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평소의 생각이 표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 질문 >
저는 평소에도 꿈을 많이 꾸는 편입니다. 하지만 요즘 따라 별로 좋지 않은 꿈을 많이 꾸게 됩니다. 자기 전에 호흡에 알아차림 하면서 잠이 드는데, 꿈을 꾸는 시간대가 아무래도 새벽시간 대였습니다. 이때 꿈을 꾸고 깨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꿈에서 느끼는 감정, 행동, 표상들 특히 그것이 좋지 않거나 불쾌하거나 나쁜 것이라면 일상에 생활하는 내내 신경이 쓰이고 걱정근심이 됩니다. 꿈이 가지는 해몽적 측면이나 미래 예지적 기능 등을 생각하면 더 그렇기도 합니다.
일상에서는 내가 좋은 감정이나 나쁜 감정이 일어나면 알아차림 하면서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데, 예를 들어 일상에서 화가 나도 알아차림 하면서 화를 조정할 수 있는데 꿈의 경우에는 화가 나면 바로 크게 소리치면서 화를 내더라고요.
꿈도 마음작용의 하나라면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니면 아예 꿈을 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꿈에 관련된 여러 책도 읽어 보긴 하였지만 뭘 말하는 건지...잘 모르겠어요.
수행적 측면에서 볼 때 꿈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지, 특히 안 좋은 불길한 꿈이라면 말입니다. 꿈을 꾸게 되는 원인, 조건 그리고 꿈이 가지는 상징성 등 이런 것에 대해 수행에 진도가 나가게 되면 어느 정도 지혜가 열릴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꿈과 관련해서 프로이트, 융 등 심리학자에서부터 시작해서 민속적 측면에서 해몽서적까지 망라한 지식보고에서 꿈의 원인과 조건, 상징성, 예언적 측면까지 명확히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어느 정도 수행을 해야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밤 10시나 11시 대에 좌선을 하는데 쏟아지는 잠을 알아차림 하려니까 정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눈꺼풀 무거움을 알아차림 하려는데, 마음이 강하게 '잠자고 싶다. 눕고 싶다'하는 그 의도가 너무 강하게 작용하니 눈꺼풀의 무거움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럴 때 마음을 보려고 해도 잠이라는 욕망이 너무 크니까 알아차리려도 해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팔을 주무르고 다리를 주무르고 졸음을 쫓으려고 20분 정도 용쓰다 결국 드러누워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잠의 힘이 강하게 작용되는 때에 알아차림이라는 요소를 개발하기란 정말 힘이 드는 것 같아요. 이런 경우 사띠를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서 강하게 밀어 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일상 생활할 때 생기가 있고 기분이 업되는 시간에 아, 지난밤에 내가 잠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구나 하는 기분이 들면 후회가 되다가도 아니야, 잠에서 이겨낼 수 있어! 하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 다짐하곤 합니다만, 막상 잠의 세력에 부딪치면 사띠가 힘을 쓰지를 못합니다.ㅠㅠ
이러니까 막상 죽음이 닥치면 이 마음이 얼마나 당황하고 허둥댈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지금 깨어 있을 때, 살아 있을 때 이렇게 정신이 또렷하고 활기찬데, 잠의 세력이 크거나 죽음이라는 상황에 부딪치고 하면 어떻게 정신을 차릴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두서없이 글을 적었지만, 마음이 답답해서 올려 봅니다. 마음공부, 수행이 쉬운듯하면서도 어렵네요.
모든 존재들이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 답변 >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데 잠을 잘 때는 잠을 대상으로 하고, 꿈을 꿀 때는 꿈을 대상으로 합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열반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열반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렇듯 마음은 잠뿐이 아니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상태가 있습니다. 이 말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꿈은 잠을 잘 때 꾸는데 이때 수, 상, 행이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상(想)의 기능이 작용합니다. 꿈을 꿀 때의 상은 표상입니다. 이러한 표상도 미래에 올 것을 예지하는 표상이 있고, 단지 기억에 저장된 것이 깨어있을 때 생각하듯이 표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열증 환자나 우울증 환자나 마음이 허약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환청과 환시도 모두 이런 현상입니다. 무속인에게서 나타나는 능력도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최종적 견해는 아비담마에 의해 몸과 마음이 완전하게 분석된 것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미란다 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말하기를 꿈은 미래에 올 것을 예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시를 해서 맞추는 꿈이 아닌 경우의 꿈은 꿈이라기보다 평소의 생각이 표상으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잠자리에서 불길한 꿈을 꾸었다면 평소의 마음이 편치 않고 불안정한 상태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꿈은 현재의 마음가짐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망상이 아무 때나 나타나고 또 줄거리도 없는 이런저런 생각이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과거와 미래의 것을 아우르며 바쁘게 활동합니다. 예지가 아닌 일반적인 꿈이란 이러한 현상이 잠을 자면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꿈에 대해 큰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런 일상적인 꿈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면 자신의 생각이 만든 덫에 걸려 공연한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수행을 하면서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한 경험이 많이 있었습니다.
뇌가 1초 동안에 뛰는 파동에 따라 의식을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깨어있는 상태의 베타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명상을 하면서 집중이 되었을 때의 알파파가 있습니다. 이 의식의 아랫단계가 잠을 자는 상태의 데타파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가장 깊은 상태로 잠을 잘 때가 델타파입니다. 꿈은 의식이 깊은 델타파의 파장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잠을 깨기 전이나 잠을 자는 가수면 상태의 알파파에서 일어납니다. 이 상태가 명상을 할 때의 집중의 상태이기도 하고 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꾸는 꿈은 비몽사몽간에 꾸는 것으로 꿈을 꾸는 것을 꿈속에서 알기도 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현상이란 깨어있는 의식과 잠을 자는 의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잠속에서 알아차린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잠속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꿈에서 알아차렸다면 실제의 알아차림이 아니고 꿈속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꿈꾼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지켜보는 깨어있는 행위이지 잠을 자면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깨어있는 알아차림에 의해서 지혜가 나므로 알아차림과 꿈과는 전혀 무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없는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현실이 바로 꿈입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아는 꿈속에서 살면서 또 꿈을 꾸는 것이므로 꿈은 하나의 망상으로 여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꿈으로 인해 불길한 느낌을 투사해서 불필요한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이처럼 꿈을 꿀 때는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꿈을 꿀 때는 잠재의식에 있는 기억이 그대로 노출되어 악몽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단지 방법이 있다면 악몽에서 깨어나 꿈인 것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잠을 잘 때의 상태와, 꿈을 꿀 때의 상태와, 깨어있는 현재의 상태의 차이입니다.
결론은 꿈에서는 알아차릴 수가 없으므로 깨어있을 때 많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깨어있을 때 많이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어 지혜가 나면 평소에도 잠재의식이 청정해져 꿈속에서도 삿된 망상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라한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서 꿈까지 완전하게 청정할 때 비로소 윤회가 끝나는 해탈에 이릅니다.
잠을 자야할 때인 밤 10시나 11시에 좌선을 할 때 잠이 와서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이완되어 잠을 자야할 시간에 잠과 싸우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이것은 용사가 하는 투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수행이 아니고 현재 몸과 마음에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때 잠이 몰려 왔으면 단지 잠이 몰려온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여기서 잠을 자고 자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를 얼마나 알아차렸느냐 중요합니다.
잠을 자기 전에 호흡을 두 세 번이라도 알아차리면서 자는 것이 와선입니다. 기회가 있으면 한국명상원에 한번이라도 오셔서 잠을 잘 때의 수행을 배워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악몽으로 인해 괴로움이 적어질 수 있습니다.
죽을 때의 마음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어떤 마음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므로 가장 중요한 마음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죽을 때의 마음은 인식할 수 없는 워낙 빠른 마음이라서 자기 의지대로 조절하기 어렵습니다. 추측해보자면 살아있을 때 가장 많이 먹던 마음이 죽을 때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이라고도 합니다.