 속에 빈곤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종류는 다양한데 내가 찾는 맛이 없으니 말이다. 육질이 물렁거리거나, 단맛이 숨겨지다 못해 아예 사라져 내 맛도 니 맛도 아니거나, 아니면 아린 맛, 어쩌다 단맛 나는 무가 있더라도, 조선무의 상큼한 단맛이 아니다. 조선족이 경작하는 농장에서 나는 조선무가 있긴 하지만, 쉽게 구할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고 조선무를 상상해보라. 일단 색깔부터 단조롭지 않다. 아래쪽의 녹색이 점차 그라데이션 되어 하얘지는 색깔에서부터 이 녀석의 맛이 그리 단순하지 않을 거란 상상을 하게 된다. 말쑥하게 날씬한 몸매라기보다는 토종 한국인 다리(내 다리)처럼 뭉뚝한 것이 위화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김새다. 조선무를 볼 때마다 어떤 동질감을 느낀다. 내 몸매가 딱 이 녀석 같아서 말이다. 미스코리아처럼 늘씬하지 않다. 미스코리아 대회 기저에 흐르는 관념이 여성성의 상품화, 눈에 보이는 여성성의 계량화의 표상이라 한들, 미스코리아가 될 만한 사람이 세상에 흔한가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 옆에 머물기는 아무래도 편치 않다. 나같이 어디가 허리인지 가늠 되지 않고, 종아리가 코끼리의 것인지, 하마의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이들에게 조선무는 딱 맞춤형 위로의 식재료인 것이다.
가을무는 인삼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몸에도 좋다. 기침이나 가래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고, 기관지나 폐에도 좋다는 얘길 들었다. 혈당이나 염증을 낮추는 데도 효과가 있단다. 무와 배와 도라지를 함께 갈아서 먹으면 기침 감기를 가라앉힌다. 위가 약한 사람에게도 적당한 음식이다. 우리는 보통 김치하면 배추김치를 떠올리지만 사실 김치로 먼저 담가 먹기 시작한 식재료는 무라고 한다. 무는 삼국시대에, 배추는 고려시대에 유입된 식재료라니 말이다. 물론 그 때는 고춧가루가 섞인 김치는 아니었다. 고추의 유입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라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빨간 김치는 조선시대 이후에 생겨난 조리법이겠다. 원래는 소금에 절여 오래 보관하여 먹던 것이 김치였다.
오늘 집밥의 주인공 식재료는 조선무다. 중간부분이 임산부처럼 불뚝한 조선무를 하나 사다가 절반으로 나눈다. 한 쪽은 고등어조림의 베이스를 책임져줄 무이고, 나머지 한 쪽은 무 본연의 그것으로 나물을 만들 참이다. 고등어는 생물로 싱싱한 것을 준비한다. 생선 요리를 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비린내 제거가 관건이다. 생선은 싱싱할수록 비린내가 없으니 싱싱한 것을 준비하는 것이 상식 중에 상식이나 여기에 비린내 제거의 비법 하나를 공개한다면 고등어의 비늘을 벗겨내는 것이다. 비린내의 주범이 비늘이란다. 어느 요리 연구가에게 배웠다. 멸치로 육수를 내면 좋겠지만, 멸치 육수가 없어도 무가 감칠맛을 대신해 줄 것이니 필수재료랄 것은 아니다. 먼저 넉넉한 물과 함께 무를 끓인다. 육질이 단단한 조선무는 물러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아, 무의 육질이 물러진다고 걱정하지 마시라, 육질이 단단한 조선무는 물러졌지만 형태는 해체되지 않은 채 부드러운 식감을 선사할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양념, 고추장, 고춧가루, 마늘과 후추, 간장 그리고 설탕 약간, 설탕대신 배 음료가 있으면 그걸 넣어도 무방하다. 양념은 물에 잘 풀어 절반은 무를 끓일 때 넣어주고, 나머지 절반은 무가 어지간히 익었을 때, 고등어를 넣은 다음 뿌려주면 된다. 생선은 본래 오래 익히는 법이 아니다. 그래서 조림용 생선도 미리 간을 살짝 해두면 좋다. 조림은 색깔이 발그스레하면 안 된다. 뭐니 뭐니 해도 고추장,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은 빨그족족, 제대로 빨개야 먹음직스러운 법이다. 자 되었다. 잘 익은 무 한조각과 고등어 살 한 점을 크게 떼어내어 한 숟갈에 먹어보시라. 미세한 섬유질의 느낌과 은근한 단맛과 조합한 매운 맛이 생선의 살점을 감싸며 탄수화물을 부를 것이다. 한국 반찬은 밥을 부르는 게 약점이다. 어이할꼬.
매운 것이 부담스럽다면 이제 나머지 반쪽으로 무나물을 한다. 채칼은 사용하지 않는다. 천편일률적인 기계적 단정함보다 사람손이 간 조화로운 변이가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썰어둔 무에 소금 밑간을 살짝 한다. 20분 정도만 두어도 되겠다. 무생채처럼 물기를 꼭 짤 필요는 없다. 볶으면서 물기는 날아간다. 들기름이어도 참기름이어도 된다. 나는 들기름을 선호한다. 프라이팬에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볶는다. 물기가 부족할 것 같으면 살짝 물을 더해줘도 된다. 다진 마늘과 파는 당연한 양념이다. 여기다 들깨를 가미한다. 들깨가 남은 수분을 책임져 주면서 무의 단맛에 고소한 맛을 입혀준다. 들깨의 고소함이란 땅콩 등 견과류의 고소함과는 별개의 것이다. 식재료란 본연의 맛이 옹골진 것도 있지만, 남의 맛을 감싸며 풍미를 더하는 것이 있는데, 들깨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재료다. 들깨가 좋다. 들깨가 약간의 무늬를 만들고, 그대로 햐얀 몸의 무나물이 완성되었다.
하얀 꽃을 보는 듯하다. 카라 꽃일까. 하얀 몸이 주는 느낌 때문에 말끔하면서도 무엇이든 환대할 것 같은 자세는 그 자체로 나에게 교훈이다. 카라 다섯 송이의 꽃말이 ‘아무리 봐도 당신만한 여자는 없습니다’라는 뜻이라니, 꽃말이 왜 그런지에 대하여 무식한 나로서는 음식의 의미 또한 갖다 붙이기 나름인가 싶어 무나물에 내 맘대로 말을 갖다 붙인다. “아무리 봐도 당신만한 교훈은 없습니다”. 하하.
떠나보니 알겠더라. 흔했던 많은 것들이 얼마나 내게 필요했던 것인지를. 얼마나 나를 풍요롭게 했던가를. 그래서 오늘따라 생각나는 한시.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盡日尋春 不見春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芒鞋遍踏 隴頭雲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歸來笑然 梅花臭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春在枝頭 已十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